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민낯

 

장동석: 이제 6·25전쟁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전면 남침 전에 삼팔선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이미 국지전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정부 차원에서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걸까요? 실제로 이승만 정권은 국지전과 관련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정황이 있는데요.

김삼웅: 6·25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30일에 제2대 민의원 선거가 있었어요. 그때는 국회의원이라고 하지 않고 민의원이라고 했는데, 제헌국회 임기가 2년이었기 때문에 1950년 5월에 선거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 진영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체 210석 가운데 이승만 세력이 24석, 이승만에게서 떨어져나간 한민당 세력이 24석을 차지했습니다. 나머지 군소 정당이 있었지만 무소속이 무려 126석을 차지했습니다. 제2대 국회에는 분단 정권 수립을 반대했던 조소앙, 안재홍, 김붕준, 최동호, 장건상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물론 조봉암 선생도 있었죠. 이분들은 이승만이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상대거든요. 경력으로 보나 독립운동 활동으로 보나 그렇죠. 
1948년 남북 정부 수립 후부터 삼팔선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이 참 많았습니다. 1949년 한 해 동안 삼팔선 주변은 준전시 상황이었다는 기록도 있어요. 그런데 당시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입만 열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장담했어요. 미국 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준장도 “한국군은 북한의 침공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다”고 공언했죠.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빼버립니다. 미국의 태평양 안전보장선을 알래스카, 일본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으로 설정한 것이죠. 한국이 미국의 안보 라인에서 빠지게 되자 북한과 중국, 소련은 호재라고 봤겠죠. 한심한 것은 6월 24일 저녁부터 군 수뇌부가 육군장교클럽 개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는 겁니다. 국방부, 육군본부 등 군 수뇌부와 미국 군사고문단은 서울 근교에서 밤 10시까지 파티를 벌이고 새벽까지 2차를 했어요. 새벽 4시 40분 인민군이 전면 남침을 감행했는데 수뇌부는 그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삼팔선 주변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수백 건씩 터지고 있는데 말이 되는 일입니까. 더욱이 국군 장병 3분의 1이 외출이나 외박을 나간 상태였습니다. 

장동석: 보고 체계에도 문제가 있었다면서요?

김삼웅: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고받은 것이 25일 오전 10시 30분경입니다.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다가 보고를 받았어요. 새벽 4시 40분에 전면 남침이 시작됐는데, 보고 체계가 얼마나 허술했으면 10시 30분에야 보고를 받나요? 그때 보고를 받고도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오후에야 국무회의를 열어요. 이런 행태를 종합해보면, 늘 있었던 일이니까 국지전 정도로 보고 조금 있으면 잦아들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쪽에서는 이런 일을 바랐을 수도 있어요. 북한이 총격전을 좀 크게 벌여주면 선거에 도움이 되니까요. 가설이지만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동석: 국지전 상태가 지속되면 아무래도 선거에 영향을 주겠죠. 그러고 보면 ‘북풍’(北風)6)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군요. 

김삼웅: 국지전 상태보다는 좀 커야죠. 그래야 정권도 유지되고 다음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니까요. 자기 세력이라곤 국회의원 몇 명이 고작이고, 한민당은 칼을 갈고 있고, 쟁쟁한 인사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상황이었어요. 이승만으로서는 아주 불리한 처지였지요.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가 『전쟁과 사회』에 이렇게 썼더군요. 

“이승만이 전쟁 발발 후 신성모와 채병덕의 낙관적인 전황 보고에 대해 한 마디 질책이나 비판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 1949년 10월 이후 스스로 북진론을 주장해온 점, 그리고 5월 이전까지는 전쟁 발발을 경고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애타게 요청하다가 6䞕직전에는 침묵하고 막상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한 태도를 취한 것은 미국 정부의 한국에 대한 기본 입장을 냉정하게 판단한 후에 나온 결론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미국 측과 사전에 일정한 교감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장동석: 미국과 교감이 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요. 

김삼웅: 이승만은 측근인 임영신이 독자적으로 북한에 보낸 첩보원으로부터 북한의 전쟁 준비 상황을 보고받았어요. 임영신은 이승만 정권의 상공부 장관 출신으로 뇌물 사건으로 물러난 사람입니다. 이것뿐만 아닙니다. 김종필이 당시 방첩대 책임자로 있었는데, 북한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보고를 받았다면 충분히 대처했어야 하는데 김동춘 교수 얘기처럼 미국과 연계가 되었거나 정권 유지만 생각하다가 방심했다고 봐야겠죠.  

