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 꿈꿀터, 옥천의 단절이 아닌 ‘확장’
지난 2월말 안내중 교사로 퇴직하고, 청주 남이면 고향으로 이전 준비
‘이십년 전의 약속’ 책은 2쇄 발간, ‘30년 옥천의 삶 잊을 수 없어’

 

떠난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축적해 놓은 관계와 비축 해놓은 경험치들이 일상의 편안함으로 자리하였기에 무언가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그렇다. 낯선 환경과 새로운 도전은 늘 스트레스를 동반하기 때문에 건강에 해롭기도 할 터였다. ‘쓸모’와 ‘쓰임’이 다했다고 자기객관화하여 판단하고 바로 실천에 옮기려 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두번째 책 발문에서 쓴 ‘호기심’과 ‘모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고 ‘재미’가 없으면 ‘에너지’가 쉬이 떨어지는 소년감성을 이토록 보존하고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조만희, 그의 이름은 30여 년 옥천 교육 문화사에 적지 않은 자취를 남긴 이름이다. 옥천 토박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구석구석 샅샅이 발걸음 하면서 옥천의 오지, 명소를 기록하여 책으로 냈고, 군내 모든 중학교 근무를 자처하면서 학생들을 품어냈다. 전교조 활동과 민예총 활동, 옥천문학회 활동에 그의 이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늘 어려울 때 앞장 섰고 역할을 수행했다. 학교 안에서만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품 넓게 너른 지역으로 과감한 행보를 했다. 
그렇다고 학교를 등한시 한 것도 아니었다. 특유의 감성으로 세대를 뛰어넘어 아이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동이면 현동의 허름한 빈집을 직접 손을 보고 다듬어서 옥천의 소쇄원이라 부를만큼 예쁜 정원과 살뜰한 옛날 집으로 꾸며놓았다. 부임하는 중학교마다 제자들을 초대해 삼겹살 구이를 해 먹는 것이 통과의례처럼 진행했다. 
그야말로 옛날 집에서 스승과 제자가 격의없이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삼겹살을 구워먹는 시간이란 생각만 해도 모든 갈등으 사르르 녹아들 것 같다. 
옛날 청원군 남이면 출신이지만, 토박이 옥천 사람보다 더 옥천에 천착했고 옥천 주민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전방위적으로 교육, 문화, 역사, 언론까지 그의 광폭적인 행보는 옥천 운동사에 부문별로 고스란히 녹아 있다. 
2000년대 초반 안티조선의 기치를 내걸며 언론개혁운동의 선봉에 섰고 그는 군북면 비야리 출신인 청암 송건호 선생이 옥천의 인물이라는 것을 제일 먼저 지면에 알리며 공론화를 했다. 그런 인연으로 그가 지금 청암송건호기념사업회 대표를 맡고 있는 지도 몰랐다. 
옥천사람들의 풀뿌리 언론개혁운동인 안티조선 물총독립군을 영화로 담아낸 황철민 감독이 옥천 전투에도 출연했고, 그 인연으로 2013년 황 감독의 장편 영화 ‘죽지 않아’에는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지난 3월에는 그의 집이 SBS 불타는 청춘 촬영 녹화 현장이 되면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그보다 도 그가 방송과 기타 언론에서 주목받았던 것은 20년 전 제자들과 만난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다. 청산중학교 제자들을 20년 후에 모교 교실에서 만났던 그 광경 자체가 방송을 탔다. 학교 안과 밖의 균형감을 유지하면서 살았던 삶이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제 옥천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2020년 2월말 안내중학교에서 소리소문없이 정년퇴직을 하고 정든 옥천 땅과 조금씩 이별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신 옛 청원 남이면에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수구초심이라고 오랫동안 떨어져 나온 고향에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고 했다. 고향 땅 언저리 산 놀이터를 마련하고 남은 인생 또 재미나게 살아보려 한다고 말했다. 재미가 없으면 진도가 안 나가는 그의 삶을 알기에, 여전히 호기심이 많고 사람 좋아하는 그를 알기에, 그가 가는 고향은 단절이 아니라 옥천의 확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퇴직이후 좀처럼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그를 만났다.

