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리 박인순 1939년생
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49)

박인순 어르신의 뜰, 텃밭 고랑이 반듯 반듯 나란히 줄도 잘 맞췄다. 어르신의 성정이 보였다. 감자를 심으셨단다. 분명 자식들 나눠 주실 건데 되레 한 소리 들으면서 주실 게 뻔하다. 사먹으면 되는데 사서 고생한다고. 그게 애미 마음이다. 돈 주고 사먹으면 편한 걸 누가 모를까. 내 손으로 밭 매고 물 줘서 키운 감자 한 박스씩 들려 보내는 게 한 해 가장 기쁜 일이다. 마루에 오르실 때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탓하며 아이구! 작은 신음소리를 내셨다. 마음이 아리다.

■ 옛날 생각하면 인생 헛일인가 싶다

능월리 마장이 고향이다. 1939년생, 이제 다리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마당을 지키는 전동차가 마실 다닐 때 든든한 기사노릇을 제법 한다. 

"어릴 때는 7남매로 자랐지만 다 죽고 이제 스이 남았어. 먼저 간 동생들 생각 날 때는 인생이 헛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 영감 고생만 하다가 살만하니 환갑 때 멀리 떠나던 날도 인생이 헛일 같더라고" 

장야리사는 여동생이 알타리를 먹음직스럽게 버무려 작은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고 갔다. 격식 없이 대문 열고 불쑥 언니!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사람 사는 집 같고 그날은 왠지 모르게 기운난다. 하물며 우리 새끼들이 다녀가는 날은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고추밭의 지렛대처럼 기댈 수 있는 힘이다. 하늘하늘 마른 대가 한 여름 뙤약볕에서 고추밭을 지켜주니 녀석의 힘이 크다. 나이 들어 기운 없는 나에게 자식들이 고추밭의 지렛대보다 더 든든하다. 암만!

친정은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셔서 백운리로 시집오기 전까지 나는 살림하고 새참 날라다주면서 스물다섯 해를 보냈다. 

가장 희미한 기억의 끈은 1945년 해방 됐을 때 일곱 살이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원암 장에 시장 보러 갔다. 시장 가까이 갔을 때 만세만세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떼 지어 다니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어머니 손을 놓칠세라 손을 꽉 잡았던 어린 나를 기억한다. 

"6.25때 열두 살이었지. 저녁에 소개령이 내려 마을 이장이 피난 가라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밤에 보따리 챙기고 동생 하나는 들쳐 업고 하나는 걸리고 냅다 뛰었어. 산에서 총을 쏘아 대는데 그 소리가 머리 뒤 꼭지 바로 뒤에서 들리는 거 같았어. 얼마나 무서운지 혼은 다 나가고 다리가 후들거렸지.

겁에 질려서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잰 걸음 걷던 인순이가 어느새 팔순 넘긴 할미가 됐다.

고생하면서 자랐지만 마음의 위로를 받았던 성당 자매들이 그 시절 좋은 친구들이었다.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이 야학을 가르치고 글자를 배우면서 동네 꼬마들이 벽돌 하나씩 쌓아서 예배당을 만들기도 했다. 낮에는 집안일도 돕고 밤에 졸린 눈 비벼가며 매일 그렇게 작은 손을 보탰다. 힘은 들었지만 폐허 속에서 뭔가를 일궈간다는 성취감이 우리를 기운 나게 했다. 물론 우리는 어려서 그 뿌듯함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성장했다. 

내 세례명은 수산나, 외국인 신부님인 변 신부님께 영세를 받았다. 아마도 귀화해서 우리나라 성씨로 변 신부님이 되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초등학교 다니다가 난리 나서 학교를 그만 다녔으니 성당은 시골 여자아이들이 세상을 배우는 유일한 통로였다. 사람들이 오가고 유익한 말씀을 듣는 자리가 그 시절의 우리에게는 없었다.  

어르신 댁 벽 '갈잎피리' 유년시절 학교를 다니지 못한 어르신은 운동회 날이면 속앓이를 하셨다. 갈잎피리는 1930년대 운동회에 날에 연주되었던 동요였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에 흠집 내지 않고 꿋꿋하게 살았다.

■ 고단했지만 인정을 잃지 않았다

그나마 야학을 다니면서 글자를 깨우치고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고 순응하면서 살았던 거다. 맏딸이라 집안 일 거드는 데는 우선이고 동생들 챙기느라 내 몫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생 없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는 살림하느라 동생을 걸려서 학교에 데리고 가곤 했다. 창피한 마음을 그 때 쯤 맛보았다. 결국 그런 등굣길이 오래 갈 리 만무하고 그렇게 동생한테 투정 부렸는데 막내가 먼저 죽고 나니 눈앞이 깜깜하고 죄책감에 한동안 마음 둘 데가 없었다. 그 시절 맏이들이 미련하게 살아내는 방법이었다. 

"봄 가을 운동회 때는 내 작은 가슴이 속앓이를 했어. 친구들 몰래 한숨도 많이 쉬었지. 나는 동생들 업고 살림하느라 학교를 끝까지 못 다녔잖아. 그래서 운동회 하러 가는 친구들이 왜 그렇게 부러웠는지 몰라. 그게 뭐라고. 속을 끓였어"

스물다섯 살에 시집와서 백운리 댁이 되었다. 우리 영감님도 그때 서른이 넘어서 둘 다 노총각 노처녀였다. 백운리로 시집와 지금 집터에서 시부모님 모시고 초라한 시작을 했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방문을 닫아도 손이 하나는 쑥쑥 들어갔다. 문짝 안 맞는 건 예사라 겨울 되면 웃풍이 세서 감기를 달고 살았다. 

