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마다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근간은 ‘덕’이었다
시절마다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근간은 ‘덕’이었다
  • 옥천닷컴
  • 승인 2020.07.02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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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평리 오복수 1945년
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53)

‘오복수 성덕순’ 사이좋은 문패, 그 집의 파란대문은 활짝 열어 젖혀 있었다. 반가움은 잠시 거실 문이 열리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는데.” 선생님의 첫 마디였다.

기자의 어깨에 카메라를 짊어진 거창한 인터뷰를 생각하셨나보다. 질문지가 오고가며 궁리를 하는 인터뷰가 아니다. 그저 기억에서 파편처럼 떠올려지는 크고 작은 일들이 다 우리의 역사다. 거실 한 면이 손주들 사진으로 빼곡하다. 녀석들은 돌배기 때 앙증맞은 모습 그대로지만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그렇게 20년간 선생님의 아침을 흐뭇하게 열어준 손주들이다. 손주들 사진에 싱글벙글하는 영락없는 할아버지지만 70대 청년인 오복수 선생님. 덕장의 풍모 덕분인지 집안 곳곳 선생님의 향기가 배어있었다.

■ 나는 청산 터줏대감 

1945년생인 나의 까무룩한 첫 기억은 6.25다. 어렴풋이 피난길에 겁먹은 여섯 살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 손을 놓칠세라 잰걸음으로 발길을 옮기며 포화 속에서 살아남았다. 청산면 명티리에서 경상도 경계인 예곡리까지 피난을 갔다. 여름에 시작된 피난길은 무더위와 싸워야했고 겨울날의 피난길은 까치랑 밥을 나누어야 했다. 배를 채우려고,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가느다란 줄기에 달랑거리는 감도 따서 끼니를 대신했다. 밤이 되면 폭격소리에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공포를 안고 다리 밑으로 모여들었다. 불이 다 꺼진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공포에 질린 눈망울만 서로 주고받으며 피난길위에서 목숨을 건져냈다. 전쟁 중에는 그저 살아남는 게 양반이다. 

나는 예곡국민학교를 다녔다. 청산국민학교의 분교였다. 지금은 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진 시골, 그 동네의 학교들이 교적비만 남긴 채 폐교의 수순을 밟고 있지만 그 당시 청산국민학교는 예곡 청동 신매 대성리등 네 군데의 분교를 거느린 큰 모교였다. 청산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청산의 인구가 14,000명가량 되었다. 60년 전의 청산은 장이서는 날에는 遠近各處(원근각처)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곳이다. 세월 속에 그 영화는 사라지고 생선국수의 명소로 아직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명티리에는 월명광산이 있었다. 아버님은 광산 하청 사업을 하고 계셨는데 광산 굴 하나를 맡아서 탄을 캐내고 수익을 배분했다. 아버님은 광산에서 일하시다가 하청 사업으로 전환한 분이셨다. 광산 하던 오씨네,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동네에서 유지소리 듣던 집이었다. 

나는 예곡국민학교에 다녔는데 청산중학교는 10리를 매일 걷는 등굣길이 너무 멀어서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광산사고로 1년 반 동안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셨다. 가장의 추락은 집안을 위기로 몰아간다. 형과 나는 탄 찌꺼기를 주워서 학비에 보태기도 했다. 탄가루는 상품으로 나가고 덩어리는 난방용 구공탄 만들 때 쓰였는데 화력이 좋았다. 광산 하던 집 아들이었지만 얼굴에 새카만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씁쓸하게 하얀 이만 드러내는 한 때를 보냈다. 

아버지의 광산사고로 일단 대학진학부터 포기하게 되면서 인생이 뜻대로 안된다는 것을 알았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절망의 고배도 마셔보았다.   

학창시절 뜀박질을 잘하던 나는 청산에서 육상 1등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청주까지 나가보면 경쟁자들 속에서 만년 2등에 머물렀다. 육상 실력은 군대생활과 동떨어지지 않아 공수 특전단으로 복무했다. 공수 특전단 훈련은 1년 반 동안 밥만 먹으면 무술, 뒤돌아서면 사격훈련 이었다. ‘사나이’로 중무장되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 키 작은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청산 성당이 나를 붙들었다.

제대하고 바로 인천 제일제당에 취직을 했다. 바다를 매립해서 지은 엄청난 규모의 회사. 그 수만 평의 광활한 땅에 시골 촌놈인 내가 운신할 미래는 단 한 평도 없었다. 1,200명 직원 중 정식직원 260명, 나머지는 20년이 지나도 별수 없는 임시직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곳은 내가 머무를 곳이 아니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와 진로를 선회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제일모직, 회사는 거대한 공룡이었지만 임시직에게 비전은 없었다. 타사로 이직을 결정한 후에 고향에서 연락이 왔다.