 

■ 이십년전의 약속, 그리고 아버지
‘이십년 전의 약속’은 2쇄를 찍었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2쇄를 찍을 때는 여러가지 내용을 보충했다. 그 가운데 선비같이 꼿꼿한 삶을 살았다는 아버지의 손글씨 독후감이 눈에 띈다. 흐트러짐 없는 글씨체와 담백한 문구와 글에 담긴 혜안을 보고 있자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는 사실 그의 삶에 대한 헌시와 같다. 아버지는 이렇게 썼다. ‘어렸을 떄부터 느림보라고 구박하고 몰아세웠던 일로 가슴 한쪽이 시리어 온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힘들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병역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늦깎기로 대학생활 끝내고 발령을 받기까지 4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항상 남들 한발짝 뒤에 쳐져 허덕이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그는 ‘(제자들과의)20년 전의 약속이 단순한 한 사람의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20년 아니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썼다. 아버지는 그에게 늘 큰 가르침을 주셨구나 짐작하는 문구도 이어진다. ‘참교사라 하는 것은 가르치는 대상마다 방법이 다르고, 가는 곳이 같지 않지만 끝내 도달하는 지점은 한 곳이 되게 하는 것이 훌륭한 스승이다. 제자를 자기와 비슷한 짝퉁으로 만드는 스승은 가짜다. 저마다의 개성에 따라 다양한 빛깔을 만들어 제 목소리 제 때깔을 갖게 만드는 것이 진짜 스승이다’ 이런 가르침을 계속 주셨기 때문에 그가 올곧은 스승으로 온전하게 퇴직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미뤄 짐작한다. 

 

■ 옛 청원군 남이면 상발리가 고향
옛 청원군 남이면 상발리가 고향이다. 지금은 폐교가 된 구암초등학교를 나오고 청주 대성중, 청석고(1회)를 졸업했다. 대학은 군대를 다녀온 후 26살에 충북대 지리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졸업하고 임용고시에 합격했지만, 바로 발령이 나지 않아 4년 동안 대기를 했다. 그 때의 이야기는 책에 고스란히 나온다. ‘1987년 여름날 나는 거리의 장사꾼이었다. 국립 사대를 졸업했건만 기약없는 발령 적체로 인해 교직의 꿈은 커녕 당장의 호구지책이 시급한 시설이었다. 나의 호구지책은 세일즈맨이었다. 전집류 책과 종합 음반세트, 기타 학습지나 영어 테이프 따위를 가가호호 방문판매하면서 근근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는 세일즈맨을 하면서 중학교 친구 나용환을 만나고 그의 손에 이끌려 전교조를 만나게 됐다. 그 때의 일도 책에 소상히 나와 있다. ‘낡은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결기 가득한 그들 선생님 앞에 서는 순간 나는 그만 전깃불에 감전되듯 꼼짝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교사가 되기도 전에 전교조의 전신인 충북교사협의회 창립멤버로 참여하게 되었다’

 

■ 평생 중학교 일반교사로 아이들과 살갑게 지내
그는 입시 교육이 싫어 일부러 중학교만 돌았다. 아이들의 삶뿐만 아니라 본인의 삶도 존중하고 싶었다. 입시교육에 찌든 고등학교 교사를 사절하고 싶었다. 그의 발문을 보자. ‘30여 년의 교직생활에서 중학교 근무만을 고집했던 것은 퇴근 후의 삶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내 자유로운 영혼은 직장에 오래도록 묶여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삶의 이런 여유 속에서 학교가 지역사회 섬이 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지역활동을 하며 가교 역할을 했다. 전교조는 학내 민주화와 인권 교육의 자양분이 되었고 옥천민예총은 지역 문화 부흥에 획을 긋는 역할을 했다. 차없는 거리 축제나 청마장승깎기, 동학농민혁명 청산면 한곡리 추모제 등은 지역 문화사에 어떤 족적을 남기었다. 옥천문학회 활동은 정지용 시인의 세례를 받은 지역 문인들의 글을 연마하는 중요한 공간이 되었으며 ‘조선일보 바로보기 운동’은 풀뿌리 언론개역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다채로운 활동의 기저에는 그가 프롤로그에 제목으로 쓴 ‘호기심을 따라 걷다’가 주효했다. 그는 ‘호기심과 모험은 내 삶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사는 동안 호기심은 더욱 증폭되었고 모험은 진화했다. 세상사 궁금한 게 많다보니 이것저것 참견하는 일도 많아져서 꽤나 오지랖 넓은 인생이 되고 말았다’고 썼다.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나섰다. 학교 안의 틀도, 교사라는 얼개도 그를 가둬놓지 못했다. 전후방 가릴 것 없이 그는 곳곳에서 활약하며 지역과 교감했다. 

