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준임(86, 동이면 적하리)
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50)

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적하리에 사는 오준임(86)씨입니다. 열여덟 살에 전통혼례 방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문득 최명희의 소설 '혼불'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혼불'에 나오는 결혼식 묘사 장면들을 찾아봤습니다. "마당의 넓은 차일 아래에는 십장생이 그려진 열 폭 병풍이 펼쳐져 있다…'부선재배(婦先再拜).' 신부의 양쪽에 서 있던 수모(手母)가 신부를 부축한다. 신부는 다홍치마를 동산처럼 부풀리며 재배를 하고 일어선다. 한삼에 가리워졌던 얼굴이 드러나자, 흰 이마의 한가운데 곤지의 선명한 붉은 빛이, 매화잠(梅花簪)의 푸른 청옥 잠두(蠶豆)와 그 빛깔이 부딪치면서 그네의 얼굴을 차갑고 단단하게 비쳐 주었다. 거기다 고개를 약간 숙인 듯하였으나 사실은 아래턱만을 목 안쪽으로 당긴 채, 지그시 눈을 내리감은 그네의 모습에서는, 열여덟 살 새 신부의 수줍음과 다감한 풋내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위엄이 번져나고 있었다…사모(紗帽)를 쓰고 자색(姿色) 단령(團領)을 입은 신랑은 의젓했다…초례청을 에워싼 사람들의 뒤쪽에서 누군가 탄성을 질렀다." 혼례를 치른 뒤 평생을 남편과 자식 뒤편에서 묵묵히 살림하며 자식들을 키워온 한 여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옛날 사진을 찾아보니 나는 늘 남편의 뒤나 옆에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나는 1935년 동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오이득)와 어머니(박병연)는 평범한 농사꾼 인생을 사셨다. 그래도 밥을 굶지는 않을 정도로 유복한 편이었다. 나는 5남매(3남2녀) 중 셋째이자 장녀였다. 두 오빠(오선택, 오준탁)는 먼저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나와 두 동생만 남았다.

6.25전쟁이 터지던 1950년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장성한 두 오빠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고, 나머지 식구는 집에 남았다. 밤이 되면 동네 뒷산으로 피신했다가 해가 뜨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당시 할머니도 생존해 계셨는데,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처녀들이 위험해질 것이라며 동갑내기 동네 친구와 함께 손녀를 다락방에 숨기곤 하셨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다락방이 있었다. 서울에 살던 이종사촌, 고종사촌 형제와 오촌 식구들도 우리 집으로 피난을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동이면 연줄마을(학령2리)에 사는 윤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당시만 해도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들이 처녀 총각의 혼례를 결정했다. 신랑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한 채 금암리 우리 집 마당에서 전통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양쪽 볼과 이마에에 연지 곤지를 찍은 나는 사모관대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신랑과 초례청에 마주섰다. 재배를 나눌 때 살짝 고개를 들어 건너편의 남자를 바라보았는데, 그것이 신랑과의 첫 대면이었다. 첫날밤을 치르고 난 다음날 가마를 타고 시댁이 있는 연줄로 왔다. 신랑 윤교승은 나보다 세 살 많은 21세였다. 

제주도에 관광을 갔을 때 용두암 앞에서 조랑말을 타고 사진을 찍었다.

■ 하루 다섯 번 밥 지어 머리에 이고 날라

시아버지는 한 평생 일만 하셨던 분으로 기억된다. 시아버지는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1남1녀를 얻었는데, 1녀1남 중 독자가 바로 나의 신랑 윤교승이었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두 아이를 낳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시아버지는 새 아내를 얻었는데, 슬하에 2녀2남을 두었다. 새 시어머니는 나와 채 열 살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내가 시집갔을 때 이미 두 딸을 낳은 상태였다.  

시아버지는 하루 종일 일만 했다. 해가 뜨기 전부터 일하기 시작해 해가 지고 나서야 일을 마쳤다. 농사가 많다 보니 일꾼을 두고 논농사, 밭농사를 지었다. 시어머니와 나는 둘이서 하루 다섯 번 밥을 지어 날랐다. 아침, 점심, 저녁은 기본이고 아침과 점심 사이, 점심과 저녁 사이 새참도 날라야 했다. 밥과 반찬을 담은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손에는 물병이나 주전자를 들었다.

시어머니와 나는 농사일도 거들어야 했다. 특히 콩 농사는 가을 소출이 아홉 가마가 나올 정도로 규모가 꽤 컸다. 시아버지와 일꾼들이 콩을 베어 말린 다음 도리깨로 두드리면 시어머니와 둘이서 뒤처리를 담당했다. 흙, 껍데기와 뒤섞인 콩을 '키'라는 도구를 이용해 까불렀다. 키를 위아래로 흔들면 흙과 먼지가 날아가고 알맹이만 남았다.

나보다 나이가 예닐곱 살 많았던 시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나쁘지 않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 담백한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나를 시집살이로 불쾌하게 만들지 않았고,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도 않았다. 시어머니가 84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한 집에서 모시고 살았다. 시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는데, 그때 나이가 요즘으로 치면 젊은 축에 속하는 64세였다.    