장동석: 국지전을 기대했지만 전면전이 발발하니까 서울에 남아 있기 어려웠겠죠. 하지만 도망가는 행태가 패륜 수준이었다는 것이 문제죠.  

김삼웅: 이승만이 남쪽으로 도망가고 30분 후에 한강철교를 폭파시켰는데, 그때 한강철교를 건너던 시민이 적게는 600명 많게는 1,200명입니다. 한국은행에 보관하던 국채와 금괴도 전부 다 놔둔 상태였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국회에서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의결했어요. 그런데 국회에 통보도 하지 않고 국가기밀도 방치한 채 도망갔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당시 수도권에 3개 사단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어요. 그 병력을 적지에 방치하고 도망간 겁니다. 부산으로 피난 가서는 북한 인민군을 격퇴해야 한다면서도 실제로는 정권 안보를 위해 더 발버둥친 거죠. 발췌개헌까지 하면서요. 

장동석: 한강철교 폭파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몇몇 증언에 따르면 계획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단순히 대통령이 건넜으니 폭파시켜라가 아니라 어떤 시나리오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는 증언들이 나왔습니다. 

김삼웅: 그때나 지금이나 국군통수권은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대통령 피난을 위해 서울역에 기차를 대기해놓은 상태였습니다. 국회의 결의도 무시하면서 도망간 행태는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굉장히 절묘합니다. 기차가 건너고 30분 후에 육군 공병감이 TNT로 철교를 폭파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공병감은 한강철교를 폭파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합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시켰으니 유언 같은 것이 남았을 리 없지요. 일개 대령인 공병감이 자신의 판단으로 폭파시켰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보다 윗선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장동석: 그런 와중에도 이승만은 권력 유지와 정권 안보 차원에서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려고 합니다. 전쟁 와중에도 선거가 있었기 때문이겠죠?

김삼웅: 평시에 직선제였다가도 전시에는 간선제로 바꾸는 게 상식입니다. 문제는 부산 피난 시절인 1952년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겁니다. 당시는 임기가 4년이었어요. 부산 피난 중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아주 야비하게 직선제 개헌안을 냅니다. 그전에 한민당은 내각제 개헌안을 냈고요.  한민당은 금권을 동원해서 무소속 당선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한 표 차이로 부결됩니다. 그러자 이승만이 직선제와 양원제 개헌안을 내놓습니다. 양원제는 직선제 개헌만 하면 냄새가 나니까 국민의 뜻을 반영한다는 미명 아래 덤으로 내놓은 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한 표 차이로 부결됩니다. 결국 내각제와 직선제에서 두 가지 장점을 발췌하자고 해서 ‘발췌개헌’이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양원제는 전시 중이니 복잡하다며 빠집니다. 결국 이승만 뜻대로 다 된 거죠. 양원제는 처음부터 생각도 없었던 겁니다. 직선제가 목적이니까. 결과적으로 직선제를 하되 국무총리에게 권한을 조금 주게 됩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 지금까지 꼬리표처럼 남은 겁니다. 국무총리가 장관들을 추천하고 해임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거죠. 내각제와 비슷하지만, 실제로 국무총리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나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장동석: 이승만의 치부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만 북진통일론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을 해주시지요. 

김삼웅: 이승만은 해방공간에서는 남북 통일정부 수립에 반대하다가 집권 후에는 북진통일론을 내세웠습니다. 이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는데, 아무런 준비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6䞕전쟁 때는 한미방위조약을 맺으면서 전시작전권이 이미 미군에 넘어간 상태입니다. 이때는 국군지휘권도 없으면서 북진통일론을 내세운 겁니다. 통일정부 수립론자들은 암살하거나 제거하고 말이죠. 1952년 대통령 선거 당시 한민당이 대통령 후보자로 몇 사람을 추천했는데 전시에 이승만이 좌지우지하는 상황이라 겁을 먹고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요. 그런데 죽산 조봉암 선생이 겁 없이 나선 겁니다. 죽산은 북진통일론은 현재 국제 정세로 보나 남북 힘의 구조로 보나 불가능하다며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부터 죽산이 이승만에게 찍힌 거죠. 
사실 북진통일론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정치적 수사로 사용되었습니다. 명분은 좋죠. 국민 통합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상은 반대파의 평화통일론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 겁니다. 지금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때만 해도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정답이었어요. 각종 행사 때마다 ‘우리의 맹세’라고 해서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이런 걸 암송했습니다. 학교, 군대는 물론 기업 등 조직 사회에서는 어디나 그걸 암송했지요. 

