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회 (옥천작가회의)
<자기앞의 생>은 프랑스 소설이다. 작가는 '에밀 아자르'인데 실제는 '로맹가리'라고 한다. 사실은 둘 다 아는 게 별로 없다. 도서관에 가서 외국책을 고를 때 '로맹가리' 책이 몇 권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유명한 사람인가? 생각한 적은 있으나 실제로 읽어 본 적은 없다. 콩쿠르 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는 로맹가리. 이 책은 자신을 숨기고 필명 '에밀아자르' 라고 해서 발표한 책이다.
프랑스에 살던 아랍인 소년이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일기처럼 써 내려간 소설인데 이 어린아이의 이야기는 너무 철학적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할 생각들을 이 어린 꼬마가 계속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물론 소설가는 어른이다. 어린이의 입을 빌려 이야기 하고 있다.
거듭나오는 말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 소설을 읽어보면 나온다. 결국 '사람은 사랑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모하메드 그냥 모모라고 하는 아이. 로자라는 여인에게 맡겨진 아이. 고아이다.
70년대 고등학교 다닐 때 모모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그때 '미카엘 엔테' 소설 <모모>가 그 노래와 관련된 것인 줄 알고 읽었다. '모모는 방랑자~' 그런가 보다 했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그 모모가 아닌 이 책에 나오는 모하메드 모모가 노래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았다.
한 번 읽고 내용이 좋아서 다시 읽었다. 책을 이것저것 두루 읽어보면 웬만해서 감동도 없는데 이 책은 대단원 부분에서 몇 번을 거슬러 올라가 읽었다. 1970년대 프랑스 사회를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주위의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사는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배경이 되는 '벨빌'이라는 곳은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이다. 아프리카인 아랍인 유태인 등 국적이 없거나 요즘 말로 하면 불법 체류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화려한 도시에 감추어진 뒷골목쯤 되겠다. 여자는 대개 창녀이고 남자들도 번듯한 사람보다는 못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의사나 주위의 사람들은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다.
모모를 키워준 로자가 점점 늙어가고 죽는 이야기를 시니컬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병원에 가서 연명치료를 하고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삶을 두려워하는 로자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은 모모다. 모모는 열 살에서 갑자기 열네 살이 되기도 한다. 죽었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찾아와서 밝혀지는 일이다. 아버지는 모모 앞에서 갑자기 쓰러져 죽고 만다. 그런 아버지를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는 모모.
이런 어둡고 슬픈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서술하는 모모는 이미 철학자가 되어 있다. 어린 나이에 담배를 피웠다는 내용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그 당시는 담배 피는 행위가 그렇게 흉이 되지 않는 시절이었던 것 같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면 맛있게 담배 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이렇게 소설은 그 당시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점이 있다.
병원에서 오랜 시간 머물다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지금은 요양병원이라는 것이 생겨서 노인 대부분의 죽음이 헐값으로 넘어간다. 가족들은 돈을 내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기 벅차고, 병원은 긴 시간 모든 장치를 동원하여 살아남게 만든다. 끔찍한 일이지만 그런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진작에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그때만 해도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근엄한 죽음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다. 이 책을 읽어보면 프랑스에서는 벌써 70년대부터 그런 제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꼬마 철학자가 삶에 임하는 태도는 본받을 만하다. 지나치게 슬프지도 억울하지도 않다. 그냥 받아들인다. 가볍게 받아들이고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 점이 참 좋다. 나도 그래야겠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 와도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생이 다 가볍다. 실제로는 무거울 수도 있지만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해가 뜨고 달이 뜨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툭툭 쳐내는 삶의 태도는 부럽고도 당당하다.
우리나라의 정서처럼 울고불고 한이 맺히고 억울하지 않으니 아무리 힘든 상황이 와도 괜찮다. 모모는 대단한 정신의 소유자다. 원제목은 '남아있는 나날' 이라고 하니 번역한 제목이? 난해하다. '여생'이라고 하면 단박에 알아들을 것을 '자기 앞의 생'이라고 어렵게 붙였다. 원제로 했으면 좋았을 것을. 로자의 남아있는 나날일까? 모모의 남아있는 나날일까?
본문에 있는 이 꼬마 철학자의 독백은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아무튼 나는 행복해지기 보다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게 더 좋다.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 쓴다.」
「법이란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한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법적으로 어른이 되면 나는 아마 테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사물들이 얼마나 자기 모습을 끈덕지게 고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참 우습기까지 하다.」
「저능아란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자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