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래 (금산 간디학교 교사)

표지를 장식한 선녀의 포스가 매우 강렬해. '너, 이 책 살 거지?'라고 말하는 듯하거든. 그래서 샀어. 꽉 쥔 왼 주먹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한가득 담고 있는 것 같아. 꾹 다문 입술과 무표정한 얼굴은 굳은 의지와 불의를 참지 않겠다는 결의가 보여. 이 사람이 신비로운 존재라는 건 어깨 양옆으로 둥그렇게 너울대는 하얀 끈을 보면 알 수 있어.  

그래, 이 책의 선녀는 참지 않았어. 나무꾼에게 옷을 도난당한 선녀는 화가 났어. 나무꾼은 도둑이야. 우리는 나무꾼이 사슴을 살려줬으니까 착하고 게다가 가난하므로 불쌍한 존재라고만 생각했나봐. 정작 그가 파렴치한 도둑임을 인지하지 못 한 건 아닐까? 사슴 역시 범죄를 사주한 공범이야. 그런데도 은혜를 갚은 의리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선녀는 도둑인 나무꾼에게 옷을 빼앗기고는 억지로 긴 시간을 같이 살아야 했어. 

이후 나무꾼은 한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옷을 건네주지. 선녀는 자식 둘을 안고 하늘로 올라가. 우리는 또 나무꾼이 불쌍해. 못된 선녀는 나무꾼을 눈물로 속이고 하늘로 내빼 버렸으니까. 불쌍한 나무꾼은 또 도움을 받고 하늘로 올라가. 그렇게 장인 어른댁에 가서 얹혀살지만, 지상에 있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내려가지. 그런데 또 칠칠한 짓을 하고는 하늘로 올라갈 길을 놓치고 말아. 이후 하늘에 있는 아이들과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수탉이 되지. 

선녀의 처지에서 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인 것 같아. 지금까지의 '선녀와 나무꾼'은 너무 나무꾼의 입장만 두각 시켜 편향된 이야기가 된 건 아닐까? 선녀는 그저 목욕하러 왔다가 옷을 도난당하고 몇 년을 원치 않는 삶을 살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십 년을 말이야. 

저자 '구오(예명이겠지?)'는 이렇게 전래동화인 '선녀와 나무꾼', '장화홍련전', '박씨전', '콩쥐팥쥐전', '처용', '서동과 선화공주', '우렁각시', '반쪽이', '바리데기', '혹부리영감' 등 10개 동화를 성차별적인 요소를 없애 다시 썼어. 아무래도 전래동화가 어린이들에게 널리 읽히니 성 차별적 인식이 이른 시기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염려되어 시도해본 글쓰기가 아닐까 싶어. 

저자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분개한 선녀가 나무꾼을 응징하는 이야기로 바꿔 썼어. '서동과 선화공주'는 서동이 공주를 얻기 위해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계략을 써서 맺어지는 내용인데, 이 역시 문제가 있어. 정분이 낫다는 거짓 소문을 동요로 만들어 아이들이 노래하게 해서 (문란하다고 소문난) 공주를 왕이 내치면 서동이 낚아채는 내용이니까. 여자 연예인에 대한 근거 없는 댓글 사건 같은 게 겹쳐 보였어. 저자는 이 이야기도 깔끔하게 바로잡아. 

'바리데기'도 서글픈 이야기야. 단지 딸이라서 버려진 공주가 부모가 병들자 저승까지 가서 고생해서 약을 구해서 낳아준 은혜를 갚는다는 얘기인데, 황당한 이야기라 할 수 있어. 저승까지 고생고생해서 여차여차해서 가는 건 모험이니까 그렇다 치고, 성스러운 우물을 관리하는 장군과 수십 년을 같이 살면서 애들을 줄줄이 낳아야 했거든(그 아이들은 어찌 되었을까?). 이외에도 작가가 새로 쓴 '반쪽이', '박씨전' 등이 특히 인상 깊더라고. 아주 통쾌하면서도 정의로운 글이 되었어.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시끄러웠어. 난 책도 보고 영화도 봤어. 대체로 책 내용과 비슷해. 영화의 평점이 6점 중반이야. 재미있는 것은 극도로 낮은 평점(0)과 높은 평점(10)이 섞여서 이 정도 평균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야. 낯선 사람과 함부로 얘기 나눌 수 없는 소재가 있지. 정치와 페미니즘은 그런 소재인 것 같아. 날카로운 발톱과 손톱은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아. 그래서 우리 사회는 아프고 멍든 모습이야. 이 영화는 그런 혼돈의 온도를 잴 수 있는 리트머스 종이가 되었어.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이나 직접적인 말보다는 이런 책 하나를 보면 참 좋겠다 싶어. 그러면 그동안 뭐가 문제였는지 느낄 수도 있으니까. 자기 잘못은 아니지만, 그동안 잘못된 것이 많았다는 건 알 수 있거든. 말로는 가르치기 어려운 게 있어. 

'여름밤'이라는 사람이 그린 삽화가 아주 인상 깊어. 책의 전체적인 느낌과 아주 찰떡궁합이야. 삽화의 여인들은 웃지 않아. 그들은 매우 진지하고 근엄하기까지 해. 사건이 생기면 그들은 안절부절하거나 도망가거나 주저앉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고 행동해. 남자이거나 여자이기 이전에 (주체적인) 사람이라는 거지. 아마도 그걸 강조하고 싶은 삽화인 거 같아. 시사점이 많고 재미있으니 추천하고 싶은 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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