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다섯번 이사 후 4월28일 첫 개업식, 자연 그대로의 떡
화학색소 안 넣고 직접 농사지은 재료로 만든 민수경 목사표 자연떡
17년 전 창대교회 만들고, 10년전 창대방앗간 만들어 마을기업으로

떡과 만난 것은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떡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사람, 그리고 교회를 다니기만 했지, 교회를 직접 운영하는 목사가 될 줄은 꿈애도 몰랐던 사람. 그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연스레 물과 같이 흘렀던 삶의 주인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성경구절은 많이 이용되지만, 그 문장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간과하고 잊어버리는 앞문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도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지 않고서는 결코 ‘창대’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주문처럼 외우고 있었다. 정말 시작은 볼품없었다. 의미와 가치는 창대했으나 실속은 바닥이었다. 30만원짜리 중고 떡기계 하나 들여놓고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떡공장이었다. 말만 방앗간이지, 함께 살고자 했던 노숙자, 장애인들을 위한 끼니를 마련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오죽했으면 싸래기 40킬로그램과 쌀 40킬로그램을 배합해 밥을 만들어 제공했을까. ‘봉사’와 ‘기도’라는 마음 두 단어를 가슴에 새기고서 기나긴 고행의 길에 들어섰지만, 모든게 쉽지 않았다. 돈은 어디서 샘솟는게 아니었으며 화수분을 갖고 있는게 아니었다. 그래서 줄이고 줄이면서 마음을 나눴다. 
벌써 떡방앗간을 연지는 10년이 넘었지만, 이사를 다섯번이나 하면서도 제대로 된 개업식을 하지 못한 창대방앗간이, 지난 4월28일 옥천읍 양수리 새보금자리에서 개업식을 가졌다. 조금 더 깔끔하고 조금 더 넓어진 공간에서 이제는 떡카페까지 꿈꾸면서 창대방앗간을 열었다. 창대방앗간은 옥천의 대표적인 초창기 마을기업으로 축제장마다 사람이 모여드는 곳마다 부스를 마련하고 떡 판매를 하며 지역에 알만한 사람은 안다. 발품을 많이 팔다보니 절로 홍보가 되었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정성스레 만든 떡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어떻게 목사가 되었고 목사가 떡방앗간을 운영하게 되었는지 참 재미나고 뭉클한 사연이 있다. 

민수경(62, 옥천읍 대천리) 목사는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가 고향이다. 영동의 박세복 군수가 고향 친구, 옥천군 새마을협의회 강정옥 회장과 퇴직공무원 진유환씨가 고향 3년 선배라고. 그는 금오초등학교와 심천중학교, 영동여고를 졸업하고 결혼해 대전에서 살았다. 중장비를 하는 남편과 함께 옥천교회도 가끔 다니다보니 정영기 장로를 알게되었는데 그런 인연으로 옥천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30살 즈음, 그는 일생일대 가장 큰 사건이 일어난다. 친정에 가려고 오토바이를 타고 이원면 건진리를 지나던 무렵에 자동차 뺑소니를 당한 것이다. 뇌를 다쳐서 살 가능성이 5%도 안 된다고 했다. 뺑소니는 우여곡절 끝에 잡긴 했지만, 다친 뇌로 인해 8월부터 12월까지 무려 4개월 남짓 병원 생활을 했다. 그 때 기도를 간절하게 했다. ‘제발 낫게 해주면 목사가 되어 적극적인 목회활동을 하겠다고’ 그런 기도가 들렸는지 그는 살아났다. 하지만, 깨어나서 목사를 하려고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어려운 노인들을 도와줘야 겠다는 마음으로 타협을 하고, 동이면 인근 곳곳을 돌면서 재가노인요양을 무료로 했다. 대소변 제대로 보지 못하는 노인들을 물어물어 찾아다니며 댓가없는 봉사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동양로원인 셈이다. 이런 봉사활동을 하던 중에 어린 조카가 갑작스런 사고로 죽었다. 