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한 시절 지나가는 회오리바람
모든 것은 한 시절 지나가는 회오리바람
  • 시민기자 김경희
  • 승인 2020.06.10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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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백운리 안상호(80세) 어르신 1941년~
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52)

지난달에 산수연(傘壽宴)을 치르셨다는 백운리 안 상호 선생님. 교평리의 송 선생님 댁에서 우연히 안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군살 하나 없는 양복 매무새가 마치 30대 청년 같았던 첫 대면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팔순 이라는 말씀에 놀라기보다 믿기 어려웠다. 사연을 듣고 보니 안 선생님이 청년처럼 살고 계신 까닭을 짚어낼 수 있었다. 백운리 청년, 안 상호 선생님의 무협지 같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배고픈 유년은 니나 내나 별수 없다.

내 고향은 청산면 지전리 54번지, 청산초등학교와 이웃한 짱구네 점빵 옆집이다.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으니 부모님도 연로하셨다. 조부님 에는 부자셨다는데 나 철없던 시절에는 배고팠던 기억이 더 많다. 내가 여남은 살 되던 해 6.25가 났다. 경상도 밀양까지 내려갔었는데 한 여름 땡볕 따글따글 내려쬐던 피난길에 엄마 손 놓칠세라 꽉 잡고 발 동동 굴렀던 어설픈 기억이 남았다. 피난 길 들판을 지나가면 물 댄 논에 개구리들이 어찌나 구슬피 울던지 우리 피난민들 처량한 신세를 녀석들도 알기는 알았던 건지.

아버지는 장남으로 태어나셨고 우리 땅을 부쳐 먹던 소작농이 많았다는데 그 땅문서들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턱이 없다. 집집마다 그 놈의 땅 문서들은 발이 달렸나 다들 누구품에 들어앉았는지 한바탕 속을 끓였다.

막내로 태어나서 엄마 젖도 부실했고 부모님 사랑이 고팠다. 강한 척 하지만 내 속마음은 여리고 약하다. 부모님이 전쟁 통에 8남매를 키우셨으니 공부는커녕 먹고 살길 찾느라 노상 분주하고 노심초사였다. 못 배운 설움이 깊지만 부모님을 원망할 수는 없다. 그 시절을 만났던 대부분의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짐이며 속울음이었다. 젊어 한 때는 못 배운 한이 깊었고, 부모님 사랑이 고팠지만 되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한 시절 지나가는 회오리바람이다.

나의 과거는 직업 군인이었다.

아직도 젊고 날렵해 보인다며 과거의 나를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나는 결혼 후에 한참동안 직업 군인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몸이 날렵하고 재빨랐다. 태권도도 잘 하고 무술에도 능했다.

1공수특전단 의무대에서 근무를 했다. 나는 의사가 아니라서 직접 치료를 하거나 수술은 못하고 주로 약재업무를 봤다. 군의관이 진료를 하고 처방전을 주는 건 지금이나 비슷했다. 나는 한번 듣거나 읽어보면 그 약 이름을 바로 외웠다. 그리고 어떤 병에 어떤 약재를 쓰는지도 기억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군대에서 내 별명이 왕 돌팔이였다. 웬만한 군의관보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병명이 정확했다. 물론 군의관에 비해 전문적인 지식은 부족했지만 피부를 기워야 하는 환자가 생겼을 때 그 일을 내가 잘 해 냈다.

그 때, 나는 가난한 태생의 한계를 확인 했었다. 남들처럼 공부하고 배웠다면 아픈 사람들 곁에서 그들을 진심으로 돌봐주는 괜찮은 의사가 되었을텐데...

왕 돌팔이라는 별명은 푸념을 낳기도 했지만 누군가 나를 인정해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잠시나마 위로를 받고 안쓰러운 내 삶을 보듬어야 했다.

몸과 마음에 열정이 펄펄 들끓던 시절이었다. 낮에는 의무병으로 근무하고 밤에는 운동을 했다. 태권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부대 안에서 1인자가 되었다. 품새를 인정받아 축하사절단의 일원으로 시범보이기’ ‘겨루기등에 차출되어 갔다. 나중에 수도경비사령관이 되신 차규헌 장군의 휘하 부대에 경호대장 전속의 태권도 교관단으로 베트남에도 파견 나갔다. 아시아군경 영화제에도 태권도 하는 모습으로 잠시 출연도 했고 그땐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수경사의 의무병과에 근무하다가 육군상사로 전역하면서 군대 생활의 막을 내렸다. 그 젊은 날의 비망록으로 내가 아직도 청년 같은 양복 매무새를 가질 수 있는 까닭을 엿볼 수 있다.

군 전역 후에 병원 사무장으로

훨훨 날던 군 시절을 뒤로하고 전역 후에 김포공항관리공단에 근무하고 있었다. 군 시절 내 손맛을 보았던 군의관들이 자꾸 병원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이것저것 환자에 대한 지식도 있고 기본기가 튼튼한데다 사람들과 소통을 잘했다. 사무장으로 환자 관리며 병원 업무를 잘 봐 줬다. 소문이 나면서 광고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내 능력을 높이 사주고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군대와 병원을 거쳤으니 이젠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서 광고 영업을 1년간 했다. 그런데 거기서 회의가 찾아왔다. 영업이란 게 의도는 아니지만 고객의 마음을 뺏어야 하다 보니 사실에 거짓을 조금 보태기도 하고 할 수 없이 부풀릴 수밖에 없었다. 내 체질에 맞지 않아 고민 중이었는데 이번엔 성형외과에서 나를 불렀다. 사무장으로 가서 제모하는 일을 맡아 실력발휘를 했다. 미진하면 만족할 때까지 더 해주면서 친밀감이 쌓여 믿음을 주었다. 그 때 한창 미용성형 붐이 불었을 때 쌍꺼풀, 가슴 보형물 주입과 피부 관리 등에 여성들이 몰려왔다. 손님은 많았다. 나는 손님을 몰고 다니는 財數男(재수남) 이었다.

