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털웃음으로 화답하는 90년의 추억
너털웃음으로 화답하는 90년의 추억
  • 추억의 뜰 김경희 작가
  • 승인 2020.04.08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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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48)
청산면 백운리 최창호 어르신 1931년

"어르신, 햇볕이 너무 좋지요?"

"그려. 따뜻하니 좋아 " 

백운리 마을 정자에 나란히 앉은 두 분 어르신.

최가와 박가라고 하신 두 분이 마을에서 제일 형님들 이셨다.

그 마을에서 나고 자라 90년 동안 마을을 떠나지 않으신 터줏대감이다.

너털웃음 속에 나무 한 짐 하느라 도덕봉까지 올라 다녔던 이야기가 담겼다.

마음의 서랍 속에 꽁꽁 숨겨 두셨던 얘기들, 한 칸은 서글픈 이야기 그 밑에 칸은 그래도 살만하던 이야기, 서랍을 다 꺼내고 한 마디 툭 던지셨다.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번민에서 벗어난 어르신의 너털웃음에 90년의 회억이 채워져 있었다.

최창호 어르신

■ 가난, 생이별- 왜정시대의 부산물  

그 길을 오늘도 다녀왔다. 만원리재 밑까지 매일 아침마다 산보를 다녀온다. 아직 거동할 만하다. 백운리에서 90년, 이 마을이 지나온 역사를 나는 알고 있다.

1931년생 우리나이로 구십이다. 마을 입구 정자에서 나는 박가와 둘이 놀고 있다. 

마을의 최고령자이기도 하고 유년부터 형님 아우님 그리고 동무로 지냈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 지나는 사람 달리는 차를 보면서 소일을 한다. 우리 둘은 말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한 동네에서 90년, 우리는 네 집 내 집을 훤히 잘 알고 대화를 나누기엔 박가의 귀가 어두워졌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그 시간에 만나 적당한 때에 정자에서 퇴청을 한다. 몸으로 익힌 시간이 손목시계만큼 정확하다. 

우리 집은 아버지까지 4대독자였는데 왜정시대 사는 형편이 어려워 우리 이름의 집이 없었다. 빈 집 있으면 6남매가 보따리 들고 같이 이사하기를 여러 번 후에 우리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는 부모가 물려주는 대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여건에서 나도 유년의 기억은 가난했다. 우리 세대는 가난이라는 대물림을 유업처럼 받아들였다.

맨 위의 형은 왜정 때 보급대에 끌려갔다가 사할린까지 가게 되었다. 1945년 해방되고도 형님은 고향에 나오지 못했다. 형님의 소식은 보급대에 같이 갔던 안남 사람이 고향에 돌아오면서 형님사진과 소식을 들고 나왔다. 먼 이국땅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사진 속의 형님을 보며 생이별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의 해체는 기본이고 쓰라린 아픔은 힘없는 민초들이 겪어야 하는 부산물이었다. 

1940년 학교는 왜정 때 4학년까지 공부시켜주는 학당에 다녔다. 백운리 동가라고 불렀던 학당에 다니면서 일본말을 배웠다. 찬 바닥에 앉아 글을 배우면 얼마나 배웠을까 만은 게으름 피우지 않고 학당에 다녔던 건 한자라도 배우고 싶은 마음의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가정 형편상 학업을 계속 할 수 없어 남의 땅 소작부터 시작했다. 농사일을 도우면서 청년으로 접어들었고 군대에 가게 되었다. 둘째 형님이 경비대에 근무 중이었는데 6.25 나면서 특무상사가 됐다. 경기 사령부 소속 후방부대였다. 나도 고향에 있다가 어디로 붙들려 갈지 몰라서 형님한테 가는 것이 맞는 처신이었다. 형님이 특무상사라 당시에는 끗발 있었다. 경기 부대에서 운전병으로 차 고치는 일부터 배우다가 제대 무렵에 수송부에서 차를 몰면서 중대장을 출퇴근 시켰다. 그 때는 부대에서 운전면허증을 줬지만 사회에서는 휴지조각이었다. 제대 후에도 농사를 지으며 삶의 방도를 찾아갔다. 지금 정자 자리도 아무개집의 논이었고 백운천 길 건너까지 다 논이었다. 우리도 인정리에 논이 조금 있었다. 

