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좌우명은 정진(正眞)- 외길로 걸어왔다

코로나가 모든 것을 바꾸게 하고 말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더니 다시 장기전으로 돌입할 모양이다. 나야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해서 별 불편이 없는데,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돌봄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 백운리는 이장 덕분에 동네 환경이 깨끗해서 아주 다행이네만... 곧 가가호호 화장실도 새 단장 해준다더군.

 

■ 부유한 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는 청산 장위리에서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농촌은 대부분 힘들었지만 부친은 논 한섬지기(20마지기)와 밭 3천 평으로 농사를 지었다. 부친이 25세에 나를 보셨다. 나는 청산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부친이 부역문제로 인민군에게 많이 시달리시는 걸 보고 나는 공포에 떨었다. 청주에서 하숙을 하면서 청주농고를 다녔는데 6ㆍ25 때문에 몇 달 휴교를 하였지만 전쟁 중에도 학교는 여전히 열렸다. 내가 농고를 선택한 이유는 교직보다 행정직으로 가려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충북대학교에 4: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해서 임업을 전공했다. 당시 등록금이 황소 2마리 값인 35만 환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청년들이 일할 곳도 없고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것을 뉴스에서 보면 안타깝다. 그때도 직업이 다양하지 않아서 대학을 졸업해도 교직에 근무하는 것이 당시에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나는 보은 농고에 선생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 보은 농고는 남녀공학으로 한 학년에 3반이 있었는데 가정과도 있었다. 내가 20세 때 영동 용산면에 사는 당고모 소개로 한 살 위인 박영순 처자와 혼인해서 신혼을 보은에서 차렸다. 허리신경통을 앓고 있어 늦은 나이인 25살에 입대해서 전방에 있는 259수송 자동차대대에 발령받았다. 아뿔사! 허리 신경통이 재발해서 국군병원에 입원했다가 6개월 만에 제대처리가 됐으니 군대를 간 것도 아니고 안 간 것도 아니어서 국가에 마음의 빚이 있다. 맏이라서 적은 교사 월급이지만 첫째 여동생 빼고는 나머지 동생 셋을 내가 대학등록금을 대주며 뒷바라지하였다. 내 아래 동생들 넷은 모두 대학교수가 되었다. 34살 아래인 막내 남동생은 현재 김천의대교수이다.
나는 보은농고를 시작으로 동이중학교 교장, 장학사 3년 하고 영동농고 교장으로 가서 청산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63세에 은퇴하였다. 각 학교에 공로가 있어서 나는 국가유공자로 선정이 되어서 연금으로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 시골 사람이었지만 내가 저어온 배는 비교적 순항을 했다.

 

■ 부친에 대한 기억
부친은 무슨 이야기를 들으면 절대 잊은 적이 없기로 유명하셨다. 조부에게 한문을 어깨너머 배워서 유식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삼국시대부터 해방 이전까지 국사에 훤하셨다.  부친이 매년 1,500평 이상 담배 농사로 학비대시느라 허리가 휠 정도로 힘드셨지만 자식 넷을 박사로 만드셨다. 57세에 상처하고 3년 후 재혼하셔서 막내동생을 보았다. 

 

■ 나 역시 옛날 아버지
난 아버지의 정이나 표현을 몰랐다. 조진사 고가에 5년 사는 동안 집을 지어서 아이들을 키웠고 다 여워서 지금은 나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살아 보니 언제 행복하였는지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다. 그저 교사로서 생활인으로 정직하게 살아온 것 뿐이다. 책 읽는 재미 이외에 바둑 조금 놓는데 급수로 따지면 아마4급 정도 될 것이다. 아내가 50대에 암이 걸렸는데 투병생활 10년 끝에 작별하여 장위리 선산에 묻었다. 나는 남사스러워 재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작년에 영동 나갔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는데 차가 와서 들이박았다. 오른쪽 다리 4군데가 부러져서 3개월간 영동병원에 입원했는데 딸들이 돌아가면서 방문했다. 고맙고도 미안했다. 지금은 재활치료로 울안이 200평이라 많이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인생은 그렇게 부족한 듯 하지만 어느 틈에 채워지는 묘수가 있다. 


 
■ 지전리 다방들은 내 오피스 이라네 
생선국수가게가 늘어선 지전리에 다방이 여나믄 곳이 있다. 친구가 보고 싶을 때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친구를 부르느니 친구들과 다방에서 만나면 기분이 업 되어서 더 좋지. 때로는 친구들이 나를 불러내면 택시 호출해서 다방으로 가서 만난다. 20년 가까이 된 폭포다방, 로얄다방, 별다방, 시장다방. 맥심다방, 호수다방, 대전다방, 사랑방다방, 시장다방, 행운다방, 이름도 정감있는 다방들을 돌아가면서 이용하지. 단골 다방은 없고 한 잔씩 골고루 팔아주고 싶은 내 마음이라 잠깐 바깥바람 쐬는 핑계지. 예전에는 다방이 약 30여 곳이 있었는데 한때 불미스러운 오명을 쓰기도 했지만 그건 남의 이야기이다. 친구라고 해서 만나는 이들이 30명 정도인데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는 장소로 다방을 이용한다. 그저 친구들 만나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어서 내 오피스 라고나 할까! 다방 마담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로 운영이 어려워도 없어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주니 고맙기도 하다. 
늘 같은 일상의 모습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는 다방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너무도 익숙해서 편안함이 느껴진다네. 날씨가 궂은 날엔 나도 친구를 불러내서 따끈한 쌍화차 한잔 마시거나, 다른 친구와 점심식사를 하고 들렀을 때는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  둘둘커피를 마시면 더부룩한 속이 쑤욱 내려가는 느낌이지. 삐걱거리는 계단을 지나면 지나치게 정열적으로 보이는 빨간색 벨벳의자는 손님들에게 편안함을 주느라 닳아빠진 것이 마치 내 모습 같아서 애처로울 때도 있지. 어떤 다방은 벌이가 신통치 않은지 주황색 가죽 의자는 죄다 살이 터져 실금이 가득하고 가운데는 푹 꺼져서 앉을 때 조심해야 하지. 그렇다해도 나에게 다방은 여전히 웅크린 몸과 마음을 활짝 펼치도록 하는 온기가 가득한 곳이다. 

 

■ 보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손주들이나 보고 싶지. 장수가 희망이지만 희망대로 될까? 흐음, 불교가 내 종교라면 종교인데, 나는 학생들에게도 그랬고 급훈도 항상 ‘양심있게 살아라’였소. 내 자신에게도 다짐을 하였지만 “누구처럼 살아라가 아니라 내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이 근본이라고 믿고 있소. 청산국교 동문회 처음 할 때 58명이었는데 30년 하다 보니 지금은 16명 정도 모인다오. 순서는 없지만, 첫 마음처럼 정직하게 살면서 인생 깔끔하게 마무리할 것이오.

작가 이연자
작가 이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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