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서 나고 자랐지만, 30년 교직생활 대부분 옥천에서 보내 ‘옥천’이 고향
2008년 작은 학교 방과후교육 혁신으로 대정분교 한 학급 늘리는 성과도 회자
XTM아마추어 배구동호회 회장이자, 옥천군 배구협회 부회장직도 맡아

그는 전혀 옥천과 무관했지만, 이제는 옥천이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경기도 성남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 그는 청주교대로 진학을 하는 바람에 충청북도와 인연이 닿았다.  대학 때 친하게 지냈던 옥천이 고향인 조대형(증약초 교감)씨와의 연으로 옥천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옥천 출신인 조대형씨는 괴산으로 초임지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연을 맺은 다음 옥천을 떠난 적이 없었다. 2017년 9월1일 교장으로 승진해 영동 부용초 교장으로 발령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90년 5월1일 잊지도 않은 청산초 발령, 그는 청산에서 옥천과 첫 인연을 시작했다. 4년 반 동안 청산서점 맞은 편 동아무선전파사에서 하숙을 하면서 살았다. 그 때는 교사 숙소가 지어지기 전 일이다. 팔팔 끓는 20대 청춘 교사, 그는 청산초 아이들과 참 행복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때 김점옥(옥천고등학교 행정실)씨와 사랑이 꽃피는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나무가 자라 잎새가 푸르고 꽃이 필 무렵, 94년 결혼했다. 마침 삼양초로 발령받아 옛 산림조합 밑에 이발소 안 쪽에 신접살림을 마련했다. 읍으로 나온 것이다. 가는 곳 마다 진득하게 4-5년 동안 있었다. 정이 들어 쉬이 떠날 수 없었다. 동이초등학교 재직시절에는 나이가 제일 어린 막내교사임에도 당시 연창호 교장은 분교장의 중책을 맡겨주었다. 분교와의 인연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증약초로 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대정분교장을 맡았다. 어느 덧 작은 학교 살리는 전문가가 되었던 것. 어떤 정책과 학습 지도보다 우선 관계 형성이 먼저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격의없이 친근하게 지냈고 아프고 힘들고 외로우면 언제나 기대고 편히 쉴 수 있는 언덕이 되어주었다. 아프면 병원에 직접 데려다 주고, 학습지도도 흥미롭고 재미나게 기획해 작은 학교 놀이터 같이 만들었다. 
옥천의 끄트머리 오지, 대전과의 경계에서 갈수록 학생수가 줄어드는 대정분교에서 특단의 대책을 세운 후, 학생 수가 늘어 학급이 늘어나는 ‘마법’을 발휘했다. ‘공교육 충천 퍼펙트, 사교육 주름살 제로’라는 주제 하에 방과후학교를 십분 활용하여 학부모와 학생들의 만족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자 소문을 듣고 인근 대전에서도 학생들 데리고 와 전학시켰다. 2006년 이런 소문을 듣고 CJB청주방송에서는 무려 1년 동안 다큐멘터리 ‘둥지’(분교 1년의 이야기)를 찍어 70분 영상을 완성해 방영하기도 했다. 대정분교의 봄여름가을겨울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선생님들의 열정을 다함께 담았던 것. 
영동 부용초 교장으로 재직한 지 3년 째 되는 문병칠(55) 교장의 이야기다.

 