농사짓던 시골 청년인 내가 25살, 우리 마나님이 20살 때 결혼을 했다. 아내의 이름은 이정녀. 청산면 삼방리에서 시집왔다. 삼방리에 우리 최씨가 많이 살아서 최씨 집안에서 중신을 했다. 연지 곤지 찍고 시집왔던 그 날의 아내는 정녀가 아니라 선녀가 따로 없었다. 그 시절이야 신랑감이 좋으니 신부감이 싫으니 선택도 할 수 없었지만 아내는 너무 예뻤고 지금의 아내도 마을에서 제일 곱다. 게다가 이 나이에 아내와 해로할 수 있다는 것도 복중의 복이다.

지금도 고운 아내 이정녀, 평생 감사한 사람이다.
전국노래자랑에서 받은 시계('대머리 총각'으로 동네 가수 소리 듣고 있다)

■ 고단했던 인생의 터널들 

목단 꽃처럼 예뻐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아내는 시집오자마자 없는 살림에 시아버지 시동생 챙기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군말 없이 집안을 돌보던 아내에게 나는 마음의 빚을 지면서 신혼을 보냈다. 아직도 못 갚은 평생의 빚이다. 내가 아내에게 빚을 갚는 방법은 열심히 사는 것 그게 전부였다. 물려받은 땅이 없으니 남의 논 소작농을 하다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살림이 나아질 기미가 안보이자 직업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다. 맨 몸으로 달려들 수 있는 나무 장사를 시작했다. 도덕봉을 낑낑거리며 올라도 민둥산이 많아서 덕의봉까지 또 산을 넘었다. 가시에 찔려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지만 그 정도로 앓는 소리 내기에는 시절이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나무 한 짐 하고 내려오는 길은 인생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워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무 장사는 힘이 들어 고단했지만 땔감으로 나무를 쓸 때라 먹고 사는 건 해결할 수 있었다. 재미 좀 붙일만하니 어허 세상이 변했다. 갑자기 새카만 탄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삶의 방도를 또 찾아 나섰다. 애들은 쑥쑥 자라고 여기저기 돈 될 만한 것들을 찾았다. 

30대에 나무장사하면서 헉헉 거리며 지게에 나무를 짊어지고 단단히 묶어서 지금 면사무소 자리에 난전을 펼쳤다. 손님들이 한 짐씩 둘러매고 갈 때 고단함을 잊었는데 탄이 나왔을 때의 허망함은 달래기가 쉽지 않았다. 인생의 방향은 우리가 정할 수 없다. 거대한 흐름에 우리는 그저 휩쓸려 다니며 자구책을 마련하느라 애를 쓰고 애간장을 태웠다. 그래서 옛날 말에 억울하면 배우고 돈 벌어라 했나 보다.

백운리도 당시에는 다 초가지붕이었다. 초가지붕을 걷어서 스레트 지붕을 얹기 시작할 때 한 친구가 "창호, 우리 스레트 지붕 일 한번 해보자"

맨 주먹으로 세상과 맞서야 하는 우리들 형편에 일감이 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마끼자루 하나 사서 현장으로 나갔다. 낯선 공사 현장은 지게 짊어지고 깊은 숲길을 찾아들어가던 그때 보다 더 험지였다. 손이 성할 날이 없이 열심히 하면서 익숙해지고 요령도 생겼다. 기술이 늘고 수완도 좋아지면서 한 집 두 집 우리 지붕 좀 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해주고 조수를 데리고 다니며 기술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동네 가서 한집 하면 소개가 나와 한 달을 하다 보니 돈이 모였다. 돈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소를 사게 됐다. 소는 당시 큰 재산 이었지만 혼자서 처음 소를 사기엔 벅차서 이웃과 같이 사서 키웠다. 소를 한 마리 사고 두 마리 사면서 새끼 낳으면 둘이 나눠 쓰고 그렇게 한 집 두 집 밭이 하나 씩 생겨났다. 소를 샀던 날의 감격은 자존심을 회복할 만큼 흥분되었다.