성당에 교적정리가 제대로 안됐다고 신부님이 요청을 했다. 우리 가족은 다들 신자들이었다. 멀리 나와 있는 나에게까지 굳이 연락을 했어야만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라는 생각에 가벼이 옥천 행 기차에 올랐다. 3개월 동안 교적정리를하고 다시 올라가겠다는 계획으로 청산에 내려왔지만 나는 그만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바다를 매립한 수만 평의 제일제당은 나를 보듬지 못했지만 6천 평 키 작은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청산 성당이 결국 나를 붙들었다. 할 수 없이 눌러앉았지만 그것이 진짜 내 자리가 되었다. 직장 군대 마치고 10년 만에 청산으로 돌아왔다. 

1971년도 30대 초반, 아내와 큰 아이를 데리고 고향에 정착하게 되었다. 24살 때 동갑내기 아내 성덕순( 카타리나)과 결혼하고 타향살이 10년 만에 고향의 품에 안겼다. 고향은 역시나 잠시 등 돌렸던 나를 두 팔 벌려 안아주었다. 

3개월이면 정리될 것으로 짐작한 교적정리는 하 세월이었다. 1,500명 신자의 교적정리가 15년 동안 잠자고 있었다. 얼마나 일이 많은지 평생을 걸어도 다 못 끝낼 것 같았다. 교적 정리는 출생신고처럼 신자들의 주소 이름 영세 견진 혼배성사 등을 기록으로 남긴다. 수기작성으로 3개월간 매일 했는데 끝을 모를 일이 되었다. 신부님이 

“가지 말고 나랑 있자”

한국말을 잘하셨던 미국 신부님의 간청도 있었지만 고향이 끄는 힘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5년 정도 사무장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아름다운 성당이 내 청춘의 빗장을 여러 젖힌 포문 이었다.

■ 신협의 산증인

그 연장선으로 신협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성당의 신자들과 작은 손 보태며 시작한 ‘청산신협’을 내 손으로 전국 최우수 신협으로 만들었다. 처음 280만원 출자금에서 320억 까지 28년 동안 신협의 역사를 만들었다. 성당의 신자들도 구호물자를 얻으려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던 밀가루 신자들이 5할은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돈 나올 주머니 없는 사람들을 모아 소꿉장난처럼 시작한 신협이 내 손을 거치며 단단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신협이 되었다.  

1976년 책상 하나에 여직원 하나로 시작했다. IMF를 겪으며 금융권에 휘몰아친 쓰나미도 고스란히 맞아보았고 그래도 살아남았다. 지금 신협 건물도 내가 산증인이다. 시골 사람들의 쌈지 돈이 모이는 곳이다. 피땀 흘린 돈들, 함부로 가벼이 다룰 수 없었다. 한창 달러이자를 받는 돈놀이가 성행하던 때 시골 사람들이 살 길이 막막해 그 비싼 이자를 토해내며 하루하루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서민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일수 돈을 쓰며 제살 깎아먹는 고리에 숨이 헉헉거렸을 때 신협에서 저리로 융통을 해주면서 숨구멍을 뚫어주었다. 

신협이 발족될 즈음 금융사기 피해가 청산을 휩쓸고 가서 신협도 의심의 눈길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정직하게 일하게 된 동력이 되었다. 지금은 나이 들어 넉살도 늘었지만 젊을 땐 숫기가 없어서 예금권유도 쑥스러워 그 업무는 내가 일하면서 넘어야 할 산의 중턱이 되었다.

28년 동안 수익 올리고 딱 한번을 제외하고는 배당금을 놓치지 않고 챙겨주었다. IMF 터지고 대우채에 넣었다가 깨지는 바람에 어쩔도리가 없었다. 

일을 대하는 자세나 삶을 대하는 자세가 크게 다르지 않아 ‘적 없이 살자’가 관계의 바탕이 되었다. 살다보면 가치관에 흠집이 나기도 하고 설명할 수 없는 오해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한다. 대출 해달라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처신을 잘못하면 구설수에 오르고 신협에 대한 평판도 안 좋아질 수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밥 먹자” 하면 무조건 거절했다. 그 과정이 야멸차게 보였을 수도 있지만 책임감, 도의적인 양심이 모두 필요한 때였다. 