그 때 물질의 축복도 많이 받았다. 자랑이 아니라 사람 사는 이치를 또 배웠다.

사람에게 진심으로 대하면 그 마음이 되돌아온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고객이 필요로 하는 사안에 대하여 정확히 짚어 주고 공감했다. 예를 들면, 가슴이 작아서 열등감에 시달린 사람이 있을 땐 그 고객한테 가슴 크기가 왜 중요해요?’ 이렇게 상담하면 엉터리다. ‘힘드셨군요. 어떻게 해 드리면 만족하시겠어요? 투자한 것보다 훨씬 큰 행복을 찾으세요.’ 이렇게 환자와의 마음 거리가 좁혀져야 수술로 이어지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볼 수 있다.

그렇게 사무장 일을 하다가 딱 좋을 때 그만두기로 했다. 병원에서야 1년만, 아니 6개월만 더 손님 상담을 해 달라고 붙잡았다. 하지만 이형기 시인이 쓰신 낙화란 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미련 없이 훌훌 털고 나니 매일 매일이 기쁨이었다. 그동안 아들 셋은 결혼하여 집 사고 다들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다. 저축한 돈도 있고 부동산도 좀 마련해서 더 이상 욕심 부리면 흉해 보일 것 같았다. 한번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뒤도 안 돌아 보였다. 內子 손잡고 바로 시골로 내려왔다. 지금 생각해도 잘 했다. 그 때 돈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 봤으면 건강을 상했든지 마음을 상했든지 불 보듯 뻔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정원 딸린 집을 지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이웃에 도움 되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 게 얼마나 잘한 결정인지 자다가도 손뼉 칠 일이다.

지금의 나, 유유자적한 어르신

내 나이 이제 여든, 지난달에 산수연(傘壽宴)을 치뤘다. 큰아들 귀찬, 둘째 창현이, 막내 시현이 내외와 손주들이 모여서 축하를 해 주었다. 내 핏줄, 내 식구들이 모두 건강하고 제 몫하며 잘 살고 있으니 이만하면 되었다. 모두들 합심하여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현하고 있으니 우리도 당연히 동참하고 그리해야 하는지라, 조촐하게 우리 가족끼리 밥 한 끼 같이 먹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자리였지만 행복하고 그만하면 족했다.

인생이 별건가? 內子는 내 곁을 지키고 자식들은 밥벌이 하여 식구들 건사하고 며느리들은 제 할 일 하며 가정을 지키면 된다. 손주들은 건강하게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학교 잘 다니면 되는 것이다. 후손들 아프지 않고 우리 부부 앞질러 떠나지 않는 것이 큰 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

사람이 나이 들면 세 종류로 불린다고 생각한다. 늙은이와 노인과 어르신.

내 편한대로 살며 흔히 꼰대라고 불리는 늙은이와, 그냥 그렇게 나이든 사람으로 사는 노인과, 행동과 능력을 존중받으며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어르신으로 나눌 수 있다. 나는 내 나이를 즐겁게 누리며 유쾌하고 보람 있는 삶을 엮어서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어르신으로 살고 싶다.

그런 바람이 성사되어 옥천경찰서 어르신 명예경찰 창설 멤버가 되었다. 회원 200여 명의 권익을 보호하고 상호 소통이 원활히 이뤄지도록 옆에서 돕는 부회장이고, 지금은 청산지회 회장을 맡아 교통사고나 가정폭력, 청소년 보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올해도 축제 때 손을 보태고 관내 행사에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바이러스 때문에 조용히 한 해가 지나간다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다.

아들 셋에게 부모 역할 하려고 나름 애썼다. 아들들이 결혼하면 지들 몫으로 챙겨둔 통장 건네주면서 집 사는데 보태라 했다. 부모 역할이 어디 한 두 가지랴만, 그래도 자식 집 사는데 보탬이 되어 주는 게 얼마나 맘 든든하고 즐거운 일인가 말이다. 큰아들은 다국적 기업 ‘존슨앤 존슨’에서, 둘째 아들은 회사 다니고, 셋째 아들은 자기 사업 하고 며느리는 용산고 수학 선생님으로 재직하다가 아이를 네 명 낳으며 육아에 전념하고 있다. 요새 젊은이들이 출산을 안 한다고 야단인데 나는 우리 며느리같이 자식을 여럿 낳는 사람이 현 시대의 진정한 ‘애국자’ 라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어르신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사람은 공부하고 생각하고 깨닫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깥 활동을 하면서 이웃에게 친구에게 배우고, 어린아이들에게도 깨달음을 얻고, 성당에 나가서는 개인의 행복이 아닌 함께 나누는 사랑을 소원하고 기도드리고 있다.

끼니를 챙겨주는 內子가 고맙고, 저녁마다 안부를 물어주는 며느리는 더 고맙고, 주말에 찾아와서 조잘대는 손주들은 지금 내 삶에 큰 기쁨이다.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 같은 일상이다. 한바탕 회오리바람 같던 인생, 작은 시골 마을의 凡夫(범부)로 사는 에 비하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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