■ 소리없이 지역 배구협회 부회장까지 중책 맡아
옥천 출신이 아니라도 그는 출향인이다. 옥천에서 벌써 30년 간 인연을 맺고 있으니 태어나고 자란 성남보다 살아온 이력이 깊다고 했다. 그를 언뜻 보면 잘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교사이다. 그의 외모를 보고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판단했다면 큰 오산이다. 얼굴 너머 친절과 배려, 그리고 꾸준한 성실함이 베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혀 색다른 교사 이외의 이력이 있다. 15년째 아마추어 배구동호회 XTM회원이자, 현재는 회장을 맡고 있고 7년째 옥천군 배구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교사 중에는 유일하다. 교사들이 학교 안에서 방과후에 배구하는 모습을 자주 봐왔어도 학교 담장 너머 주민들과 함께 배구 동호회 활동을 하는 건 극히 드물다. 
그래서 그가 배구협회 부회장을 맡아서 전국배구대회에서 축사를 하고 주변에 있을 때 조차 학교 선생님들이 왜 여기 계시냐고 물을 정도로 둘의 정체성은 일치하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문내고 다니지 않고 조용히 스며들어 번지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XTM에 가입한 것은 열등감에 기인한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교사들이 배구를 많이 해요. 그런데 실력이 없는 사람은 잘 안 끼워주더라구요. 저도 필드에서 뛰고 싶고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 어떡합니까. 침울했지요. 그러다가 문득 실력을 길러야 겠다 싶었던 거에요. 그런데 XTM아마추어 배구동호회 회원 모집한다는 펼침막을 본 거죠. 가보니 교사는 저 혼자 뿐이 없더라구요. 그래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나갔더니 회장까지 시켜주더라구요. 회장을 하다가 배구협회 부회장까지 하게 된 거에요.”
그래서 그는 옥천 출신도 아니지만, 학교 밖 옥천 인맥들이 상당히 많다. 옥천이 고향이라 느낀 지점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한동안 옥천에 쭉 살았고 지금은 집을 대전으로 옮겼지만, 옥천을 일주일에 3일은 간다. 일주일에 두번 배구 연습을 하러 한번은 그냥 지인들 만나러 간다. 여전히 대전과 영동 집과 직장을 오가지만, 확장된 옥천 생활권 반경안에서 사는 것이다. “저는 이제 옥천 사람이에요. 영동에 왔으니 옥천 출향인이네요. 옥천은 제 청장년기의 교직생활을 다 바친 곳이에요. 추억도 많고 맺은 인연도 많지요. 그런 추억과 인연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이구요. 저는 비록 성남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제 아이들의 고향도 옥천이거든요. 저도 그렇구요.”
유소년기, 청소년기의 추억도 중요하지만, 청장년기의 추억도 굉장히 중요하다. 진짜 사회생활을 하는 일련의 과정이기 떄문이다. 
“이규태 군서면장이 오래된 지역 친구고요. 깍두기 식당 정효목이도 친하구요. 이철순 체육회장님도 너무 잘 알지요. 새터 고내찬 사장이 막역한 후배에요. 그 후배가 체육학과를 나왔는데 다들 씨름이 전공인줄 아는데 원래 전공은 사격이에요. 배구하면서 체육계 일하면서 친해졌지요.”
2020년 1월17일 옥천체육센터에서 열린 ‘2020연맹회장기 전국 초등학교 배구대회 축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월이산 고리산이 마주 웃는 산수 좋고 인심 좋은 아늑한 보금자리 옥천에서 전국대회가 열리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면서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먼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향수의 고장, 묘목과 포도의 고장인 우리 옥천을 방문해 주신 각 선수단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옥천은 배구의 고장으로 월드스타 김세진 선수를 비롯한 많은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한 곳이며 그 뜻을 이어받은 후배 선수들이 많은 전국대회를 출전하며 우수한 성적을 계속해서 거두며 옥천을 빛내고 있다’ 그는 이 축사가 실린 리플릿을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 작은 학교인 대정분교를 살려내다
“제가 내색을 안 하니까 사람들은 저를 잘 몰라요. 제가 티를 내는 성격도 아니고 묵묵하게 제 일을 하는 성격이라 더 그렇죠. 배구를 그렇게 오랫동안 해왔냐고 놀라고, 많은 지역 인맥에 놀라요. 지역 체육계의 굵직한 직책을 맡은 것에 또 놀라구요. 저 옥천에서 참 재미나고 행복하게 보냈답니다.”
그는 증약초 대정분교장으로 있을 때 당시 이은자 교장(후에 교육장 역임)과 함께 대정분교의 학생 수를 늘이면서 작은 학교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 때의 계획서를 귀중한 사료처럼 갖고 있는데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떠나가는 아이들]이란 제목에 글을 보면, 분교 22명 중 13명(59.17%)가 결손가정이고, 교육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는 학부모들이 대전 인근 학교로 전출시켜 매년 학생수가 감소하고 있다고 비교적 정확한 분석을 내어놓고 있다. 
당시 이은자 교장과 문병칠 분교장은 학부모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2007년 12월23일 저녁 6시에 학부모 총회를 개최하여 방과후학교의 방향을 제시했다.
매월 한번씩 야간에 학부모 연찬회를 실시해 학부모와 정기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2008년 여름에는 피아노, 종이접기, 꼬마요리사, 바이올린, 플룻, 풍선아트, 플러스 잉글리쉬, 주산, 독서논술, 서예반, 리듬댄스, 수리탐구반, 기초학력반 등 14개 강좌를 운영하며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이외에 지역사회와 연계하여 아이들이 갈고 닦은 솜씨로 노인복지관과 부활원에서 플룻 및 바이올린 공연을 하는 등 지역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전통차문화예절교육과 생활한자 급수 자격취득, 신나는 과학체험 교실 활동을 하고 주말에도 대전엑스포와 공룡체험전 등을 보러 대전에 단체로 나가는 등 재밌는 학교로 변모했다. 13명이던 전 교생이 불과 1년 만에 20명으로 7명이 늘어나 한 학급이 느는 경사를 맞이했다. 그것은 혁신이었다. 옥천신문에도 여러차례 이미 소개되었고 전국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 한 가운데 문병칠 분교장이 있었다. 

