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의 모든 동, 식물은 서로 간에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주고받으며 생태환경을 조성하고 이끌어 간다. 특히 동, 식물 세계에서 동종, 이종 간에 공존, 공생의 공영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일종의 신비로움마저 느끼게 된다. 개미와 진딧물, 조개와 속살이게, 말미잘과 흰동가리, 까치상어와 빨판상어 등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법칙은 더욱 오묘하다. 악어새가 악어 잇속의 기생충과 찌꺼기를 제공하는 대신 악어새는 안전을 보호받으며 먹잇감을 확보한다. 그러면서도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이해득실을 따지려 들거나 비교 우위를 주장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저들의 공존공영을 가능케 하는 철저한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물의 세계에서도 가끔씩 돌연변이 형태의 별종은 나타나기 마련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박쥐라고 하는 요상한 짐승이다.

조선중기(숙종4년) 홍민종이 지은 순오지(旬五志)에 박쥐에 대한 우화(寓話)가 꽤 설득력이 있다. 새들끼리 모여 새들의 으뜸인 봉황을 축하하는 자리에 박쥐가 불참했다. 봉황이 박쥐를 불러다 ‘부하이면서 축하도 해주지 않고 거만하다’며 꾸짖었다. 박쥐는 오히려 ‘네 발 가진 짐승인데 새들 모임에 왜 가느냐!’고 도로 반박했다. 얼마 지나 이번엔 지상동물의 으뜸인 기린을 축수하는 잔치가 있었는데 온갖 짐승들이 다 모였어도 박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린이 박쥐를 불러다 ‘어찌 축하잔치에 안 올 수 있느냐’고 꾸짖었다. 박쥐가 이번에는 ‘새인데 왜 짐승들의 잔치에 갈 필요가 있느냐!’고 하면서 날개를 펼쳐보였다. 각 편에 따라, 이런 행동을 한 결과 박쥐는 날짐승과 길짐승 양쪽에서 미움을 받게 되어, 다시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두운 동굴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결말이 첨가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 유형은 이솝우화에도 실려 있는,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는 설화로 알려져 있다. 이 설화는 박쥐라는 동물의 생태에 관한 유래를 말하고 있으면서도, 책임감 없는 기회주의자들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있는 풍자적인 설화이다.

조선의 대학자 徐居正(서거정)은 ‘蝙蝠賦(편복부)’에서 박쥐를 이렇게 표현했다. ‘쥐 몸에 새 날개, 그 형상 기괴하다, 낮 아닌 밤에만 나다니니, 그 종적이 음침하고 창황하다’(身鼠而翼鳥兮 何形質之怪奇而難狀也 不晝而卽夜兮 何蹤跡之暗昧而惝恍也) 그러면서 홀로 조용히 살 수 있는 것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박쥐는 눈이 안 보이는 대신 귀가 엄청 밝아서 ‘밝쥐’라고 했다고 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도 박쥐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집의 지붕모퉁이에 둥지를 튼 박쥐는, 사람의 말까지 잘 알아들어서 ‘박쥐를 잡는다, 쫓아낸다.’ 등의 말을 하면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미리 피한다고 한다. 편복(蝙蝠), 비서(飛鼠), 천서(天鼠), 선서(仙鼠), 복익(伏翼) 등으로 불리는 박쥐는 혼자 사색하는 것을 좋아하고, 신선처럼 한자리에 있으면서 수도하는 일도 잘하며, 고급정보에 밝고, 임기응변에 능하지만, 나만 편하고 나만 잘났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외톨이가 되었다. 사람으로 치면 독불장군이라서 큰일을 못하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승진과 관계없이 사는 말단 직장인, 혹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만 즐기며 사는 사람이다.

우리사회에는 가끔씩 박쥐의 두마음을 가진 자들이 나타나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우리네 인간이 본래 그다지 합리적이지도 착하지도 않은 존재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길지도 짧지도 않게 딱 한번 주어지는 귀중한 인생인데 그렇게 함부로 살다 가서야 쓰겠는가. 모두가 힘들고 어려울 이때에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떼거리도 경계해야 하지만 박쥐의 두 마음의 해악 또한 그에 못지않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아무리 좋은 재질을 타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멀리하면 큰일을 못하고 곤궁하게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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