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제 (옥천작가회의 회원, 동이면 세산리)

5월이다. 계절의 여왕 5월은 은혜와 감사의 계절이다. 사람이 사는 이유와 원리가 공존하는 달이다. 인간사의 섭리를 하늘도 응원하듯, 처처가 장엄하고 신비로움으로 충만한 달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삶의 충만함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꽃이 피고 지는 것만으로도 화려강산이건만, 새들이 찾아와 자연의 신비를 일깨우니, 우리가 지지고 볶는 사바세계가 바로 극락(極樂) 세계가 아니고 무엇일까. 행복은 이렇게 멀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주변의 소소한 일상들 자체가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자와 맹자님의 사상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길'을 평생 견지하면서, 그 사상을 정치와 우리네 삶의 일상에 구현하고자 헌신했기에불후의 고전으로 평가되지 않나 생각된다. 고로 『논어 』의 첫 구절을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포문을 열지 않나 생각된다. 

그냥 살지 말고, 늘 배우는 자세로 임하라는 말씀이다. 날마다 새롭게 생각하면서, 배운 것 자체로 만족하지 말고, 일신(日新), 또 일신하면서, 또 다른 삶을 '창출'하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신다. 이 길이 바로 사람 '사는 이치'라고.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배움이라는 자체에 머물지 말고, 가슴속에 내장된 명안(明眼)을 마음껏 꺼내서,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또 한편으론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說乎"라고 말씀하신다. 뜻을 같이 하는 것이 벗이요, 친구다. 그 '마음의 벗'이 거리를 불문하고 찾아오면, 이보다 더한 기쁨이 있겠냐고 물으신다.

이 좋은 시절에 집사람 친구가 대전에서 자신의 친구를 데리고 왔다. 꽃 피고 세우는 '청정옥천'을 그리다, 마음먹고 왔단다. 삼겹살을 잔뜩 사 왔다. 우리네 부부지간은 막역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녀들은 속리산에서 유년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산에 나무를 해 날랐다. 남들은 속리산으로 몰려와 '도'를 닦는데, 그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생계를 이었다. 그러다 헤어졌다. 

30년 만에 드라마 같은 만남이 그녀 부군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부군은 해병대 장교로 퇴역을 하셨단다. 우리 집사람을 찾으려고 물어물어 30년을 헤맸단다. 지척이 천리라고 옥천이 천리가 된 셈이다. 이런 연유를 간직한 터라, 만남 자체가 행복이 된다. 이것이 친구의 신의가 아닐까. 

몇 달 전 내가 장룡산으로 모셨더니, 답방하고자 다시 또, 우리 집을 찾아오신 것이다. 만나면 이야깃거리는 '눈물 반, 웃음 반'으로 시작된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는 우정 속에 정은 깊어만 가고, 세월의 묵은 때는 스스로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저 삼겹살에 된장국일 뿐인데, 마냥 가슴이 설레고 좋단다. 궁색한 시골 살림살이가 부럽단다. 숨어서 사는 이의 우둔한 모습을 들킨 기분이다. 오가는 이야기 속엔 '세월의 부유물'은 끼어들 틈새가 없다. 잘 살고 못살고, 부귀와 영화의 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 되다 보니, 듣는 이나 말하는 사람의 눈동자는 꽃사슴처럼 청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진정한 친구의 품격이 아닐까.

나는 이순의 나이지만 허송세월을, 부평초 같은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이팔청춘을 나보다 서럽게 보낸 사람도 드물 것이다. 아픈 청춘이었지만, 친구가 유일한  삶의 동반자라고 믿고 살았다. 직업이 미천하다 보니 친구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도 한없이 받았다. 세상이 혼탁할수록 못난 놈이 살 방도는, 자신을 믿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내가 가는 길이 헛된 길이 아님을. 세상에 미천한 직업은 있을 수 없음을 진심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몸으로 진실을 표현하고자 묵묵하게, 한 길로 내달렸다.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살림을 꾸리고 산다. 비록 몸은 병들고 지팡이를 짚고서 보행을 하지만, 이것도 알고 보니 모두가 축복이었다. 모두가 부처님의 가피요, 세세생생 잊을 수 없는 은총이었다. 

이것을 내 친구들은 또다시 '시기와 질투'로 직시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가슴에 피멍이 든다. 말 못 할 사연이 강물처럼 깊어만 간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민낯'이다. '내가 바보야'를 한없이 열창했다. 이렇다 보니 이제는 사람 대하기가 무섭다. 진솔한 사람과 만나 교우하기가, 보석 찾기보다 힘든 세상이 돼가는 느낌이다. 친구들이 멀리하는 사람은 천만 금을 가진들 실패한 인생이다. 

나의 아호(雅號)는 '땡초 법우'다. 옥천문화원에서 서예를 배운 지가 벌써 20년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일자(一) 도 제대로 못 쓴다. 평거 김선기 선생님이 지어주신 '법우(法雨)'라는 아호가 너무 부담스러워, 내가 앞에다 '땡초'라고 붙였더니 마음이 편하다.

날라리 땡초의 철학은 늘 상 한 곳을 지향한다. 우리네 육신을 비롯한 재물과 권력, 명예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착각은 망상이다. 붙잡을수록 묘한 함정이 있다. 그것은 영원할 것 같지만, 설령, 100년을 산다 해도, 새벽이슬이요, 번개며, 찰나다. 이것을 가슴으로 직시하고 후회하는 날, 이미 기차는 저승을 향해 있다고 부처님은 간곡히 말씀하셨다. 

친구와 소통이 안 되는 삶이 온전한 일상일까? 왜, 친구가 조금 나은 생활을 즐기는 것이 배가 아플까. 묘한 세상 이치다. 친구와 이웃은 남이 아니다. 남의 행복이 나의 행복임을 자각할 때, 진정한 행복이 '오롯하게 내재되는 것 아닐까?'라는,  병신 같은 생각을 나는 자주 한다. 

세상의 법은 유위법(有爲法)이다. 이 법은 나만 잘 살면 그만이다. 말세로 유인하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석가와 예수님의 법은 무위법(無爲法)이다. 이 법은 나를 죽여서 남을 살리는 법이다.

내일 죽어도 여한은 없다. 그날까지 밤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서, 다짐을 해본다. '사람답게 살다'가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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