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민낯

장동석: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 것 아닙니까?

김삼웅: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면서 제101조에 민족반역자, 친일파들을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을 제정한다는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특별법이 제정되고 중경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김상덕 선생이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았지요. 조사를 해보니 언론인이나 문인들도 문제였지만, 일본 경찰 노릇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사람들이 가장 악독했어요. 그런데 대표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 등은 이미 이승만 정권에서 경찰의 핵심 간부였거든요. 반민특위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부 내 친일파들을 넘기라고 하자, 처음에는 이승만도 고민했어요. 넘기자니 자기 수족이 잘리는 거고, 안 넘기자니 법을 위반하는 것이니까요. 그 무렵 친일파들은 엄청난 공작을 꾸몄어요. 친일파들이 만든 <대동신문>은 ‘반민특위는 빨갱이다, 북한 정권의 앞잡이다’이런 기사를 하루도 빼지 않고 실었어요. 삐라도 뿌리고,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암살단을 조직하기도 했지요. 반민특위 위원장인 김상덕 선생이 첫 번째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민특위 암살단 요원들을 접촉했던 백의사 소속 테러리스트 백민태가 신고를 하면서 테러가 좌절되었죠. 아무리 테러리스트라지만 자신이 존경하는 김상덕 선생을 해칠 수는 없었던 거죠. 그렇게 해서 반민특위 요인 암살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본격적으로 반민특위 활동을 저지하는 데 나선 겁니다. 더는 자기 수하들을 구속되게 놔둘 수 없다고 버틴 거죠. 이승만은 신익희 국회의장과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경무대로 불러서 새 국가 건설에 반공 경찰, 검찰, 군 수뇌부가 필요하니 이러저러한 사람들은 눈감아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신익희 국회의장과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악질적인 민족반역자라면서 거부했어요. 심지어 이승만은 심야에 김상덕 위원장 관사로 찾아가 입각시켜 줄 테니 노덕술을 풀어달라고까지 말했답니다. 

장동석: 이승만이 필사적으로 친일파들을 감싸고돌았군요.  

김삼웅: 마지막에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지령을 받은 국립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서 경호요원들에게 총을 겨누고 각종 자료를 빼앗아간 거죠. 나용균 국회 내무위원장 등이 경무대로 가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은 당당히 자기가 지시했다고 말합니다. 기록에 다 나와 있습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고 하면 저는 반민특위 습격 사건을 들겠습니다. 이로써 애국자 대 친일파, 민족주의자 대 사대주의자, 통일 세력 대 분단 세력, 양심 세력 대 기회주의 세력의 대결에서 민족 세력이 패배하고 반민족 세력이 판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을 배반했던 자들을 단 한 명도 처단하지 못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이후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국권을 농락하고, 결과적으로는 일본 군인 출신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비극의 씨앗을 낳게 된 것입니다. 

장동석: 반민특위 습격과 해체가 친일파가 날뛰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신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는 말씀도 그렇고요. 

김삼웅: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좌절을 ‘조선 역사상 1,000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 1,000년 사이에 고려 건국과 멸망, 조선 건국, 임진왜란, 병자호란, 조선 멸망 등 엄청난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도 단재 선생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가장 큰 사건으로 봤습니다. 민족사학자로서 단재 선생은 국풍파 대 사대당, 민족주의 대 외세주의, 자주독립 대 사대주의 등 몇 가지 틀을 가지고 역사를 보았는데, 민족 세력이 패배하면서 고려 말, 조선조 500년 동안 사대주의 세력이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고 봤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저는 이런 의견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1949년 6월 6일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가 강제로 짓밟히면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년사의 제1대 사건’이라고요. 그래서 친일 세력이 다시 득세하게 된 것이니까요. 

장동석: 오늘 우리 사회가 혼란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것은 현 정권의 무능과 부정도 있지만 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역사에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민족은 멸망한다’는 말이 떠오르는데요. 그런데 반민특위 해체와 더불어 한국 현대사를 바꾼 사건이 하나 더 있다고 언젠가 말씀하셨지요. 국회 프락치 사건 말입니다. 

