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 2019 / 샘 멘데스<br>
1917 / 2019 / 샘 멘데스

영화 ‘1917’은 원씬 원컷 방식으로 찍은 영화다. 영화는 보통 120장 정도의 시나리오, 10개 미만의 시퀀스, 100개 내외의 씬, 수천 개의 컷으로 구성한다. 컷은 카메라의 촬영이 시작되어 끊기기 전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촬영상의 최소 단위로, ‘장면’이라고 적당히 치환할 수도 있다. 여러 개의 컷이 모여 씬이나 시퀀스가 되고 영화가 된다. 롱테이는 컷을 나누지 않고 상영시간 내내 한 개의 컷을 지속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 개의 컷은 한 개의 씬이 되고 한 개의 시퀀스가 된다. 그래서 보통 원컷 원씬 원 시퀀스라고 한다. 컷을 나누지 않고 영화를 찍는 건 무척 어려운 작업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 / 2017 / 우에다 신이치로

최근 3,000만원의 저예산을 만든 일본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는 좀비를 소재로 37분의 단편영화를 원컷 원씬 원 시퀀스로 찍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NG가 나면 처음으로 돌아가야한다. 돌아기자 않으려면 수많은 리허설이 필요하다. 그래서 촬영이 시작되면 스텝들은 초긴장 상태가 된다. 영화 ‘1917’은 롱테이크로 찍었다는 정보를 알고 있어서 영화 보는 내내 프레임 바깥의 스태프들과 비슷한 심정으로 영화를 봤다. 

‘1917’은 촬영의 거장 ‘로저 디킨스’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참고로 ‘1917’로 두 번 째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았다. 뛰어난 촬영 실력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수상은 매우 늦었다. ‘2018 블레이드 러너’로 첫 촬영 감독상을 받았다. 

롱테이크는 주로 예술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법이다. 헐리우드가 컷을 잘개 쪼개면서 캐릭터를 묘사하거나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데 사용한다면 예술영화는 대상을 길게 오래 바라보면서 프레임을 통해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유도한다. 1940년대 등장한 ‘네오 리얼리즘’은 편집을 줄이고 현실을

그대로 옮기려는 시도를 했던 사조다. 1940년 대 네오리얼리즘이 주창한 사실주의는 현장의 질감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조명과 음악을 최대한 배제하고 배우들이 미리 계획하지 않게 대본도 현장에서 만들거나 당일에 나눠준다. 배우는 그저 현상의 일부거나 사물처럼 존재한다. 공간과 인물이 빚어내는 일상의 균열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에 편집과 컷 그리고 조명으로 유사현실을 창조하는 쪽도 있다. 그래서 몰입을 위해 가짜 현실이 들키지 않도록 시나리오와 이야기의 굴곡이 중요하다. 그리고 배우는 극의 긴장을 만들기 위해 관객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악력이 필요하다. 헐리우드 카메라는 인물이 중심이고 인물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1917’의 카메라는 주인공의 동선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전쟁으로 관객을 끌어들였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동원 된 롱테이크는 환타지로 바뀌었다. 그래서 주인공이 시도한 두 번의 질주는 개연성이 약했다. 

의심스러운 첫 번 째 질주는 주인공이 불타오르는 시가전을 뛰어가는 장면이다. 이때부터 영화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불타는 도시를 뛰어가는 장면을 볼 때 나는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의 유저가 된 기분이었다. 감독은 관객들의 몰입을 유도하기 위해 롱테이크로 불타는 시가지를 달리게 했지만 나는 몰입이 깨졌다. 전쟁을 단순 오락물로 바꾸려는 감독의 불순한 의도가 보였다. 오랫동안 관객을 몰입하게 하려는 낡은 전략이 보였다. 미안하지만 전쟁은 단순 오락물로 바꿀 수 없는 인류의 끔찍한 얼룩이다. 한때 전쟁의 명분을 정당화 하기 위해 권선징악의 구도로 수많은 전쟁 오락물(람보1은 전쟁의 후유증을 다룬 수작이었지만 람보2부터는 다시 명분없는 전쟁의 현장으로 내몰았다. 미국 군수산업의 홍보대사가 되었다. 놀랍게도 최근 마지막 작품이 ‘라스트 워’다)을 만들었던 헐리우드도 이제는 염치가 있는지 자제하고 있다.

