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 문학의 향연

밤하늘의 별이 참 예쁘다. 지나간 시간을 꺼냈다. 머릿속 저 밑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본 모습이었다. 두세 살쯤 된 아기가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개구리를 쫓는다. 아기도 폴짝거리며 뛰는 개구리처럼 기어다닌다.
햇볕이 따가운 초여름 온 가족이 모여 있다. 밭을 일구는 모습이다. 자세한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에 입력된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뽕나무를 심는 중인지 파릇한 새싹 잎이 조금 자라 있는 것 같다.

입학식 날 옆집에 사는 아저씨가 함께 가자고 왔다. 학교 가고 싶은데 엄마가 데려다주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반나절은 울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아저씨가 돌아왔다. 너 오늘 학교에 왜 안 왔어. 선생님이 네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가슴 아픈 날이었다. 엄마는 왜 학교에 입학시켜 주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아마도 일 때문에 입학식 날짜를 잊어버린 것 같다. 다행히 다음 해 입학했다. 내 별명은 “꼬마 선생”이었다. 구구단도 잘 외우고 공부도 잘해 담임선생님께서 지어주신 별명이다. 장학사 선생님이 오시면 앞에 나가 칠판에 적힌 수학 문제를 풀었다. 선생님께서 친구들 나머지 공부를 시키면 검사를 맡아주곤 했다.

초등학교를 재미있게 다녔다. 땅따먹기, 제기차기, 깡통 차기, 고무줄놀이를 했다. 정말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봄이면 진달래꽃을 따고, 여름이면 원두막에 모여 참외 수박을 먹었다. 가을에는 감과 밤을 주웠다. 겨울에는 고구마를 뒷방 천장까지 쌓아 올려놓았다. 아웃 사람들과 허물없이 나누어 먹었다.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동생을 업고 딸기밭에 갔다. 아직 익지도 않은 딸기를 따서 동생에게 먹였다. 딸기를 먹이면 나을 것 같았다. 동생은 그런 누나의 마음을, 그때 일을 기억할까?
어릴 적 시골 보름날은 참 재미있었다. 남의 집 부엌에 몰래 들어가 무거운 무쇠솥을 슬그머니 열었다. 솥 안에 넣어둔 밥과 반찬을 훔쳤다. 밤새 이집 저집을 돌아다녔다. 훔친 밥과 반찬을 큰 양푼에 넣어 비빔밥을 만든다. 그 밥을 친구들과 여럿이 모여 먹었다. 노래를 부르며 밤새워 놀았다. 어른들은 그런 우리의 행동에 혼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오빠들이 구워준 개구리 뒷다리, 참새를 잡아 화롯불에 구워줬다. 토끼와 꿩을 사냥해 장작불에 구워 먹던 맛이 살아난다. 추운 겨울날 눈이 발목까지 찾아왔다. 비료 포대 속에 짚을 넣고 높은 언덕에 올라간다. 서로의 허리춤을 잡았다. 울퉁불퉁 꾸불꾸불한 길을 추운 줄도 모르고 눈썰매를 탄다. 하하 호호 웃으며 내려오는 기분은 최고였다. 에버랜드 놀이동산보다 짜릿한 즐거움이 온몸 가득 감싸주었다. 내가 자란 곳은 시골이다. 개똥벌레의 반짝임 속에 자리 잡은 안골마을이다. 그곳에서 자란 꼬마 선생의 꿈은 밤에만 피는 달맞이꽃이 되어버렸다.
중학교 가는 도중 작은 마을에 교회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동네 친구 대여섯이 모여 학교에 갔다. 돌아올 때면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늘 쉬었다 오곤 했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가 나를 부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는 절대로 교회에 가지 못하게 했다. 더군다나 울 엄마는 대문 앞, 장독 앞, 샘물 앞에 떡을 해 놓고 지극정성을 드리는 분이다. 특히 내가 몸이 아플 땐 병원에 가지 않았다. 큰 부엌칼을 머리 맡에 놓고 밤을 꼬박 새웠다. 마음은 교회를 나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그곳을 동경했다. 엄마를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무당을 불러 굿하는 모습은 정말 싫었다. 우리 마을은 같은 김 씨만 모여 사는 친척들이었다. 그중에 몇 가정만 예수님을 믿었다. 나머지는 우상 숭배했다. 예수님을 믿으며 사는 가정이 남다르게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책을 통하여 데미안을 만났다. 그 속에서 “알에서 깨어난다.”는 말을 가지고 고뇌했다. 셰익스피어를 만났다. 사느냐 죽느냐는 말로 논쟁을 했다. 사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인생에 젖어 가슴을 앓았다. 수없이 많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지, 이렇게 복잡하고 힘든 세상을 왜 살아가야 하는지, 힘없고 부족한 자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자들의 안타까움, 늘 겪게 되는 일상 속에서 하얀 지면과 같은 인생행로에 갈등했다. 그때 방구석에 놓여 있는 성경을 읽게 되었다.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성경은 그날 처음 접하게 된 순간이었다. 사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성경을 처음 펼치는 순간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한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환율이 내 가슴을 에워쌌다. 하늘과 땅, 빛과 어두움, 사람과 짐승을 말씀으로 지으신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놀랍고 경이로웠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란 말씀을 박게 되었다. 그동안 갈등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온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면서 나는 알에서 깨어났다. 추수를 마친 가을 들판의 허허로운 만큼이나 텅 빈 내 마음을 가득 채워 주셨다. 어둡고 캄캄했던 터널 속에서 밝은 빛을 발견한 참 기쁨을 주었다.

김명희, 물의 안부, 『문정문학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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