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 문학의 향연

저녁을 거르고 집에 간다 누가 골목을 이리 높은 곳까지 묶어놓았을까 하늘이 길을 쏟아버릴 듯 여러번 휘청인다 그때마다 눈덩이를 굴리는 남매 담벼락에 매달려 있다


누이가 먼저 손바닥에 입김을 불어봅니다 손바닥의 두께만큼 부풀어 올랐다 사라지는 입김을 보며 소년도 따라서 입김을 붑니다 까칠한 소년의 볼을 만지고 가로등이 골목을 주저앉힘니다 언 손 불어가며 남매가 합창을 합니다 자주 음정이 틀려 더 알맞게 이어진 노랫가락이 엉킨 골목을 풀어줍니다 입김을 따라 굴러가는 눈덩이 소년의 키를 넘어섭니다 발자구마다 고여드는 불빛, 숨을 몰아쉬는 동생의 체온입니다 누이의 가르마를 지우고 눈덩이 속에 숨어 있는 손자국을 지우고 어둠에 몸을 부비며 쏟아지는 눈송이

모퉁이를 돌아간다 담벼락에 붙어 있는 누이가 발걸음을 잡아당긴다 어느 골목에 굴리다 만 눈덩이를 세워두었을까 더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쏟아지는 비탈길을 걸어간다
- 김성규, 너는 잘못 날아왔다, 『창비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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