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풍정 정자 품에서 어느 새 80년

마을의 든든한 버팀목 200년 된 팽나무. 마을의 최고령 어르신이 93세니 팽나무는 우리 마을의 가장 큰 어른이다. 힘차게 위아래로 쭉쭉 뻗은 가지들이 평곡리 사람 누구누구 인양 우리 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알고 있는 우직한 어른. 소란한 시절에 한적한 자리, 관풍정에 앉아 아버지 품에 안긴 다섯 살 코흘리개로 돌아가 본다.

 

■ 격동의 유년시절
군서면 동평 4길 38번지. 이 터에서 태어나 가정을 이루고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살고 있다. 부모님은 2남 4녀를 두셨는데 위로 누나가 넷이고 형님과 막내인 나, 두 아들을 두셨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일꾼 여럿을 두고 큰 농사를 지었다. 평곡리 선산 곽씨네 하면 인근에서는 제법 알아주었다.  

1940년대 1950년대 유년 시절은 시대의 소용돌이와 맞물려 어린 나도 아픔을 품고 지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5살 때 아버지는 해방되기 전 몇 개월 남겨놓고 너무나 가슴 아프게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부재는 우리 집안에 청천 벽력같은 위기로 다가왔다. 어머니께서 딸 넷을 낳다가 형님과 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하시고 귀한 아들을 얻었다며 듬뿍 사랑을 주었다. 틈만 나면 집근처 관풍정에 데리고 가서 박자 없는 노래도 가르쳐주시며 놀아 준 기억이 또렷이 남아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 마음속에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이 또 얼마나 슬픈 사건이었는지 지금까지도 기억 저 편에 남아있다. 

나는 군서 국민학교에 다녔는데 1회 졸업생인 큰아버지가 살아계시면 120살쯤 되었다. 100년이 훨씬 넘은 유서 깊은 학교다. 그때는 끼니를 채우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 부자라고 해도 맨발로 다녔다. 오죽하면 6.25 직전인 내가 3학년 때 검정 운동화 배급이 나왔다. 모든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여건이 안돼서 심지 뽑아서 5명에게 주었는데 운이 좋게 당첨이 됐다. 열 살 꼬마가 처음으로 세상을 다가져 보는 기쁨을 맛보았다. 아끼느라 못 신고 실겅(시렁: 물건을 얹어놓기 위하여 방이나 마루 벽에 두 개의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에 걸쳐두고 신주 단지 모시듯이 하루에도 몇 번씩 운동화가 잘 있는지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그렇게 아끼던 운동화를 신어보지도 못하고 그만 6.25가 발발했다. 시골 아이의 설렘도 전쟁 통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 시절은 너나없이 어려운 고비를 견뎌내야만 했다.

내가 열 살 때 6.25가 발발했는데 어머니는 위험을 느꼈는지 시집 간 큰 누나가 사는 동이면 조령리로 형님과 나를 피신 시키셨다. 귀한 아들들은 꼭 살아야 한다고 하며 젖먹이를 두고 있던 큰 누나를 불러 우리를 데리고 골짝 넘어 피난을 시켰다. 할아버지는 난리 통에 귀한 손자들이 혹여 집으로 못 돌아올까 동네 노인 두 분에게 쌀 닷 말 줄테니 우리를 데려오라고 하셨다. 집으로 오는 길, 인민군들이 대낮에는 세산리 아카시아 숲에 지프차를 박아놓고 하모니카 불며 놀고 야간에는 총소리로 공포에 떨게 했다. 수박을 따다가 주먹으로 깨서 우리에게 주기도 했다. 밤이면 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데 한낮의 행태는 너무 낯설었다. 이념을 몰랐던 우리에게는 너무 생경한 장면이었다. 우리는 2주정도 피난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피난 간 큰 누나 동네가 폭격으로 모두 다 사망했다는 잘못된 소문에 우리가 죽은 줄 알고 바로 졸도하셨는데 일어나지 못하시고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우리는 졸지에 5년 간격으로 조실부모하게 된 것이다. 내가 열 살 형님이 열네 살 어린나이에도 형님과 나는 부모님이 남겨놓은 많은 재산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의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 제대를 하고 내가 27살 때 매형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금산이 고향인 21살의 아내는 활달하고 예뻤다. 아내는 시부모가 없는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자식 4명을 낳고 키우며 힘든 농사일을 밤낮없이 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가끔 웃으며 투덜거리며 하는 말이 있다. ‘속아서 왔다고‘. 틀린 말이 아니다. 사실 혼인할 당시 나는 군 제대 후 전매청에 입사하기로 했는데 입사를 포기하고 시골에 남아 부모님이 일궈 논 재산을 지켜야 했다. 집안을 위해서 고향에 남게 되었다. 