나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5남매를 낳았다(첫 아이는 유산했다). 내가 낳은 큰 아이와 시어머니가 새로 낳은 아들이 동갑이었다. 시어머니가 우리 아이에게 젖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이 애를 낳고 젖을 나눠 먹이는 일은 흔했다.  

젊은 시절 남편(오른쪽)이 친구와 찍은 사진.

■ 죽향초 근처 살림집 살던 '나의 황금시대'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던 남편이 교사시험에 합격해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때가 장녀 금순과 차녀 화향이 태어난 직후였을 것이다. 첫 발령지는 옥천읍에 위치한 죽향초등학교였다. 남편, 두 딸과 함께 넷이서 학교 옆에 작은 살림집을 차리고 분가했다. 이 무렵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던 시기였다. 물론 모내기나 추수 같은 농번기가 되면 시아버지가 여지없이 호출했다. 그러면 무조건 득달같이 연줄 시댁으로 달려가서 시어머니와 밥을 지어 들판으로 날라야 했다.

1~2년이나 흘렀을까. 시아버지가 지금 살고 있는 적하리의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꿈결 같았던 나의 황금시대는 끝났다. 남편은 학교 옆 마을에서 자취를 하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시댁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이 되었다. 이후 남편은 태안, 영동 등 타지의 학교를 돌면서 홀로 자취 생활을 했다. 그때 남편이 고생이 참 많았다. 마지막 근무처는 군남초등학교였는데, 남편은 여기서 정년퇴직을 했다.

초등학교 교사는 박봉에 시달리며 오로지 사명감으로 일해야 하는 고달픈 직업이었다. 커가는 자식들을 가르치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남편은 잠시 외도를 했다. 학교에 사표를 내고 나와서 옥천읍에 농약상을 열고 몇 년 동안 운영했다. 하지만 학교 선생 하던 사람이 갑자기 장사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장사를 접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남편이 학교로 복귀할 때까지 살림이 너무 어려웠다.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농사밖에 없었다. 밭에서 키운 채소를 다듬어 대전역까지 가지고 나가서 팔았다.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농사만 짓던 사람이 장사를 하려니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그렇게 푼돈을 벌어서 아이들 학비에 보탰다.  

■ 낙천지명(樂天知命)의 자세로 살고 싶어

가정 형편은 어려웠지만 장녀만 빼고 나머지 4남매는 모두 대학까지 가르쳤다. 장녀 금순은 품이 큰 아이였다. 옥천여고 다닐 때는 이십 리 길을 날마다 걸어 다녔다. 끝까지 공부했다면 웬만한 남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 큰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들을 위해서 서울로 가서 취직을 했고, 다행히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도 했다. 

가정의 희망이었던 장남 석권은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첫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서울로 가서 누나의 도움을 받아가며 1년 동안 재수를 하더니, 등록금이 저렴해서 머리 좋은 시골 학생들이 많이 간다는 서울시립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석권은 대학도 누나의 도움을 받으며 다녔다. 아무리 남매라도 같이 지내다 보면 오해나 갈등이 있을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 장녀와 장남이 서로를 나쁘게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마음으로 처남을 받아준 큰 사위에게 나는 지금도 너무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1992년 남편의 회갑연을 열었다. 당시 현직 교사였던 남편은 부조금을 받지 말자고 했다. 큰사위와 장남을 비롯한 자식들이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고 살아온 남편은 2016년 84세를 일기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나에게는 든든한 울타리 같았던 남편과의 사이에서 5남매(2남3녀)를 얻었다. 그리고 장녀 금순(2녀1남), 차녀 화향(2남2녀), 장남 석권(2남), 차남 석만(1녀), 삼녀 선향(2남)이 모두 12명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서 열심히 살아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내 방에 걸려 있는 편액 '낙천지명(樂天知命)'은 큰 사위가 써준 것이다. '천명을 알고 천명을 즐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쉽게 해석하면 '순리대로 살라'는 말이다. 내 나이 어느덧 여든여섯 살이 되었다. 한 순간도 힘들지 않은 적은 없지만 하늘의 뜻에 순응하며 나의 처지에 만족하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다가 남편을 만나러 갈 수 있기를 빈다.

딸애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남편의 모습.  

항상 내 옆에 있어주셨던 엄마

엄마. 
엄마는 언제 어디서든 제가 부르면 옆에 있어주셨던 존재였지요. 엄마는 한평생 남편과 자식과 가정을 위해 자신의 삶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오셨습니다. 
자식 5남매 중 3남매가 동시에 대학을 다닐 때에도, 그리고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 1년에 3명의 자식들 혼사를 한꺼번에 치를 때에도 정녕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의 어깨 위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짐들이 잔뜩 올려져 있었던 거네요. 이제야 제가 자식을 키워보니 엄마가 얼마나 힘이 드셨을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요. 
가까이 살기에 자주 찾아뵙긴 하지만, 뵐 때마다 걱정되는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엄마 연세는 생각 못하고 언제나 어릴 적 젊었던 엄마이길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닌지 아린 마음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셔주세요.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엄마.

 

막내딸 선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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