 

■ 옥천 대표적인 명기행산문집, ‘풍경과 산책’도 펴내
그는 가장 보람있었던 일로 고향도 아닌 옥천 산하 마을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쓴 기행문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그의 첫책이기도 한 풍경과 산책은 아직도 옥천의 속살을 내밀하게 기록한 명 산문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책으로 엮기 전에 옥천신문에 연재하면서 주민들과 그가 거닐었던 시공간을 공유했다. ‘풍경과 산책’이라는 이 산문집의 책에 대해 동료교사이자 동시대 활동가였던 김성장 선생은 이렇게 평한다. ‘그는 옥천을 사랑한다. 아니 그는 옥천을 즐긴다. 옥천의 사람들, 옥천의 산과 나무와 청설모, 머나먼 풍경, 들에 널린 곡식과 풀, 며느리 밑씻개와 애기똥풀과 제비꽃과 강아지풀, 마을과 마을의 집과 기둥과 부엌의 음식냄새, 갈마골 답양리 올목 추소리의 산, 금천리 계곡 그 냇물과 냇물에 사는 물고리를 사랑하였다. 그는 돌아다니고 올라가고 내려가고 멈추어 바라보고 긴 숨을 몰아쉬며 옥천의 구석구석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었다. 옥천에 사는 사람이 직접 발로 뛰며 자연과 사람들의 풍광을 이런 방식으로 정리해 낸 전례가 없었다.’
다닌만큼 애정이 샘솟았고 만나는 만큼 신뢰 관계가 쌓여 갔다. 그는 그렇게 영락없는 옥천 사람이 되었다.

 

■ ‘지역의 모든 학생과 주민들이 내 스승이었다’
“옥천 문학회에서도 최장기 회장을 했지요. 지용제 때 여러 역할도 했었고 지역 문인과 시인을 꿈꾸는 청소년들과 가교 구실을 했었지요. 오지랖넓게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재미있게 활동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아버지가 이야기하셨던 것처럼 늘 늦깎이였죠. 그래도 주눅들지 않고 천천히 제 갈길을 갔어요. 안정된 직장이 있었기에 여러가지 일을 도모할 수 있었고 저에게는 아이들과 지역 주민들이 스승이었지요. 수평적으로 많은 것을 배웠고 깨달았습니다. 책에는 미처 쓰지 못했지만, 현동 마을 어르신들을 모셔놓고 2년 남짓 마을회관에서 한글학당을 운영하던 기억도 잊지 못할 기억이죠.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어찌나 눈이 초롱초롱 하시던지. 수업시간에 딴 생각하고 흐리멍텅하게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보면 제가 그랬지요. 야! 이 녀석들아 할머니들이 얼마나 집중해 공부를 하는지 아느냐고요. 제가 가르치는 선생이었지만, 거꾸로 저는 배움을 받았지요. 옥천의 모든 것이 저에게 크나큰 영감이었고 또 영광이었습니다.”

 

■ 조금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그런 그가 퇴직 후에 왕성한 지역활동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옥천과의 단절이 아니라 ‘확장’이고 ‘연결’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던 현동 높은댕이 집은 처분할 수도 있고 아니면 딸이 에어비엔비에 올려 숙박장소로도 활용할 수도 있다고 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고향에 살아계세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들이죠.  늙으면 애 된다고 요즘 구순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먹고 살아요. 얼마나 좋은 지 몰라요. 고향 인근에 천평 정도 되는 산과 땅을 봐 놓았어요. 늘그막 제 놀이터로 손색이 없다 싶었지요. 거기서 걸팡지게 한번 놀아보려구요. 옥천은 잊을 수가 없는 곳이죠. 제 찬란했던 청장년기의 30년의 삶이 오롯이 새겨진 곳인데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떠나는 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조금 더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이라 했다. 이제 회갑이라고. 다른 삶을 모색해야 한다고. 그의 책에 회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옛말에 회갑 노인이 되면 세가지가 평등해진다고 했다. 첫째는 잘생긴 놈이나 못 생긴 놈이나 똑같고, 둘째는 많이 배운 놈이나 덜 배운 놈이나 비슷하고, 셋째는 많이 가진 놈이나 덜 가진 놈이나 거기서 거기라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말이 틀린 게 없다. 저 고난의 세월을 어찌 나혼자만이 헤쳐나왔겠는가. 우리의 지나온 삶에는 우열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은 모두가 다 위대한 여정이다.’
얼궈맸던 속박 훌훌 털어버리고 그의 말처럼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한발자국 또 떼는지도 몰랐다. 옥천을 곧 떠날지도 모르는 그의 삶이 여전히 궁금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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