시골에서 자란 아내는 고달픈 시골 살이가 싫었고 내 직업을 보니 도시에 살 수 있는 희망이 있어 큰 거부감 없이 승낙을 했는데 시집와서 내가 농사일을 하게 된걸 알고 얼마나 어이가 없고 실망했겠는가. 그런 아내를 보면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을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렇게 아내와 나는 고향을 지키며 평곡리의 석양처럼 아름다운 해로를 하고 있다.

 

■ 딸기농사에서 얻은 성공과 아낌없던 청춘
처음엔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논농사 밀농사 보리농사가 주된 경작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쟁력이 약해지고 크게 타산이 맞지 않아 과일농사로 전환하였다. 처음 참외농사를 지었다. 몇 년간 별 소득도 없고 병충도 많아 포도농사로 바꿔 전념하기도하고, 또 토마토농사도 지어봤다. 그즈음 지인으로부터 딸기농사를 지어보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듣고 그 당시 충남 보령군 웅천의 보교조생딸기가 전망이 좋다는 말을 듣고 내려가 딸기묘목 농법을 가져와 재배를 하였다. 

다섯 가구가 의기투합하여 함께 딸기농사를 시작하였다. 처음 딸기를 수확하여 대전 공판장에 내다 팔았는데 무진장 인기가 좋았다. 그 계기로 딸기 농사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고 그래서인지 한동네 13가구가 딸기농사에 뛰어들었다. 수확하는 대로 서울 등 대도시로 나가 팔았는데 엄청나게 인기가 좋았고 고소득을 올렸다. 그러나 인기가 많고 고소득을 올릴수록 아내는 물론, 자식들도 손을 보태야 해서 식구들의 고생을 담보로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1975년경 내 나이 30대 중반이었는데 당시 충청도에서 우리 군서면이 가장 고소득을 올리는 마을로 손꼽혔다. 그때는 군서딸기라면 없어서 못 팔정도로 최상의 특산품이었다. 그 소문이 전국에 퍼졌고 유명세를 타 여러 도지사가 방문할 정도였으니까. 또 옥천군에서 대대적인 자랑과 성공담에 주변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딸기농법을 배워갔다. 전국적으로 재배 농가가 늘어나다보니 10여년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딸기농사는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나는 과감히 딸기농사를 접고, 다시 포도농사로 전환하여 재배하기도 하였고 현재는 조금 남긴 땅에 깻잎 농사와 논농사를 하고 있는데 자식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서다. 나는 완전히 농사에서 손을 떼었고 모두 임대를 주어 경작하고 있다. 

내 나이 팔순. 고향에서 부모님이 남겨 놓은 땅에 논농사 밀 보리농사 참외 포도 딸기 토마토 깻잎농사 등 두루두루 다 재배를 해보았다. 그중에도 딸기농사로 대박 난 젊은 시절이 가끔씩 떠오르며 치열하게 살았던 그때의 기억이 뭉클하다. 나는 부모님의 재산을 지키고 가꾸는 것이 책임이며 ‘효’일 것이라는 막연한 일념으로 내 청춘을 농사일에 다 쏟아 부었다. 

■ 순풍에 돛단 노년
나는 지금 군서면 평곡리 노인 회장을 맡고 있다. 80호의 가구가 있는데 동네 한 바퀴 돌때마다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 10년 후를 내다볼 때 어찌될까 심히 걱정이 되기도 하고 앞으로 농촌이 풀어야 할 큰 과제이기도 하다. 80평생을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코흘리개 시절 초례상 너머로 훔쳐본 연지곤지 찍었던 이웃의 새댁 아주머니들과 같이 나이 들고 있다. 무수한 세월 속에서 이웃에서 가족이 되었다. 활달하고 부지런한 아내는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쿡 쿨린 사업에 적극 동참하여 복지관에 모이는 노인들을 위해 요리봉사를 하며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나는 노인회장으로서 앞으로 거창한 계획 보다는 복지관 쿡 클린 사업이 지금처럼 앞으로도 더욱 번창하고 잘되도록 늘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노인들이 건강하게 편히 쉬며 지내는 장소가 되길 바라고 있다. 이러한 사업이 더욱 활성화되어 인근지역에 모범적 사례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제 삶들을 잘 가꾸고 사는 자식들이 고맙고, 공기 좋고 인심 후한 내 고향 군서면 평곡리의 여유로운 일상을 아내와 함께 즐기고 있다. 자존심을 잃지 않았던 80년의 내 삶이 이만하면 족하다.

작가 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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