초창기에는 돈이 모자라서 청주 중앙회나 도 연합회에 가서 돈을 가져와야 했다. 지금은 손가락 하나로 수천만 원을 들었다 놨다 하지만 그때는 계좌 간 송금이 안 되어서 현찰을 직접 가져왔다. 버스타고 운전수 바로 뒷자리에 현금 박스를 밟고 앉아서 가슴 졸이며 청산까지 왔다. 오가는 길 누군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인정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업무는 철저했다. 오죽하면 어떤 직원이 “숨 쉴 틈이 없다”고. 그 덕분에 대과없이 30대 초반부터 62세 정년까지 무탈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이사장 선거 두 번 하는 동안 건강도 잃어보고 성취감도 맛보며 번민의 계단도 오르내렸다. 이사장 재임 시 4년간 평생 마실 술을 다 마시고 집집마다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알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이사장 선거를 치루는 과정은 살얼음판을 매일 걷는 형국이다. 오죽하면 아내가 “여보 그만해요” 라고 할 정도였다.

두 번째 선거 때 허상은 아니었지만 계단을 오르는 과정 속에서 가슴이든 몸의 한축이든 기울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균형을 잃는다는 건 건강을 해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암 투병을 하고 현역을 정리하면서 허탈감도 맛보고 단단한 결실 속에서 자부심도 충만했다.

세상의 이 모양 저 모양을 두루 다 보고 맞이한 나이 듦이 나쁘지 않다. 이제 사는 이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눈이 좋아져 안경을 벗는 것처럼 오히려 시원하다.

신협 이사장 두 번 하고 라이온스, 주민자치 위원장, 노인 경찰 등 은퇴 후에도 사회 활동의 막을 내리지는 않았다. 젊은 시절의 경험이 고향을 위해 쓰일 수 있다면 마다하지 않았다. 백구두에 반짝이는 무대복을 입고 색소폰 연주를 하는 멋쟁이라는 소리도 듣는다. 7년이 되었다. 노년의 큰 즐거움이다. 

4남매 중 신부, 수녀도 만들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어도 선용 재경 경용 미용이 그리고 8명의 손주가 고마운 결실이다. 명절이면 방마다 들어앉아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게 하더니 이제 손주들도 내 키를 다 넘어섰다. 아내와 걷는 호젓한 마을길이 이제 가장 친한 동무가 되었다. 수십 년을 밟고 다니며 아는 척 한번을 제대로 못한 마을 길, 빗자루를 들고 나가 슬쩍 한번 쓸어주고 말을 걸어봐야겠다. “어이 친구, 자네도 수고 많았어. 고맙네.”   

아버지께 보내는 딸의 편지

아빠, 애교 많던 막내딸 미용이에요. 아빠한테 사랑 많이 받았던 기억에 청산에서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울컥 쏟아 질 때도 있어요. 너무 행복해서요. 저 초등학교 때 아빠 숙직 날이면 숙제 거리 챙겨서 아빠 손잡고 소풍 가는 것처럼 숙직실 갔었지요. 그 때는 아빠가 내 차지라 연탄불에 라면 끓여서 둘이 호호 불면서 냄비뚜껑에 받쳐 먹었죠. 김치만 곁들여도 어쩌면 그렇게 맛있었을까요?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양말도 빨아서 줄에 널어주시고 연탄불에 고슬고슬 잘 말려서 아침에 따뜻하게 신겨주셨지요. 숙제 보따리 꺼내서 모르는 것도 알려주셨던 아빠. 아 지금 생각해보니 동화속의 한 장면 같은 그런 사랑을 제가 고스란히 받았네요. 아빠가 저 예뻐서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고 싶다고 하신 거 기억나요. 언니 오빠들 청주 나가서 공부할 때 아빠 엄마는 제 차지였어요. 

봄이면 다정한 아빠와 엄마 손 잡고 냉이 달래 뜯으러 셋이 다니던 그 따뜻한 날들, 생각만해도 눈이 부셔요. 그런 아빠가 암 투병하게 되셨을 때 하늘이 노래지고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은 건강해지셔서 너무 감사해요. 

색소폰도 하시고 손주들한테 하트 문자도 날릴 줄 아는 노년이 아름다운 아빠 엄마 모습이 감사해요. 곁에서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하지만 두 분이 오손 도손 계셔서 얼마나 안심인지 몰라요. 우리 아버지로, 신협 이사장님으로, 사회의 어른으로 너무 잘 살아오신 아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저희 4남매 아빠 엄마 자녀들이라 자랑스럽고 너무 행복해요. 오래오래 저희 곁에 계셔주세요.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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