장동석: 북진통일론은 국민 정서를 환기시키는 정치적 수사이자 대척점에 있는 평화통일론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군요. 평화통일론은 요즘 말로 하면 ‘종북’이라는 수사와 같은 것이겠네요. 

김삼웅: 그렇죠. 이승만은 6䞕전쟁이 발발하고 UN이 참전하면서 한미방위조약을 맺고 국군의 작전지휘권 자체를 위임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점도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육해공군 지휘권 이양에 관한 공안 혹은 협약’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5일 UN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이승만이 개인 서신을 보냅니다.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 이양하는 것인데, 아무리 전시라지만 기한도 명시하지 않은 채 작전권을 외국군 사령관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맥아더 장군 귀하
대한민국을 위한 유엔의 공동 군사 노력에 있어 한국 내 또는 한국 근해에서 작전 중인 유엔의 육해공군의 모든 부대는 귀하의 통솔하에 있으며 또한 귀하는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있음에 감하야, 본인은 현 작전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며 여사한 지휘권은 귀하 자신 또는 귀하가 한국 내 또는 한국 근해에서 행사하도록 위임한 기타 사령관이 행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군은 귀하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며 또한 한국 국민과 정부도 고명하고 훌륭한 군인으로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국토의 독립과 보전에 대해 비열한 공산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친 유엔의 모든 군사권을 맡고 있는 귀하의 전체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또한 격려하는 바입니다. 귀하에게 심후하고도 따뜻한 개인적인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1950년 7월 15일 이승만’

장동석: 전문을 들어보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러면서도 뒤로는 정쟁만 일삼은 행위는 오늘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합니다. 민주주의의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이 서신이 증명해주고 있군요. 

김삼웅: 6·25전쟁이라는, 어찌 보면 절체절명의 국난을 당한 국군통수권자로서 외국군에 시한부로 작전권을 위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7월 15일은 전쟁이 일어난 지 채 두 달도 안 된 시점입니다. 아무리 전시라지만 위임을 하더라도 맥아더와 직접 만나서 우리 사정이 이러니 당신에게 당분간 위임한다, 전쟁이 끝나면 반환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를 했어야지요. 아니면 부칙에라도 승전 후에는 우리가 통수권을 돌려받겠다고 명시하든가. 구멍가게 하나를 누구에게 맡기더라도 기한을 명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나라 국군의 지휘권을 넘기면서 이런 게 없었다니 말이 됩니까? 
독립국가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기준이 뭔가요? 국군통수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기준 중 하나입니다. 임시정부도 일제와 싸우면서 끝까지 중국 정부를 설득하여 광복군 통수권을 김구 주석이 장악했어요. 그런데 정부가 수립된 마당에 종잇장 하나로 넘겨줘버리고는 전쟁이 끝난 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반환조차 거론하지 않았어요. 65년이 되는 지금도 전시작전권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도 박근혜 정부도 미국에 사정사정해가면서 더 맡아달라고 하고 있죠. 미국의 고위 관리가 이런 말을 했어요. “한국 정부가 계속해서 전시작전권 반환을 연장해달라는 것은 다 큰 청년이 여전히 유모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있는 격이다.”작년에 박근혜 정부가 다시 전시작전권을 무기한으로 넘겨버렸는데, 국제적으로 참 부끄러운 처사입니다.

장동석: 세계적으로 이런 유사한 사례가 있나요?

김삼웅: UN에 가입된 국가가 193개인데, 그중에 전시작전권을 외국군에 이양한 나라는 없습니다. 미국은 돌려주겠다고 하는데, 우리가 더 맡아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상황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철석같이 약속을 했잖아요. 몇 년 후에 우리가 환수하는 것으로. 당시 예비역 장군들, 보수파 목사들, 교수들이 청와대 앞을 막고 시위했던 것 기억하시죠? 노 대통령이 “별 달고 으스댔던 사람들이 그동안 막대한 국가 예산을 어디에 다 쓰고 더 맡아달라고 이러느냐”했다가 난리가 났었죠.  

장동석: 전시작전권 문제만 봐도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아주 깊은, 그것도 여러 가지 뿌리를 가지고 있군요. 

김삼웅: 전시작전권 환수 이야기만 하면 빨갱이 아니냐, 종북좌파 아니냐 으르렁대는데, 전시작전권이 언제 어떻게 넘어갔는지 내밀한 상황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한심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잘한 게 이거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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