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농사꾼의 노랫가락
어설픈 농사꾼의 노랫가락
  • 옥천닷컴
  • 승인 2020.06.11 14: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숙제 (옥천작가회의 회원, 동이면 세산리)

미국이 이상하다. 트럼프는 코미디 정치인이라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월이 가면서 '트럼프 정치학'의 속내도 드러났다. 이제는 코미디를 넘어 '힘의 논리'를 구사하는 듯하다. 힘으로, 알력으로 국가와 국민을 다루려는 지도자는 자격 미달이다. 이상한 나라, 미국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그들은 지금 극단적 이기주의 속에, 추구해서는 아니 될 '삶의 가치'를 혼돈한 것 같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일제의 총칼 앞에서 육탄으로, 민족독립의 정당성을 주창했던 민족이요, 썩은 정부를 '촛불혁명'으로 보라는 듯,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새롭게 탄생시킨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서양과 동양의 문화는 근본기저부터가 태동을 달리한다. 서양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요, 물질과 재화의 척도로 판단한다. 

그것은 물질 만능의 극치와 극심한 이기주의를 잉태시킨다. 반면 우리의 문화는 자연은 함께 숨 쉬고 사유할 수 있는 쉼터이며, 삶의 활력을 재충전시키는 든든한 동반자요, 반려자로 생각하는 것이 동양의 사유 방식이다.

미국인들은 소의 젖을 먹고 자랐기에 들이받는 문화가, 그들의 의식 속엔 내재해 있다. 우리는 어머니의 포근한 가슴에 안겨서, 자장가 속에서 모유를 먹고서 자랐기에, 부모의 소중함과 자연의 숨결을 가볍게 불 줄 모르는 민족성을 띠고 태어났다. 어찌 서양의 문화와 우리의 의식구조를 비교하랴.

우리의 경찰도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는 칼끝이 항시, 국민의 가슴을 노리고 있었고, 국민은 압제 된 피조물에 불과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요, 든든한 의지처'다. 세계의 우롱 거리가 되기 전에 트럼프행정부는 숙고할 일이다.

새벽 6시, 기상 리듬에 맞춰서 산책하러 간다. 오늘도 나의 몸은 천근만근의 무게로 달라붙는다. 그러나 고통과 진통이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나는 뼈를 깎는 아픔 속에서도 걷는다. 이것이 나의 생존비법이다.  

진통도 나의 육신의 일부요, 불청객이지만 나의 벗이기에, 오면 오는가보다, 가면 가는가보다, 생각하면서 산다. 이제는 허리가 끊어지게 통증이 와도, 모두가 나의 복이려니, 마음먹으니 한결 남은 생이 부드럽다. 나의 허리 통증 치료법은 간단하다. 아플수록 걷는다. 걷다 보면 통증은 백기로 물러간다. 지독한 '관심법'이다. 이렇게 생활해 온 지가 벌써 십수 년이다. 

육신이 병이 들면 정신은 더 맑아진다. 모든 사물 앞에서 초연하게 순리에 대응하는 법이, 어떤 길인 가를 병마는 웅변으로 늘 대변해 주고 있다.

이렇게 산속을 걷다 보면 진통 속에서도, 얻는 것이 많다. 요즘은 뻐꾸기가 한몫한다. 일진에 따라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변한다. 꽃이 지는 그림자 밟으며 걷는 산길의 운치는 이미 언어의 경계를 벗어난다. 이것이 아침 산책길의 묘미다.

한 시간을 돌고 나서 텃밭으로 간다. 아침 텃밭은 풋풋한 농작물들이 전하는 언어로 싱그러움 가득하다.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먹고서 자라는 농작물인지라, 그들도 주인의 얼굴을 기억한다.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는 구호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것이 아니다. 첫째는 부지런해야 한다. 둘째는 겸손하며 정직해야 한다. 농사꾼의 언어는 우직하고 어눌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땅의 품성의 발현일 뿐이다. 공자님도 말씀하셨지 않은가. "巧言令色(교언영색)이 鮮矣仁(선의인)이니라"고, 말 많고 얼굴색이 자주 바뀌는 사람치고 믿을 사람이 드물다는 뜻으로 나는 읽는다. 천개의 입으로 혀를 놀려서 예수를 팔아먹는  '사이비 목사'보다는, 차라리 밥을 굶어 죽을지언정 서울 역전의 '노숙자'가 낫지 않을까.

하늘이 노력한 만큼 수확의 기쁨을 안길 때, 등 굽은 허리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하늘에 감사할 줄 아는 이가 농사꾼이다. 그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가꾸고 보듬어야 할 생명이요, 축복의 대상인  것이다. 시기와 질투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꽃이 꽃을 향하여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벼 한 포기가 생명의  젖줄이요, 고추 한 포기가 만대의 식단을 풍성하게 장식할, 천하의 둘도 없는 식자재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강조할 줄 모른다. 고로 농사꾼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시대의 역군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감히, 영악한 현대의 '화이트칼라'들이 함부로 무시할 서열이 아니다.

그들은 천박한 부류들이 목숨 걸고 똥파리처럼 달려드는, 명예도 모르며 권모술수도 부릴 줄 모른다. 땅이 만물을 품듯이, 그들의 가슴은 늘 충만과 감사의 눈빛이다. 투박한 땅의 자식이요, 하늘의 부름을 거역할 줄 모르는 순한 양이기에, 마음을 항시 거울과 같이 쓴다. 태풍이 불어와 농사를 망쳐도, 원망치 않고, 더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후회하지 않고 간다. 이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이 시골에 계신 등 굽은  나의 부모요, 부모의 부모였던 우리들의 면면한 조상님들의 고된 삶의 길이었다. 이보다 더 숭고한 길을, 자기 삶의 길이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농사꾼이 행복한 나라가 진정한 복지국가요, 사람 사는 나라가 아닐까, 고추밭에서 잡초를 뽑으며 생각하는 아침이다.

손녀가 의아심 어린 눈으로, 가슴 떨리는 손으로, 텃밭에 뿌린 상추가 오늘 아침 따라 더욱 싱그럽다. 부지런한 집사람이 상추와 쑥갓, 고추와 오이를 따다가 아침 밥상을 차린다. 된장의 풍미가 초가삼간을 태운다. 운동을 한지라 밥맛이 꿀맛이다. 밥상이 아니라 유월의 생기를 먹는 기분이다. 

벌써 뒷집의 부지런한 아저씨는 옷이 땀방울로 흠씬 젖었다. 시골의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투명한 빛깔로 아침을 맞는다. 오늘따라 뻐꾸기가 우리 집 지붕 위에서 운다. 이것이 궁벽한 시골 살림살이의 그윽한 풍경이다. 장부의 살림살이가 이만하면 되는 것 아닐까.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