그 때 약속을 안 지켜서 이런 사고가 생기는 구나라고 느끼고 그는 당초 약속대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열심히 공부를 해 장로교회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 대천리 대골에서 조그만 창대교회를 만들었다. 26살이던 85년에 옥천에 왔고, 43살 부터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교회가 만들어지면서 어렵게 살고 있던 노인들과 장애인들을 모시고 섬겼다. 이들을 제대로 원없이 떡을 먹게 하기 위해 2010년 영실애육원 인근 허름한 건물에서 떡방앗간을 창업한 것이다. 2011년 마을기업에 선정되었고 2012년에는 우수마을기업으로 선정되는 영광까지 안았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하자는 것이 초심이었다. 우선 건강한 떡을 정직하게 만들고 싶었다. 식용본드나 화학색소, 방부제 등은 일체 쓰지 않는다가 철칙이다. 자연스러운 떡을 그대로 만들고 싶어서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한다. 쑥과 콩, 단호박, 고구마 등 떡에 직접 들어가는 재료들은 손수 농사를 짓는다. 떡에 들어가는 재료의 단가를 생각하면 턱없이 떡 가격은 비싸지지만 그는 가격을 일반 판매가에 맞추었다. 손해보는 장사를 감수하는 것. 떡값을 올리자니 어려운 사람들이 먹지 못하고, 수입농산물과 첨가물을 쓰자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못 하겠다는 딜레마에서 그는 차라리 본인이 손해보는 장사를 하기로 결심한 것. 대신 직접 농사짓는 것에 대해서는 단가를 책정하지 않으면서 떡방앗간을 간신히 운영해 간다. 로컬푸드 직매장에도 부지런히 납품을 하고, 얼마전 동이면 금암리 유채꽃 행사장에도 천막을 쳐 떡을 팔았다. 감각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곳에는 자리를 잡아 쑥 인절미, 단호박, 인삼 인절미, 수수부꾸미 등까지 다양한 떡을 판매하며 매출을 올리고 있다. 가만히 기다리면 사람이 와주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알고 있기에 그는 바지런히 움직인다. 
“한번은 일 도와주는 우리 딸 예은이가 서울 암사동에서 예쁘고 맛있는 떡을 판다고 해서 가져왔어요. 하지만 못 먹겠더라구요. 모양은 예쁘고 포장도 기가 막힌데 첨가물이 그득해서 입안을 버려놓았어요. 그런 거짓 떡은 제 양심상 만들지 못하겠더라구요. 손해를 보더라도 초심을 지키자. 주민들에게 자연 그대로의 떡을 팔자는 그 마음 하나만은 창대방앗간이 지키고 싶은 겁니다.”
평일에는 새벽 4시부터 출근해 6명의 교대 노동자들과 같이 떡을 만들고, 일요일에는 목사로 변신해 창대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한다. 신자는 2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교회지만 찾아오는 어려운 이들은 항상 섬기고 있다. 
“앞으로 가야할 길, 해야할 일이 많아요. 우선 첫번째로 일부 공간을 떡카페로 리모델링해 같이 운영하고 싶구요. 중장기적으로 떡 공장을 만들어 일자리 창출도 하면서 옥천떡을 제대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는 마냥 떡을 만든게 아니었다. 한국음식문화협회 전북도 이사장을 맡으면서 떡과 전에 일가견이 있는 유유순씨에게 2년 동안 직접 사사받았다. 2년동안 매주 금요일엔 떡, 토요일엔 전을 배우면서 떡과 전을 만드는 법을 터득했다. 
“창대방앗간 떡은 자연 그대로 입니다. 직접 농사지은 자색고구마와 단호박, 쑥을 가루로 만들어 색과 맛을 냅니다. 향과 맛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쑥, 단호박, 인삼 인절미, 쑥 가래떡, 쑥 절편, 쑥 버무리, 수수부꾸미 등 창대방앗간표 떡을 한번 맛보시면 이 떡만 찾게 될 거에요. 오셔서 한번 드셔보셔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진짜 개업식을 하면서 제대로 일어선 창대방앗간, 10년의 여정이 결코 작지 않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이 창대할 수 있도록 오늘도 열심히 떡을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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