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여뻐라, 결 고운 나이테가 된 주름들

마당으로 이어지는 담장은 낮고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오른쪽 외양간이 있던 자리에 모과나무가 제법 굵다. 그 아래 오도카니 앉은 절구가 세월을 딛고 있다. 담장을 이어 댓 발자국을 떼니 남새밭이다. 여린 상추들이 도란대듯 오종총하고 다채와 근대도 이웃으로 나란하다. 구순의 어르신이 가꾸는 남새밭에 풀도 없고 저렇게 다양한 채소가 가득한 걸 보면 아직도 정정하시단 증거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서서 어르신을 불러 봐도 감감무소식이다. 혹시 이웃에 마실이라도 가셨나 보다, 라고 뒤돌아 나오는 순간 인기척이 들렸다. 찬찬히 살펴보니 마당 왼편에 창고처럼 생긴 건물이 있었다. 그 쪽으로 가서 문을 여니 세탁기를 돌리신 듯 빨랫감을 한 아름 안고 계신 어르신과 눈이 마주쳤다. 활짝 웃으신다. 치아가 다 빠져서 얼굴은 홀쭉하시지만 얼굴 가득 웃음이 함박꽃으로 핀다. 어르신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쓰려고 왔다며 인사를 드리니 얼른 2층으로 올라가서 뭘 좀 먹자고 하신다. 이것저것 먹을 것을 내 놓으시는 손길을 보니 넘치는 인정이 담겨있다. 경황이 없어 맨손으로 온 나를 부끄럽게 만드신다. 
이복순 할머니는 올해 구순이시다. 집안 살림도 꼼지락꼼지락 잘 챙기시고, 텃밭도 일구시고 빨래며 청소도 하신다. 더욱이 노인대학에도 다니셨고 노인정에 가셔서 이웃 어르신들과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며 지내신다. 요즘엔 코로나19로 집안에 갇히셔서 맘이 불편하시다.

 

■ 손마디 보드랍던 소녀시절
이복순 어르신의 고향은 보은이다. 조용한 농촌 마을의 이장님 댁에서 태어나 조신하게 자라셨다. 봄이면 쑥을 캐 국을 끓이고 쑥털털이(쑥버무리)를 했다. 수확한 밀을 방앗간에서 빻거나 절구에 찧어 체에 밭쳤다. 지금처럼 곱게 빻아진 가루가 아닌 굵고 머들거리는 가루였다. 그것을 다시 절구에 찧고 또 찧어 한 번 더 조밀한 체에 밭친 가루를 통에 담아 쑥과 함께 버무린 뒤 쪄내는 음식이 쑥털털이였다. 먹을 게 없어 늘 허기졌던 시절에 쑥은 귀한 식재료였다. 뭐든지 해 먹을 수 있어 어린 속잎이 돋을 때부터 이파리가 필 때까지 뜯었다. 국으로, 떡으로는 물론 잎을 삶고 말리고 다시 가루로 낸 뒤에 미숫가루나 수제비에 넣기까지 다양하게 활용했으니 얼마나 고마웠으랴.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아직도 쑥만 보면 손으로 뜯게 된다며 웃으신다.
이복순 어르신은 스물이 되기 전에 백운리로 시집을 오셨다. 신랑은 깐깐하고 부지런하고 박식한 청년이셨다. 손 맞잡아 농사일을 하고, 감나무 과수원을 하셨다. 어르신이 쑥 다음으로 귀히 여기는 것이 감이다. 바쁜 부모한테 시간을 얻을 수 없던 자식들은 감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며 놀았다. 다음에는 떨어진 풋감을 주워 논둑에 박았다. 모내기를 마친 논에는 올챙이들이 헤엄을 치고 곧 개구리들이 뛰놀았다. 논고동이 꼬물거리는 동안, 할머니의 자녀들은 과수원에 올라 떨어진 풋감을 바구니에 담았다. 장독대에는 간장이며 된장이 익어갔고, 쓰임이 마땅찮은 중간 크기의 장독이 하나 둘 비기 마련이었다. 그 장독에 볕에 달궈 따뜻해진 물을 붓고 소금과 사카린과 잿가루를 조금 넣어 휘저은 뒤, 꼭지를 딴 풋감을 넣었다. 열흘이 지난 뒤에 장독을 열면 풋감의 떫은맛이 빠져나가고 간간달콤한 감들이 둥둥 떠올랐다. 아이들은 여름 땡볕을 피해 동네 팽나무 아래 모여 그 감을 나눠 먹곤 했다. 먹을 게 없어서 배고프던 시절 이복순 아주머니가 우려내 준 풋감은 인기가 아주 좋았다.
여름이면 감을 솎았다. 가지마다 촘촘히 매달린 감들을 알맞게 따 내어야 가지에 달린 감들이 굵게 열렸다. 요즘은 한 가지에 한 개의 감을 키운다는데 그 때는 두어 개를 남겨두었다. 가을이 올 때까지 절반은 벌레들 몫 이었다.
가을이 되면 수확한 감들의 일부는 경매에 넘기고 나머지는 곶감을 깎았다. 손바닥에 감물이 들어서 시꺼멓게 변해도 밤을 새워 작업을 했다. 절반쯤 말랐을 때 손으로 일일이 감들을 다듬어 납작하게 모양을 잡았다. 

