이흥주, 물의 안부, 『문정문학 5집』

봄내, 여름내 푸르렀던 들판이
서서히 비어간다.
하나둘 익은 것부터 함박웃음으로 안기는데
왜 자꾸 햇빛은 희미해져 갈까
아침저녁
서늘바람이 옷깃을 파고들 때쯤 대지는 풍성함이 넘치는데
왜 가을빛은 힘을 잃어갈까
햇빛이 슬프다
수확의 풍요와 함께 옆구리 시리게 우수가 스민다
하늘빛은 유리알이건만
힘빠진 가을볕에 만물이 안으로만 움츠려든다
조금 있으면 대지가 얼어붙어 동면에 들어야 함을
세상은 먼저 얼고 있다
동토가 저만큼 노리고 있음을 
대지는 알고 있다
무서운 돌림병
모두 가을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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