1917영화 한 장면 ‘두번째 질주’

두 번 째 질주는 공격을 멈추게 하기 위한 전령을 전달하기 위해 주인공이 달리는 장면이다. 절묘하게 공격을 시도하던 상황에 주인공은 방공호를 피해 포탄이 날아오는 들판으로 올라가 지휘 장교에게 달려간다. 느린 화면과 뛰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전쟁의 끔찍함을 잊게 만드는 아름답지만 불편한 장면이었다. 한때 국어 시간에 배웠던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가 씁쓸한 건 일본이 점령하던 식민지 시절의 가을이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다큐라 칭찬받는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도 마찬가지로 히틀러가 전쟁을 준비하던 야만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라이언을 구하라는 무리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영화 초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기름기를 빼고 묘사한 휼륭한 시퀀스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장면에서는 결코 히어로가 나올 수 없는 전쟁 그 자체의 처참함을 잘 표현했다. 쏟아지는 총탄 속을 질주한다는 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공격을 중지하라는 전령뿐 아니라 관객을 감동시켜아 한다는 1917의 제작자와 영화 산업 메커니즘은 주인공을 달리게 했다. 그 순간 영화는 판타지로 바뀌었다. 주인공과 동일시 된 관객들도 손에 땀을 쥐며 함께 달렸다. 반면에 나는 유체이탈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포탄과 총알은 주인공을 비껴 나가고 주변의 엑스트라들이 나뒹굴었다.  *‘개인적 우화’가 영화를 통해 실현되었다. (개인적으로 청소년기 시절에 총탄이 나를 빗겨나갈 거라는 귀여운 망상을 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헐리우드 캐릭터 구축의 기반은 ‘개인적 우화’에 머무르고 있는 거 같다. 그리고 주인공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착한 곳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던 병사의 찬송가는 관객들의 감성을 긁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영화 초반 집으로 가기 싫다던 주인공이 지갑에서 꺼낸 편지에는 ‘꼭 돌아오라’는 뭉클한 문장이 갑툭튀로 관객의 눈물을 소환했다. 두 개의 가짜 리얼리티는 ‘1917’을 헐리우드의 전형적인 평범한 작품으로 만드는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신파멜랑코니 전쟁 액션물이라고 블로그에 적었다.   

‘1917’은 작품상을 타기 위해 아카데미의 거푸집에 들어갔다가 나온 영화다. ‘기생충’이 아니었다면 ‘1917’은 작품상을 타게 되는 평범한 아카데미의 습관을 이어갔을 게다.   

개인적으로 영화 ‘아메리칸 뷰티’ 때문에 ‘샘 멘데스 감독’을 좋아했다. 이후 ‘아메리칸 뷰티’ 만한 작품은 나오지 않았지만 (초반 작품 외에는 많이 힘이 들어 갔다.)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지켜봤다. 하지만 이번 ‘1917’을 보면서 초창기 자기 스타일을 가지고 있던 감독이 헐리우드의 습관에 매몰되었다. ‘아메리칸 뷰티’에 대한 마지막 남은 애정으로 샘 멘데스에게 부탁한다.  

관객에게 답을 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상영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                                             

-아쉬가르 파라하디 ‘이란 감독’

 *개인적 우화(personal fable)- 청소년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경향을 의미한다.

로프 / 1948 / 알프레도 히치콕<br>
로프 / 1948 / 알프레도 히치콕

 

서스펜스의 거장 ‘알프레도 히치콕’은 영화 ‘로프’에서 24평짜리 아파트를 벗어나지 않고 1시간 30분짜리 롱테이크 영화를 완성한다. 단, 필름을 12분마다 갈아 끼워야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필름을 갈아 끼우고 태연하게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간다. (필름을 갈아 끼우는 방법을 영화에서 찾아보는 재미가 있음)

자헤드-그들만의 전쟁 / 2005 / 샘 멘데스

샘 멘데스 감독이 만든 <자헤드-그들만의 전쟁> (2005)년은 ‘1917’과 정 반대 지점에 있는 영화다. 놀라운 건 전쟁영화지만 전쟁씬이 없다. 제작자와 대중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영화제작의 현실이지만 자기만의 스타일을 꾸준하게 만들어 나가는 감독이 되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오랫동안 007 시리즈로 외도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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