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은밀한 매력

1980년 레이건 노믹스와 대처리즘에서 시작한 신자유주의는 작은 국가를 지향하면서 적자생존의 사회로 프레임을 바꾸었다. 시장이 주인이 되었다. 국영기업을 기업에 팔았다. 합리화란 이름으로 노동자들은 추풍낙엽처럼 잘려 나갔다. (영화 <빌리 엘리엇>은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해직 위기에 처한 석탄 노동자의 현실을 잘 묘사했다) 그래서 ‘기생충’의 풍자와 냉소는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의 식민지가 된 지 40년이나 되었다. 노조는 와해 되고 (특히 미국의 노동조합은 전멸수준) 삼성의 무노조 경영이 뻔뻔하고 당당하게 랜드마크가 되어도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최근 무노조 경영 포기를 선언했다) 노동자지만 욕망은 50평 대형아파트급의 강남스타일이어서 국회의원은 판 검사 출신이나 몇 십 억대의 자산을 가진 성공의 모델을 뽑았다. 서민 출신의 후보들은 학력도 모자라고 궁색해 보여서 간지 나는 국회의원이 되기엔 어렵다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4년마다 반복되는 정치인의 거짓말에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욕망을 실현하는 롤 모델이기에 대통령도 개천에서 용난다는 신화를 구축한 대통령을 뽑기도 했다. 하지만 그 용은 개천을 전혀 돌보지 않고 더 가혹하게 경쟁과 욕망의 식민지를 구축했다.
켄 로치 감독은 직설 화법의 감독이다. 그는 풍자와 아이러니로 우회하거나 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가기엔 노동자들이 당면한 현실이 녹녹치 않기에 그는 꾸준히 어퍼컷을 매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흥분하지도 않는다. 적절한 편집과 카메라의 응시를 통해 적절하게 치고 빠진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해고 노동자가 실업연금을 받는 과정을 묘사한 영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선언했던 비버리지 보고서에는 빈틈이 많았다. 요람에서 무덤 사이의 빈칸에는 대처리즘의 무한경쟁이 채워졌고 무덤까지 가는 시간은 너무 가혹했다. 그래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배고픈 미혼모 케니는 무료 푸드 지원센터에서 캔을 따고 먹다가 들키고 말았다. 감독의 후속작품 <미안해요, 리키>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 리키는 부상을 당했지만 대체 인력을 구하지 않으면 해고 당하는 현실이라 가족들이 말려도 택배차를 끌고 나간다. 
미국도 한때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대학무상교육에 튼튼한 노동조합, 양성평등을 주장하고 법을 어긴 금융자본가에게 무시무시한 형벌을 내린 곳이었다. 하지만 화양연화의 시절이 시들해지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서민들의 기본조건을 제공하는 철도 의료 시스템을 팔아버리거나 시장에 맡겼다. 최근 코로나 전염병 진단금 300만원은 가짜 뉴스가 아니라 미국의 의료보험의 현실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 <식코>에는 열악한 의료보험에 시달리다 무상의료 국가인 쿠바로 가는 미국 서민이 나온다.) 결국 보다못해 오바마 대통령이 ‘오바마 케어’를 시도했지만 자본의 히어로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해서 말짱 도룩묵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물이 코로나 전염병의 무한증식이다. 최근 백인 부자(父子)가 흑인 청년을 쫓아가 총을 쏜 사건은 충격이었다. 흑인 노예에 대한 반성문을 쓰기에도 부족함에도 야만의 역사가 반복되는 건 감수성 제로의 트럼프 대통령 덕분이다. 그리고 미국의 모순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는 헐리우드 영화의 포장술 덕분이다. 미안하지만 미국은 WASP(미국의 앵글로-색슨계 백인 프로테스탄트의 약칭. 초기 이민의 자손들로서 미국 사회의 주류)의 나라다. 진짜 합중국이 되려면 시민들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촛불혁명이 필요하다. 

‘켄 로치’영화의 대부분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과 노동자 계급의 현실을 주로 다뤘다. 함께 가자는 메시지가 감독의 모든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신의 절박한 현실보다는 미혼모 케니의 안부가 더 궁금하다. 공동체에 대한 연대는 신맛 쓴맛을 경험한 이들만 가능하다. 재벌 자녀들의 비상식적인 갑질이 가능한 건 무균질의 유리집에서 곱게 자란 환경 때문이다. 그들을 보호하는 높은 담장이 남들과 더불어 사는 걸 막았다. 다큐 <다음 침공은 어디?>에 나오는 핀란드의 학교 평준화 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계급의 장벽을 허무는 건강한 시스템이다. (최근 충북도에서 명문학교 지원책 마련을 한다고 한다. 아직도 학생들 의사와 상관없이 대상화 되고 있는 현실이 슬프다. 학생들은 명문학교를 만드는 도구가 아니다. )
‘핀란드는 학교를 세워 수업료를 받는 게 불법이다. 그래서 사립학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잘사는 부모들은 당연히 공립학교의 질을 높이는 데 힘쓰게 되고 잘 사는 집 아이들은 일반학교를 다니며 다른 아이들과 모두 친구로 자란다. 그러니 어른이 돼서도 서민들을 엿 먹이는 짓은 망설이게 된다.’-<다음 침공은 어디> ‘핀란드’편 나레이션
켄 로치 감독처럼 인파이터 복서로 살기는 쉽지 않다. 바깥에서 살짝 잽을 날리며 치고 빠지는 아웃 파이터 복서가 가장 현실적인 처세다. 한때 존재했던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는 인파이터의 기혹한 현실을 증명하는 알리바이다. 
영화의 후반부 다니엘 블레이크가 관공서의 벽에 스프레이로 자신의 이름을 쓴다. 이 장면은 효율성과 시스템의 메커니즘이 존재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계급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든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고처럼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당당하게 함께 가자는 메시지로 들린다.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시스템의 모순을 위해 싸웠던 이들의 이름을 대신해서 더듬 더듬  써 본다
 나 는 김 용 희 다.
 나 는 변 희 수 다.
 나 는 서 지 현 이 다.
 나 는 이 재 학 이 다.

오아시스(가화리/상생시네마클럽 
시네마큐레이터) 
piung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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