김삼웅: 국회 프락치 사건도 현대사의 물꼬를 바꾼 중요한 사건입니다. 사실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용어입니다. 1949년 5월 이승만 정부는 남로당 프락치들이 제헌국회에 침투하여 첩보 공작을 했다는 이유로 김약수 등 13명의 국회의원을 체포합니다. 김약수 선생은 당시 국회 부의장이었고 독립운동가 출신입니다. 함께 구속된 노일환 등은 대부분 진보적 소장파 의원들로 외국군 철수, 남북 정치회의 개최, 반민법 제정 등에 앞장섰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공안정국이 등장한 게 이때가 처음인데,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국회의원 13명을 체포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현역 국회의원들을 헌병사령부 내에 임시로 설치된 특별수사본부에 수감한 겁니다.

장동석: 1949년 5월이면 정부 수립 이후 사법부와 검찰이 엄연히 존재한 상황인데 헌병사령부에 구속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김삼웅: 헌병사령부 특별수사본부는 비공개로 재판을 진행했는데, 나중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기가 찰 노릇입니다. 남로당의 여성 특수공작원 정재한을 개성에서 체포했는데, 그녀의 음부에서 비밀문서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개성은 남쪽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정재한이라는 여성은 재판정에 한 번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유령 재판인 거죠. 현직 국회의원 13명에게 중형을 선고하면서 유일한 증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을 법정에 세우지도 않은 겁니다. 이 대목에서 연관성을 봐야 합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진 것이 1949년 5월 초였고, 6월에는 반민특위가 해체됩니다. 6월 26일에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죠. 이승만 정권 핵심부는 절묘한 공안 시스템을 가동해서 국회를 무력화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수법을 많이 사용하죠. 
당시 제헌의원 중에는 역사의식도 있고 용기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반민특위 관련 특별법이 만들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런데 이승만이나 그 수하들인 친일파 입장에서는 반민특위의 칼날이 자신들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우선 국회의 기를 꺾을 방법이 필요했던 거죠. 국회 프락치 사건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사실 ‘프락치’라는 말이 못된 짓을 하는 앞잡이잖아요. 그러니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당시 공안당국이 ‘남로당 프락치 사건’으로 명명해서 국회의원들을 구속했습니다. 이어서 반민특위를 없애고, 민족 세력의 정신적 지주인 김구 선생을 제거함으로써 일단락됩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악행으로 남을 만합니다. 

장동석: 이후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김삼웅: 비공개 재판을 하다가 2심 계류 중에 6·25전쟁이 일어납니다. 당시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접수해서 풀어줍니다. 제가 15년 전쯤에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라는 책을 쓰다가 보니까, 인민군이 6월 25일 전면 남침했고, 28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이 도망가고, 30분 후에 한강철교가 폭파됩니다. 대통령도 도망가버린 형편인데 서대문형무소도 방치되지 않았겠어요. 곧바로 인민군에게 접수되면서 이분들도 그들에게 인계됩니다. 그리고 13명 중 한 사람을 빼고 모두 북한으로 갔습니다. 이런 경우는 월북이라고 해야 할지 납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전후에 이게 또 다른 빌미가 됩니다. 봐라, 다 북한으로 가지 않았느냐, 당연히 프락치 아니냐, 되레 이승만 정권이 큰소리를 친 거죠. 이 사건은 아직도 명예 회복은커녕 진실 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재야 시절 박원순 변호사가 어느 정도 규명을 했는데, 아직도 일반에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장동석: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참담한 사건인데, 아직도 진상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니 답답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역사가 왜곡되면서 오해를 낳고 있는데, 이런 사건들이 얼마나 더 생겨날지 알 수 없잖습니까?

김삼웅: 덧붙이자면 국회 프락치 사건을 담당했던 핵심 멤버가 대개 반민특위가 친일파로 지목한 사람들입니다. 전봉덕 헌병사령관, 김정채 헌병사령부 수사정보과장, 오제도 서울지검 검사, 김태선 서울시경 국장, 최운하 서울시경 사찰과장 등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국회 프락치 사건을 수사한 겁니다. 전봉덕과 김태선은 김구 선생 암살 사건에도 연계되어 있습니다. 최운하는 임시정부와 의열단에서 처단해야 할 악질로 지목했던 인물인데, 자기 입으로 독립운동가를 몇십 명 죽였다고 자랑까지 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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