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면 백운리 모영대 어르신 1938년~
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54)

4월이었다. 노란 유채꽃이 만개해서 개울을 덮고 물소리만 내던 날, 파란 대문 그 집은 유채꽃과 어우러져 수채화 같았다. 문패에 모영대. 필시 남자 어르신 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엇갈린 빗장을 슬며시 열었더니 끽! 쇠 소리를 내면서 대문이 열린다. 마당을 절반이나 차지한 장독대, 가지런히 줄맞춰 있는 모양새에 눈길이 갔다. 붉은 조끼를 입은 고운 어르신, 빨간 립스틱으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은 ‘여인 모영대’님이 그 집의 주인이었다.

 

■ 소용돌이는 희미한 기억의 끈에서부터 

배탈이 났다고 전화를 걸면 바로 뛰어올 수 있는 거리에 큰 딸이 산다. 6년 전에 떠난 남편 몫을 하고도 남는다. 작고 아담한 집, 이제 혼자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가끔 아이들이 오면 방안에 한가득 모여 오순도순 시간을 보낸다. 아침이면 증손주 사진을 보면서 눈을 뜬다. 손주 사위가 애들이랑 와서 한방에 자고 간다. 적적한 나를 위로해준다. 집을 지키는 이는 나 혼자이지만 집안 모퉁이마다 아이들 발자국이 스며들었다.

남편은 교사였다. 충북의 학교를 전근 다닌 남편 덕에 나도 시골 구석구석까지 다 다녀봤다. 정년퇴직은 이원중학교 기술 선생님. 학교 선생 하느라 사방 안 다닌 곳이 없다. 나도 덩달아 충북지형은 꾀고 있다.

내 고향은 청주 상당 산성 동네다. 

모영대라는 이름은 한번 들으면 잊혀 지지 않는다. 특이한 성에 이름은 남자 이름, 함평 모씨 永大 걸쭉한 남자이름이다.

산성마을이 지금은 호수를 끼고 식당가가 늘어섰다. 우리 어릴 적 그림자는 찾을 수 없지만 유년시절에는 호수 낀 산성안 동네는 별천지 같았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다. 형제는 6남매 가운데 오빠 셋 남동생 둘 외동딸로 가산국민학교를 왜정 시대 1학년정도 다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을 배우다가 해방이 됐다. 동네 어른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만세소리에 해방이 된 줄 알았지만 그게 해방인지는 나중에 알았다. 그저 마을에 잔치가 났다고 생각했다. 배고픈 시절이었다. 바가지에 보리쌀을 배급 받은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보리 고개는 진즉부터 있었다. 그렇게 오빠 남동생을 둔 외동딸로 가난하지만 마음은 배고프지 않았다. 아동기를 보내면서 6.25를 만났다. 

처음으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은 나이였어. 열세 살, 청주 상당 산성 동네라 피난민이 모여들었지. 작은 시골 동네에서 사람구경을 제대로 못 하던 우리들은 낯선 사람들이 보따리 하나씩 챙겨서 마을로 들어오는 모습이 신기했지. 조용한 산성 동네라 폭탄 터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낯선 사람들이 마을로 계속 온다는 건 우리들에게 사건이었어. 어머니가 담아놓은 장을 피난민에게 나눠주면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어. 전쟁 난리 통에는 밥 한 끼 먹기도 어려울 때라 그게 이웃들한테 하는 보시였어. 우리도 투정 부리지 않았지.

한창 피난민들이 마을에 오더니 이번에는 인민군들이 들이 닥쳤다. 총을 멘 인민군들은 그 자체가 공포였지만 다행히 우리를 해코지 하지 않았다. 후퇴하면서 밥이라도 얻어먹으려고 산성 동네를 찾았던 거다. 동네에 대추나무가 많았는데 인민군들이 대추나무를 죄다 털어먹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대추를 먹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옆에도 못 갔다. 총이라도 들이대면 어쩌나 노심초사 했지만 끼니를 때우고 마을을 떠났다. 어떤 인민군들은 우리 집에 와서 잘 방만 내주면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했다. 가슴이 조마조마 했지만 아버지는 방을 내어주었다. 총칼 든 인민군이랑 한 지붕 아래서 며칠 밤을 보냈다. 새벽녘에 끼익! 옆 방문 여는 소리라도 들리면 우리 방으로 쳐들어올까 밤 잠 설치는 게 예사였다. 어쩔 수 없었고 전쟁은 우리가 선택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비극이다.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총알 세례보다 인민군과 한 집에 기거 하는 공포가 더 큰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인민군들이 퇴각하고 다시 마을에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 00연맹 사건이라고 나중에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전하는 말을 귀동냥했다. 지금도 식은땀 나는 충격은 구덩이를 파고 사람들을 몰아넣어 총살을 시킨 현장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우리 어린 아이들은 나무 뒤에 숨어서 한쪽 눈을 감고 그림자 같은 현장을 목격했다. 자다가 가위 눌리는 건 예사였다. 식은땀을 뻘뻘 흘려서 옷이 다 젖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쟁은 그렇게 아이들에게도 처참한 현장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영혼이 도륙되는 아픔을 저마다 처한 환경에서 만나게 된다. 그저 살아남는 게 전부다. 산성마을 작은 동네에서도 신랄하게 6.25를 겪었다. 그 어수선한 난리 통에 학교 다닐 여력이 안됐다.