마을 주민들과 (중앙 하얀 상의)
내 마음의 고향 백운리 마을 정경 

■ 백운리 터줏대감, 평짓마 샘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4남매를 뒀다. 딸 둘 아들 둘, 인규 인철 금숙이 인숙이. 아들이 동네에 살면서 우리 부부를 챙겨준다. 든든하다. 소는 50대까지 하고 목수일 할 때 스레트 지붕 고치다가 미장도 같이 겸하게 됐다. 어깨너머 미장일을 가만 가만 들여다보니 내가 해도 할 일이라 미장도 혼자 했다. 일머리가 좋고 눈썰미가 있어서 나중에는 보일러까지 봐주게 됐다. 지붕부터 시작해 일들이 늘고 손에 익으면서 집 한 채를 짓는 기술자가 되었다. 묵묵히 열심히 살았다. 꾀를 부리지 않았다. 60넘어서는 일에서 손을 놓았다. 해뜨기전이 가장 어둡다고 소를 사기전이 가장 힘들었다.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돈이 모이지 않을 때가 있다. 아이들 키우고 건사하면서 돈 버는 게 표도 안 나던 그 시절이 가장 고단했다. 맨바닥에서 땅뙈기 하나 없이 시작했는데 이만하면 부자다. 

90이 넘은 나에게도 그리움이 있다. 종종 꿈에 나타나는 어머니는 내 유년시절 젊었던 모습의 어머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는 84살까지 장수하셨다. 어머니의 한을 풀었다. 어머니는 자상하셨고 된장찌개 한 그릇이라도 구수하게 끓여주셔서 지금도 그 맛을 기억한다. 그런데 어머니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머니는 이씨 성을 가졌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무수한 세월은 어머니 이름도 바로 떠올리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그 시절을 살았던 어머니와 아내에게는 샘에 물 길러 다니는 것도 몸으로 맞는 큰 고단함 이었다. 

옛날에는 가정집에 샘이 없어서 물을 길러 다녔으니 어깨에 짊어지고 머리에 이고 무거운 건 둘째 치고 이고 가다 물벼락을 맞기도 일쑤였다. 여인들의 애환이 서린 샘, 이장님이 그 샘을 팠다. 평짓마 샘, 물고기가 살 수 있을 만큼 깨끗한 샘, 옛 정취를 고스란히 살려 두레박으로 퍼 올리고 족욕장도 갖췄다. 마을의 명소가 되었다. 오가면서 프랭카드를 보면 우리동네에 돈을 몇 억 씩 준다고 전봇대 양쪽을 꽉 잡고 늘어서 있다. 그래서 마을이 구경꾼들이 올만큼 좋아졌나보다. 어려운 시절에 태어났지만 90년이 지나는 동안 좋은 시절 구경도 하고 가게 되는 행운아다. 동네가 궁궐처럼 변했다. 내가 산증인이다.

나는 동네에서 가수대접을 받았다. 전국 노래자랑에 나가 '대머리 총각' '일편단심 민들레'를 불러 방송국에도 가고 음성 영동 전국으로 다녔다. 장계 유원지 노래자랑에서 트로피도 받아왔다. 나이 들어 큰 즐거움 이었다. 손목에 찬 전국노래자랑 시계가 증표가 되었다. 90년이 지나고 보니 한달음이었다. 이제 지난 세월에 너털웃음으로 응수하면서 '그려' '암만' 두 마디면 어지간한 질문의 화답이 된다. 좋다는 말이다. 백운리 터줏대감, 지난날의 아픔은 평짓마 샘에 유유히 흘려보내고 좋은 추억만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다. 찰랑찰랑한 샘은 어머니 품, 고운 아내의 스무 살이 담긴 마음의 고향이다. 평짓마 샘에 담긴 뜻대로 '살기 좋은 땅,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곳' 내 고향 백운리를 일컫는 말이다. 오늘은 정자에 앉아 등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깜박 졸음이 온다면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 내 깊은 마음의 고향 백운리와 어머니. 오늘따라 봄볕이 더 따사롭다. 

평짓마 샘, 우리 마을의 보물이다.

 

아버님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들은 복 많은 자식들입니다.

구십 세 되신 아버님, 여든 다섯의 어머님이 같이 해로하고 계시는 것만도 너무 감사합니다.

두 분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걱정이 많지만 아버님이 정자에 걸어 나오셔서 앉아 계신 것만도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따뜻한 봄을 오래오래 맞이하시기를 소망하면서 아버지께서 불러주시는 '대머리 총각' 도 종종 듣고 싶습니다.

저희 곁에 오래오래 계셔 주세요.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 4남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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