 

■ 내가 보낸 세월도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설 대목 무렵에 곶감을 내다 팔았다. 비닐하우스도 없던 시절, 한겨울에 무슨 과일이 있으랴. 단지 안에 넣어뒀던 홍시와 곶감은 귀한 간식이며 제사상에 올리던 제물이었다. 그렇게 곶감을 만들어 판 돈으로 자식들을 키웠다. 공부도 시키고 옷도 사 입히고 용돈도 쥐어줬다. 2남 1녀의 자식들은 모두 결혼하였고 저마다 남매를 낳아 손주를 여섯이나 안겨주었다. 큰아들은 서울에 살고 둘째 경보는 중대장으로 제대하여 축산업에 종사 중이다. 며느리는 영동병원 간호사로 일하며 같이 살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학교에 가지 못하던 때 손주 강석이는 집에서 컴퓨터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혼자 지내는 내게 강석이가 함께 있어줘서 반갑고 고마웠지만 녀석은 학교에 갈 날을 학수고대했었다.
어르신을 모시고 마당에 나왔다. 사진을 찍자고 청했더니 한사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셔서 옷 매무새를 단장하고 나오신다. 화사한 색상의 셔츠를 안에 받치고 흰색 점퍼를 입으신 뒤에 목에 스카프를 매신다. 그 차림으로 마을에 마실을 가시고 노인정에서 동무들을 만나신다. 서로의 옷 색상을 살피고 스카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신다. 
젊은 시절엔 일 하고 자식 키우느라 바빠서 멋 부릴 짬이 없었다. 그렇지만 고운 것, 예쁜 것, 좋은 것에 대한 관심은 어찌 잊고 살았으랴. 어느 순간, 허리 펴고 살만해지니 늙은  할매가 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환하고 밝은 색상에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여자.
사진을 찍고는 한사코 또 2층에 올라가서 뭘 먹고 가라신다. 냉장고에는 아직 곶감도 있고(지금은 곶감 일을 하지 않지만, 항상 챙겨두신단다) 과일이며 떡이 쌓여 있다고 하신다. 
마당에 마주앉아 손을 잡았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가락에 세월이 주름으로 새겨져 있다. 
구십 년의 세월이 훈장으로 남은 그 손에 바람이 지나가고 햇살이 얹힌다. 마당 어귀 모과나무엔 구름이 걸렸고 집 뒤 대나무밭엔 새들과 곤충들이 부지런히 가족을 일구고 있을테다. 예전에 곶감을 만들라 이르던 감나무들은 같이 늙어간다. 더러는 수명을 다 했고, 더러는 감도 열리지 않고 말라간다. 저것들을 베어버려야 하는데, 누가 그걸 하누?
어르신의 눈길이 먼 하늘을 향한다. 거기, 16년 전, 여든에 돌아가신 영감님 얼굴이 떠오른다. 마주보고 웃어주시는 영감님 얼굴이 감빛이다. 이제는 쭈글쭈글 말라가는 홍시다.

작가 남외경
작가 남외경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