■  시집살이는 도 닦는 일 

열아홉 살 먹어 시집을 왔다. 시댁 어른이 충북 정봉 강내면 사는 총각을 중신했다. 청주역 앞에 살았다. 남편은 22살 대학생이었다. 충북대 4회 졸업생인 남편은 충북대 수학과에 입학했었는데 한해 등록금을 못 냈다. 소 팔아서 대학 보내던 시절, 눈물겨운 사연인즉 소를 못 팔아서 그해 입학을 못하고 다시 시험 봐서 축산과에 들어갔다.

남편은 결혼하고 군대에 갔다. 큰 딸 낳고 남편이 학생이라 시아버지가 생활비 대고 시누가 5명 그나마 밥은 먹고 살았다. 남편이 챙겨주지 못하고 나도 손맛 맵지 못한 시절이라 하루하루가 고됐다. 어린시누이들 투정도 한 몫을 했다.

나도 그니들을, 그니들도 나를 이해하고 같은 여자로 보듬기에는 우리는 다들 어렸다. 시집가니까 큰 시누가 17살, 막내 시누를 업고 밥을 해먹었다. 밤이면 막내 시누 머리를 내 무릎에 올려놓고 호롱불 밝혀 이를 잡아주면서 키우다시피 했다. 어린 시누라 밥 안 먹고 괜히 골 부리는 건 예사였다. 친정에서 외동딸로 귀여움 받고 자라서 시누이 어리광을 눈감아 주기에는 나도 속이 간장종지 만했다. 부아가 치미는데 참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시부모님이 알아주면 좋으련만 다들 사는 게 팍팍한데 며느리 속앓이까지 헤아려 달라기엔 내 욕심이 과했다. 혹여 어머니께서 

“아가야 다 참고 사는 거다. 속상해도 그러려니 해라” 한마디라도 하셨으면 아마 깊은 속앓이가 그리 길지는 않았을 텐데... 

박봉에 시달렸던 교사의 아내도 추억하며

남편은 농촌지도소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교사임용 시험을 보았다. 

하루는 무심코 던져놓은 신문을 보다가 낯익은 이름이 적힌 신문을 품에 안고 눈물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감격을 누렸다. 바로 교사임용 합격 1등에 ‘서정식’ 이라고 대문짝만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늦은 출발을 하게 돼서 남편은 연령 제한의 마지막 나이라 그 기쁨을 두 배로 누릴 수 있었다. 옥천 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며 남편은 강직한 선생님의 길에 들어섰다.

감격으로 시작한 교편생활이지만 사명감만 꽉 차고 사명감을 받쳐줄 생활의 여건은 어려웠다. 교사의 아내였지만 박봉에 시달리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내조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이면 옷 한 벌을 가지고 밤에 빨아 널어 아침에 빨랫줄에 걸린 이슬 녹아내린 그 옷을 다시 입는 게 예사였다. 내 것을 누리기에는 교사의 아내로서 여력이 안 되었다. 남편 입성 아이들 입성이 먼저라 구두쇠소리도 들어가면서 나 좋은 거 챙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햇살아래 가지런히 자리 잡은 장독대, 어르신의 손맛
휴대폰을 열면 언제나 반기는 남자, 먼저 간 남편

 

아이들 코트 한번 제대로 못 사 입히고 학창시절을 보내게 했던 때가 마음이 아프다.  

청산 학교로 오면서 우리도 백운리와 연을 맺고 남의 집 세를 얻어 살던 그때를 까마득한 옛일로 기억한다. 이제 쌀독 걱정 없이 사는 지금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고생했던 남편과 함께라면 더없이 좋겠지만 먼저 떠난 남편이 야속하기보다 남편과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 쓸수 있는 이 집이 좋다. 남들은 나에게 부뚜막이 불편하다고 입식으로 바꾸라지만 가마솥을 걸어둔 이 부엌이 과거의 나, 지금의 나와 가장 친한 벗이다.

고단하고 어려웠던 시절 부뚜막은 내 하소연을 가마솥에 죄다 녹여버렸고 지금은 그날을 추억으로 얘기할 수 있는 편안한 노년을 맞았다.

은순이 엄마 경애 엄마 이웃으로 친구로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동무들, 휭 하니 바람 쐬러 나갈 때 페달 돌릴 수 있는 자전거는 더 좋은 벗이다. 여든이 넘어 자전거를 타고 한달음에 청산읍내를 돌 수 있다. 다리가 튼튼해서도 아니며 서로 오랜 벗이 되어 적당히 맞출 수 있는 것이다. 

퇴직하고 나이 들어 차타고 전국 일주 하자던 남편의 약속이 공수표가 된지 6년이 넘었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 대신에 내가 몰고 나가는 자전거가 나에게 더 큰 위로가 된다.

누가 물었다. 다시 태어나도 돌아가신 영감님과 살고 싶냐고 말이다. 나는 “당연하지” 라고 즉답을 했다. 

꼭 금슬이 좋아서일까? 우리 부부도 어려운 시기를 지나며 노하고 애석해하면서 살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서운했고 거꾸로 내가 누군가를 마음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 벽을 넘어 도란도란 여생을 꾸려나갈 때다. 내가 자전거와 호흡 맞춰 휭 하니 달려 나갈 수 있는 것처럼. 

- 백운리 자전거 타는 할머니, 
‘모영대’ 로 부터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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