먹고 사느라 안하는 거 없이 일하러 다녔다. 칡 거지도 해보았는데 그 요령은 없어서 남들은 칡 거지해서 송아지 샀다는데 우리 집은 영 벌이가 시원찮았다. 남편은 젊은 시절 청산 술도가에 다녔다. 지금 보건소 자리에 술도가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농사가 주류를 이뤘지만 남편은 술도가 일을 했다. 막걸리를 인근에 배달했는데 배달일이 고단한 일이라 목수 일을 하게 되었다. 일머리가 좋은 양반이라 하나 배워 두 개를 만들었다. 대목일 하면서 돈 좀 벌어 환갑 지나 허리 좀 펼까 했더니 그만 그 때 가고 말았다. 겨우 환갑 넘기고 가려고 그렇게 애를 태우며 살았나 싶으니 허망했다. 남편 가는 거 보면서 또 인생이 헛일이구나 싶었다.

나도 살림에 보태려고 아스팔트 까는 일도 해보았다. 일당이 3천원이라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 일도 소위 뒤 백 있어야 일자리가 주어졌다. 도시락 싸서 보은까지 다니기를 수개월을 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피곤에 지쳐도 아이들 학교 가는 뒤통수만 보면 기운이 났다. 

그래도 고단할 때 둘러앉아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던 이웃들이 있었다. 산옥이 엄마 계숙이 엄마. 남편들이 동네 친구라 우리도 60년 가까이 벗이 되어 서로 나이 들어가며 위로하고 있다. 성당의 교우로 이웃 할매로 질긴 인연이다. 그니들이 위로가 된다.

지금 집터에서 시집살이 시작하고 오두막살이였지만 남편 보내고 아이들이 손을 보태 아늑한 집으로 다시 만들었다. 텃밭도 일궈 아이들 감자도 주고 명절이면 다 모여도 옹기종기 앉으면 불편하지 않다. 우리 아이들 4남매도 이 집이 키웠다.  

성권이 윤경이 윤미 우리 쫑말이 성국이. 배부르게 먹이지 못하고 키운 게 미안하지만 다들 사는 게 그만그만 할 때라 니집 내집 다를 바가 없었다. 아들은 든든한 맛에 딸들은 살가운 맛에 위로가 된다. 명절이면 방 한 가득 들어찬 아이들을 보면 밥 안 먹도 배부르다.

큰딸이 엄마살림 많이 도와주고 학교 다니면서 동생들 밥해주느라 고생이 많았다. 내가 그렇게 살았듯이 우리 윤경이도 맏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노년의 친구들, 마을의 형님 동생들과 즐거운 한 때.

 

■ 이만 하면 됐지. 내 인생이 헛일은 아니었나봐

가끔 꿈에 어머니가 보이면 우리 고향 마장 문수암 입구에 흐드러졌던 벚꽃이 생각난다. 바람 불면 꽃잎이 하얀 나비 떼가 되어 십리는 날아갔다. 지금 아이들처럼 사진을 찍어대지 못했지만 눈에 마음에 새겨둔 정경이 아직도 선한거 보니 가슴으로 찍는 사진기가 최고인 건 틀림없다. 70년 동안 눈에 선하게 남는 고향 마을의 정경,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마음으로 그려만 봐도 락(樂)이 없는 우리를 위로한다.

"우리가 고생하며 살았어도 말년에는 편안들 하잖아.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어디 그랬나
평생 고생하고 인생이 헛일이다 생각하면서 가셨지. 그때만 해도 우리 부모님들 춥고 배고파서 뜨신 옷 한 벌을 못 입었던 분들이야. 거기 비하면 우리 고생은 고생도 아냐 양반이지 암만"

몸이 성할 때는 명절이면 만두 수백 개씩 빚어서 아이들 가는 손에 보따리 보따리 들려 보냈다. 마음 같아선 다 해주고 싶지만 이제는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텃밭에서 재미삼아 감자를 키워 보내지만 사서 고생하다고 되레 잔소리 듣는다. 그래도 농사 지어 보내줄 새끼들이 나에게 큰 위안이다. 

이제 다들 혼자서 집을 지키는, 새댁 시절 우리 친구들이 그저 건강해서 인기척 안하고 불쑥 들어가도 허물없는 그니들과 위로하며 나이 들고 싶다. 

여든이 넘은 우리들, 큰 애기 시절에는 형제들한테 내 몫 주고 가정을 꾸린 후에는 남편에게 또 아이들에게 다 내주었다. 우리 몫을 가져보지 못한 우리 할매들. 
이제 다 내주었으니 마음만은 죄다 주워 담아 가슴 한 편의 쓴 뿌리위에 수북이 쌓아야겠다.  
인생이 헛일이 아니었다고 잘 살았다고 다독여 주는 한마디가 이렇게 달콤하다.
그래 인생이 헛일이 아니었다.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받았습니다.

 

자녀 편지 

어머니. 

한동안 집에만 계시느라 답답하셨죠? 이제 조심하면서 살짝살짝 마실도 다니셔요.
저희 걱정은 마시고요.

저희 준다고 텃밭에 감자 심어 애쓰시는 것 보면 어머니 고생만 시키는 거 같아 죄송해요.

다리 불편한 어머니 곁에서 모시고 싶지만 마음뿐이라 또 죄송해요.

아버지 떠나시고 홀로 저희들 챙겨주신 어머니 마음 아프고 고맙습니다.

마음은 항상 있지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씀도 못 드렸어요.

이제는 어머니 건강만 챙기셔요. 그저 어머니 생각만 하세요.

어머니. 오래오래 저희 곁에 계셔주세요. 

성권 윤경 윤미 성국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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