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박석신 교수 추천으로 풍경화 입문한 박찬훈씨
부소담악, 대청호 경관과 수몰된 고향 이평리 갈벌 그리며 작품 활동

그는 미술에 관한한 무학이었다. 배움은 전혀 없었지만 재능은 밑바닥에서부터 현현하게 흘렀고 오랫동안 살아온 결이 남달랐다. 남들 다 떠났을 때 홀로 돌아와 마을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 지역의 뼛속까지 풀한포기 나무 한그루 놓치는 게 없었다. 몸과 마음으로 익혔던 것이 넘쳐 흘러 절로 발현된 것인지도 몰랐다. 부소담악 카페에서 한 전시회 팜플릿을 보았을 때 미안한 얘기지만 그와 그를 일치시키지 못했다. 동명이인인줄 알았다. 큰 몸집에서 기차화통같은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을 때는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화화상 노지심’을 연상케 했다. 마을 민원 현장에 항상 그가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때론 대청댐 때문에 피해를 입은 수몰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다. 감정이 잔뜩 실린채 한창 고음이 올라가는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인 줄 알정도로 전매특허였다. 
 옥천 떠나가라 호통 치는 목소리로는 손에 꼽는 박찬훈(67) 군북면 추소리 전 이장의 그림으로의 귀의는 인상적이다.  
 그런 그가 오랫동안 해온 이장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마음이 적잖이 상했었을 것이다. 나름 마을발전을 위해 애써왔다고 생각했는데 지지를 못받았을 때의 그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있었겠는가. 홧병이 날뻔 했다고 했다. 부아가 나서 하루종일 속이 시끄러웠다. 그러다가 배를 타고 나면 마음이 다스려졌다. 글씨를 쓰면 마음이 다 잡히곤 했다. 그래도 여지가 남아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미대 교수들이 모여서 부소담악을 그린다고 배를 빌렸다. 그는 배의 선장으로 미대 교수들을 태우고 나갔다. 햇볕이 내리쬐는 데 한참을 그리더라. 급한 성격에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배도 고픈데 계속 그리겠다고 하니 지루한 시간을 참을 길이 없다. 그래서 청했다. ‘저도 지루하니 뭔가 그릴 걸 주시오’ 그랬더니 한 교수가 조그만 켄트지 몇장을 건네주더라. 슥삭슥삭 그렸다. 워낙 많이 봐왔던 풍경이라, 거기다가 마을 사업으로 나무 한그루, 꽃 한포기, 정자까지 다 만들었던 터라 ‘안 봐도 비디오’였다.                     

■ 그가 그린 그림에 반응이 남달랐다.

건네준 그림에 반응이 남달랐다. 재능을 봤던 것이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가 되었다. 정식 학교를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그림에 입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묵화에서 점점 컬러풀한 수채화로 부소담악에서 추소리, 환평리, 이평리 마을로, 군북면에서 옥천으로 그가 그리는 배경은 점점 넓어져 갔다. 풍경만 그리다가 사람도 그려 넣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일취월장이었다. 그림에 몰입하면 시간이 금방가고 화가 다스려졌다. 동적인 에너지를 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켜 화폭에 담았다. 격정이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의 정화를 거친 자잘한 점들이 형상을 만들어냈다. 바라만 보고 있으면 그 고즈넉한 풍경에 빠져들었다. 독특한 그만의 스타일이 완성됐고 그림은 나날이 진화하기 시작했다. 병풍같은 부소담악을 다 담아낸 길다란 화폭의 그림도 최근 완성했다. 그림이 빨랐다. 어떤 그림은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완성했다. 낯선 풍경이 아니었기에 그가 늘 거닐고 가꾸었던 풍경이었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대전에서 먼저 첫 개인전을 열었다. 여럿이 군집전을 연 이후에 연 두번째 전시회이자, 첫번째 개인전이었다. 스승에게 호도 얻었다. 추암, 추소리의 바위란 뜻이다. 모든 세월과 풍경을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그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호였다. 이제 그는 날마다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면서 거친 성정이 다스려지고 비로소 평안을 찾았다.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렇게 세상 좋은지 모르고 살았어. 이장 일하면서 오로지 동네 발전만 생각하면서 공무원들한테 좋은 소리, 싫은 소리하며 살았거든. 이제 그림에 안착하면서 평화를 찾았어. 그림 안 그리면 삶의 재미를 못 느껴. 붓 잡을 땐 몸도 안 아파.”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긴 했지만 전문적으로 배우거나 꾸준히 그려보진 않았다. 마을 외부 손님들이 찾아오기 편하게 주민들 이름을 넣어 마을 약도를 그려본 게 다였다. 추소리마을 이장이자 뱃사공으로 평범하게 살아오다 계기가 찾아왔다. 2년 전 그림을 그려보는 게 어떻겠냐는 미대 교수의 제안을 수락한 게 여기까지 오게 됐다. 부소담악 근처에서 서낭재가든 식당을 운영하는 박찬훈(67)씨 이야기다.