 

■ 컴퓨터, 과학교육 명 지도 교사로 이름 날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가는 학교마다 작은 성취를 하나씩 이뤄냈다. 과학교육을 전공해 컴퓨터와 과학수업을 전담했던 그는 삼양초 재직당시 컴퓨터 프로그래밍 도 대표 3명 중 2명을 옥천에서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것도 3년 연속 서울 대회에 참여해 동상과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이런 노력으로 삼양초에서는 4년 연속 컴퓨터 지도교사상을 받았고 동이초에서도 4년 연속 과학지도 교사상을 받았다.  그 뿐만 아니다. 아이들 장학사업을 위해 가온누리 장학회 창립회원으로 지금까지도 매월 2만원씩 장학금을 적립해 지역 학생들에게 힘이 되고 있다. 
“영동은 옥천과 다른 분위기가 있어요. 더 시골 같지만, 지역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해요. 교원과 공무원들이 80% 이상 지역에 거주를 할 거에요. 대전과도 거리가 있고 하니까 영동에서 아예 눌러 사는 경우가 많아요. 지역 만기 조항을 도교육청에 만들 때 영동 교사들이 달려가서 이를 막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요. 영동에 아예 터를 잡고 살면서 가르치는데 지역 만기가 있으면 영동에 남아있을 교사들이 별로 없다고 설득해서 영동은 지역만기에서 제외시켰죠. 교사가 지역에 산다는 것은 학생 뿐만 아니라 지역 차원에서도 큰 자산이라 생각해요. 영동군수님도 생각이 확고하더라구요. 기관장들은 필히 영동으로 주민등록을 옮겨야 한다는 철학이 있어요. 그래서 저도 주소는 사택으로 옮겨놓은 상태에요.”
“아! 참 영동에는 청성면 무회리 출신 김보현 교장선생님이 구룡초에 계셔요. 전재수 기획감사실장과 친구죠. 그래서 가끔 옥천 이야기도 나누죠. 여기서 일정정도 임기를 마치면 다시 옥천으로 가고 싶긴 해요. 아직 정년이 8년 가량 남아서 두번 정도 옮겨 다닐 수 있는데 지인들이 많은 제자들이 많은 옥천에 가고 싶은게 제 마음이죠. 영동 부용초는 옥천읍내에 군남초 보다는 크고 죽향초보다는 작은 규모에요. 영동읍에서 가장 작은 학교인데요. 문화예술교육으로 내실있게 운영하려고 한답니다. 영동에서도 많은 자양분을 얻어 다시 옥천에 가고 싶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옥천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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