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전선이 위태롭자 17~18세의 고교생들 까지도 나라를 지켜야 겠다는 호국정신은 누가 먼저라고 하기에 앞서 스스로 책을 뒤로하고 총을 들고 전선으로 뛰어들게 하였다. 

군복 대신 교복을 입은채 싸운 나어린 학도병들의 애국정신은 포항여중전투 승리로 지금도 모두에게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재일학도호국병 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생소하게 들리고, 아마도 이런 것이 있었는가를 아시는 분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태생적인 것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는 피끓는 학생들과 열혈청년들이 본능적으로 반응함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6.25가 발발하자 조국을 수호해야 된다는 충정어린 마음은 너도나도 약속이나 한듯이 민단계(在日本居留民團의 약칭) 학생들이 GHQ(General HeadQuarters=극동사령부:일명 맥아더 사령부)로 몰려가 모국의 전선으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신문과 라디오로 보도되는 조국은 백척간두의 위중에 처해있어 재입국허가를 받을 여유가 없는 긴박한 상황하에 1주간의 기본훈련인 엠원(M1),카빈의 PRI(Preliminary Rifle Instruction=사격술예비훈련)훈련만 집단적으로 받은게 전부였다. 훈련을 마친 후 일단 귀가하여 부모형제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각자 연고지와 가까운 三沢(Misawa=아오모리현에 있는 미공군기지),立川(Tacikawa=도쿄 근교에 있는 미공군기지),横田(Yokota=도쿄 근교에 있는 미공군기지),横須賀(Yokosuka=요코하마 근처에 있는 미해군기지),岩国(Iwakuni=야마구치 현에 있는 미공군기지),板付(Itatsuke=옛 미공군기지.현 후쿠오카 공항),佐世保(Sasebo=나가사키 현에 있는 미해군기지),嘉手納(Katena=오키나와 현에 있는 미공군기지)의 미군기지로 배속 되었다.

미군 역시 거의가 대학생들인 이 고급인력은 그야말로 호박이 덩쿨째 굴러온 셈이므로 대환영 하여 모든 편의 제공을 서슴지않고 일사불란하게 처리해 주었다. 

東京(도쿄)大를 비롯하여 早稲田(와제다),慶應(게이오),京都(교토),明治(메이지),九州(큐슈)大가 주축이 된 최고의 명문대학 엘리트 집단 이었다.

영어회화 발음은 시원치 않아도 의사소통에는 그다지 불편이 없는 데다 영문 문서 작성과 영문독해력은 미군 하사관들 보다는 월등히 좋았다.

그 당시 북한에 대한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지도는 전무한 상태에서 일본인들이 작성한 지도로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미군들에게는 보물과 같은 귀한존재 였다.

그들은 미육.해.공군에 편입되어 642명의 학도병이 모국어인 한국어도 모른채 현해탄을 건넜다.

그들은 최전선에서 직접 총을 들고 전투를 한 학생들은 극히 일부였고 독도법을 아는 그들은 미군의 통신병들과 함께 주로 정보작전에서 일했다.

일본 총독부와 군부가 작성한 한국지도는 미군들에게는 사실상 검은 것은 글자이고 흰 것은 종이에 지나지 않은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까막눈들에 지나지 않았었다.

1945년 주둔하여 미군정시에 자기들이 작성한 엉성한 지도로는 오폭과 오인 사격을 자초한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러나 재일학도병들이 투입된 이후 부터는 미군 전폭기, 전함들의 오폭이 현히 줄어들었고, 공중과 해상전에 이어 지상전에서도 오폭과 오인사격이 거의 사라져 미8군은 전략물자를 절약하면서 안심하고 작전에 임할 수 있었다. 

북한은 광산이 많아 재일학도병과 미군 사이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자주 생겨 작전에도 영향을 미첬고 휴전시까지 꼬리표가 달린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겁 많은 미군들은 전진에 앞서 시도때도 없이 근처에 마인(mine=광산, 또는 지뢰라는 뜻)이 있느냐고  학도병들에게 묻곤하여 지도를 펼처 보이며 여기는 mine(광산)이 없다고 했는데 전진하자마자 지뢰가 터져 사상자가 발생하여 학도병들을 당혹케 했다.

학도병들은 mine이면 덮어놓고 광산으로만 알고 있었으므로 끔짝한 사고가 연발하게 난 것이다.

이런 불상사는 워커(Walker) 중장이 이끄는 서부전선 뿐만 아니라, 알몬드(Almond) 소장이 지휘하는 동부전선에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하여 학도병들과 미군 사이에 가끔 미묘한 갈등을 야기시켰다.

그들은 총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극한 상황에서 학도병들끼리는 당황하고 급한 나머지 자기들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익숙한 일본어가 튀어나와 일어로 무전통화를 하곤 했다.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하여 이를 도청한 북한과 중공이 일본군이 개입했다고 생떼를 부려 UN에까지 비화되는 일화도 남겼다.

이 재일학도병 중 148명은 전사 혹은 행방불명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따라 운 좋게 살아남은 학도병들은 제대는 되었지만,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는 가련한 국제유랑민이 되어 버렸다. 

재일학도호국병들은 일가친척 없는 한국사회에 내팽겨져 물정 서투른 한국땅에서 말도 모른채 전쟁보다 더 힘겹고 암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일본정부는 사전허가 없이 출국했다고 재일학도병들의 재입국을 거부했다. 

가족들의 끈질긴 탄원과 미군의 협조로 일본정부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휴전 후 10여년이 지나서야 268명의 일본 귀환이 이루어 졌고, 본국 잔류 희망자는 226명이었다.

국가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과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희생당한 사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정부가 국민에게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고, 국가가 존재하는 최소한의 근거이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한 노력의 출발점임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재일학도호국병은 인천, 원산 상륙작전과 장진호전투, 흥남철수, 1.4후퇴, 백마고지전투등 각 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맥아더(Mac Arthur) 원수는 휴전 후 재일학도병들의 기여는 미8군의 신경과 같은 존재로 어느 전투병들과 바꿀 수 없는 귀중한 핵심전력 이었다고 극찬했다. 

재일학도병은 후일 미8군의 카투사(Katusa)병의 모태가 되는 모델이 되었다.

재일학도병 위령비는 민단의 후원금으로 1976년에 서울국립묘지 제11묘역에 세워졌으며, 참전기념비는 재일학도병 동지회가 산화한 동료 전우들의 넋을 위로함과 동시에 그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동지회가 모금한 기금으로 그들이 상륙했던 월미도에 가까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수봉안길 84에 1979년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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