■ 애환 가득한 18년 이장생활, 운명처럼 찾아온 그림

추소국민학교(5회 졸업), 대전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 번 들은 건 잊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잘 했다. 이평리 갈벌이 고향인 그가 대전중학교에 진학한 건 멀리 유학을 떠난 셈이다. 그는 중학교에 잘 다니다가 2학년 때 큰 사고를 쳤다. 돈이 궁했던 시절 그는 아이스께끼를 팔아 용돈을 벌다가 학생과장에게 걸린 것이다. 그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다 걸리면 무조건 퇴학이었다. 만약 사고 치지 않고 대전고로 진학했다면 국회로 갔을 것이라며 웃어넘겼다.

어린 시절 그의 대범함이 이장 생활을 하는 데 원동력이 된 것일까. 18년 6개월. 군북면 추소리 마을에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키려고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다. 여기저기 발로 뛰며 오폐수관 짓고, 농로 포장하고, 세심원 앞에 다리를 놓기까지 박찬훈씨 손길이 안 닿은 데가 없다. 그러나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좌절된 일도 많았다. 마을 일에 온 힘을 쏟은 탓일까. 주민들로부터 원성도 자주 들었다. 1998년도부터 2016년까지 쉼 없이 달려오던 이장생활을 비로소 청산했지만 그때를 돌아보면 ‘한이 맺혔다’고 그는 표현했다.

빚도 떠안게 되면서 회한 섞인 삶을 살았던 그에게 하늘에서 선물을 준 것일까. 18년 8월 17일, 그는 날짜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홍익대, 충남대, 연세대, 목원대 등 전국 각지에서 온 대학교수들이 부소담악을 그려보기 위해 박씨에게 배를 몰아달라고 전화가 온 것이다. 오전 10시부터 1시간 정도 계획하고 배를 몰던 그는 시간이 조금씩 지체되자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한창 날이 더웠던 8월이라 뙤약볕 아래 교수들이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지루해졌다. 그때 목원대 박석신 교수가 그에게 부소담악을 같이 그려보자고 종이 석 장을 건넸다. 오늘날 박찬훈씨가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다. 미의 미자도 모르고 그림을 제대로 접해본 적 없는 박씨는 대학 교수들이 스케치하는 동안 쓱싹쓱싹 그림을 완성했다. 박석신 교수는 ‘소질이 있는데 지금까지 이걸 안 하셨냐?’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고. 딱 보자마자 그림 소질을 알아낸 박 교수는 그해 12월에 있을 전시회를 준비해보라고 권했다.

■ 현지에 산 사람을 따라잡을 화가는 없다

박찬훈씨는 대전에 있는 박 교수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지도를 받았다. 채색을 넣지 않는 점묘화부터 시작했는데 붓을 찍을 때마다 느낌이 좋았다고. 스승은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그려라’ ‘잘 그렸다, 못 그렸다’ 일절 말하지 않았다. 알아서 터득할 수 있게 배려해줬다. 그저 재밌게 그린 게 잘 그린 그림이라는 신념으로 박씨는 그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아버지 산소가 있는 이평리도 그려보고, 겨울에 눈 맞은 둥그나무도 그렸다. 그림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혼자 배를 타고 나가 부소담악 전체를 채색을 넣어 그려보기도 했다. 박 교수는 박찬훈씨의 그림들을 동료 교수들에게 소개했다. 그림의 명암도 알지 못하고, 미술 이론에 관해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 그림 솜씨가 대단하다며 그를 치켜세워줬다.

지난달 13일 박씨는 대전시 중구에 있는 박석신 교수의 갤러리 ‘꼬씨꼬씨’에서 대청호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매봉산, 성인봉, 양지봉, 둔주봉 등 옥천 지역에 내로라하는 아름다운 광경은 그의 손을 거쳐 한 편의 걸작으로 전시됐다. 박석신 교수 스승인 이인영 교수는 그에게 ‘추수할 추, 바위 암’ 추암이라는 호를 선물해줬다. 추암 박찬훈. 박씨가 그린 부소담악을 본 이인영 교수는 대학 교수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기도 했다.

‘현지에 살고 현지에서 보고 느끼는 바를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화가라도 67년 삶이 녹아있는 그를 따라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지금은 수몰돼서 사라졌지만 이평리 갈벌마을이 고향인 그에게 옥천은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머릿속으로 이평리 마을에 살았던 집들을 떠올려 그림까지 남겨놓을 정도로 옥천 지역에 애착이 크다.

그는 78년도 잠시 옥천을 떠나 대전 유천동에 살았을 때 온돌기능사협회 사무국장을 6년간 맡으며 보일러 자격증 문제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오게 된 계기는 아내가 시댁 부모님들을 모시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고. 원래 대전 효동사거리 쪽으로 이사하려고 3억8천만원 계약금을 이미 결제했지만 그 돈을 뿌리치고 다시 고향으로 와서 지금까지 34년째 옥천에 눌러앉게 됐다.

이젠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옥천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았으니 조금은 쉬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운명처럼 그림을 접하면서 그의 노년은 한층 더 풍부해졌다. 이번에 나온 코로나 지원금도 전액 기부할 만큼 마음 씀씀이도 넓어졌다. 대전MBC, CJB 청주 방송국에서 찾아와서 그의 그림을 알아봐주는 사람들도 생겼으니 그의 앞날도 아름다운 추소리 풍경만큼 평화롭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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