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옥천읍 교동2리 섯밭댕이 마을
옥천읍 교동2리 섯밭댕이 마을

옥천읍 교동저수지 북쪽 계곡 속에 둘러싸인 마을이 섯밭댕이 마을이며 행정리는 교동2리이다. 이 마을은 마성산과 성뻔지산, 국수봉, 늘티 고개로 에워싸인 오래된 마을로 옛 37번 국도를 따라 형성된 마을이며 음식점과 무인텔이 성업 중이다.

섯밭댕이의 지명유래는 교동저수지부터 섯밭댕이 계곡을 흐르는 고수골 냇가를 따라서 문정천의 발원지인 마성산 북쪽 기슭과 늘티에 이르기까지 누에를 기르는 섶처럼 논밭들이 층층 계단처럼 형성되어 섶밭댕이에서 섯밭댕이로 음운변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 일제강점기의 『조선지지 자료』 에 의하면 옥천군 군내면 지명 편에는 한자 지명으로 신전(薪田)이라 기록하였다. 섶나무, 땔나무 신(薪)에 밭 전(田)를 썼으며 한글로는 '셥바탕이'이라 기록했다. 섶나무는 와신상담에 나오는 고사성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은 한나라 역사학자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이 고사의 의미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양자강 하류에 국경을 접하고 있는 적대 국가인 오나라와 월나라의 왕과 관련한 일화다.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와 전쟁에서 패해 잡혀가서 온갖 치욕을 당하다가, 오 왕 부차의 배려로 구사일생 오나라를 탈출하여 고국 월나라에 돌아와서 구천 왕은 복수를 위해 '섶나무(薪), 즉 땔나무 장작 위에 누워(와신臥薪)', '곰쓸개를 핥으면서(상담嘗膽)' 복수를 다짐했다는 고난을 잊지 않고 노력해서 이겨냈다는 고사다.

섯밭댕이 마을은 산촌 마을로 사방이 높은 산과 늘티 고개 등으로 둘러싼 마을로 오직 남쪽 만 트여 고수골 냇물이 흘러서 서당골 마을에 이르러 교동저수지를 형성한다. 섯밭댕이 주변 성뻔지산과 늘티봉에 삼국시대 석성이 남아 있다. 섯밭댕이 마을 동쪽 기슭은 조선시대 옥천군 진산인 해발 409m 마성산과 약310m 일자산(一字山), 서쪽 기슭에 335m 성뻔지산과 약250m 국수봉, 북쪽으로 층층이 논밭이 있던 되내기골과 며느리재골 위에 약323m 늘티봉과 약282m 할애비산 등 높은 산들이 이 마을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마성산골 동남 깊숙한 골짜기는 옛날에 옹기를 굽던 곳이라 단지골이라 부른다.

이 마을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이루는 금강과 서화천과 사이의 국경지대이며 나제간에 주요한 교통로로 직선거리 1km 이내의 산봉우리에 지오리산성, 늘티산성, 국원리산성 등 3개의 삼국시대 산성이 삼각형 형태를 이룬다. 또한 통행로인 늘티재(서낭재), 며느리재, 장고개, 사장재, 문바우재 등 크고 작은 고개가 다섯 개나 된다. 해발 335m인 성뻔지산 정상에는 삼국시대 지오리산성이 있다. 이 석성은  둘레는 약 150m이며 테미형의 백제계통의 산성이며 군북면 지오리와 섯밭댕이 마을 사이에 위치한다. 또 늘티산성은 섯밭댕이 북편에서 군북면 국원리 며느리재로 넘는 해발 300m 정상의 백제계 산성으로 둘레가 150m다. 

고수동리(高樹洞里)는 교동저수지 서북 편 주성사 절에서 좀 떨어진 언덕배기에 큰 나무가 서있어 마을지명이 유래했고 교동저수지부터 섯밭댕이에 이르는 큰 계곡을 고수골이라 불렀다. 고수동리는 저수지 건설로 없어졌고 조선시대 이후 구읍에서 군북면 북부의 국원, 석호, 막지리와 안내면 답양리 가산→보은 회인방면의 소로 길을 오가던 백성들과 장꾼들이 목을 축이며 쉬어가던 주막집이 고수동리와 섯밭댕이 마을 길섶에 있었다. 한편 교동저수지 상류 일자산 기슭 서당골에 서당이 있었고 지금의 전원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저수지 상류 서북 편 귀신당 골짜기는 1894년 12월에 일본군이 동학전쟁 기에 군북면 막지리 출신 강용운 동학군 지역대장 등 수십 명이 체포되어 참살된 곳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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