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리 임옥란씨 인터뷰

24일 오후 4시경 임옥란(83, 연주리)씨가 한해 먹을 감자농사를 짓고 있다.

 [읍면 소식-안남면] 24일 오후 4시, 햇볕이 쨍한데 10여 평 땅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잘 갈아진 밭 구멍구멍마다 눈을 틔운 감자를 심고, 또 그 옆에 다시 작은 구멍을 내 비료를 한 움큼 넣는다. 감자를 심는 것은 임옥란(83,연주리)씨, 밭을 갈고 있는 것은 아들 조준식(58)씨다. 낡은 분홍색 챙모자에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임옥란씨는 어느새 땀이 흠뻑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두문불출하는 집도 많지만 임옥란씨와 조준식씨는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밭에 나왔다. 감자 콩, 깨, 벼 등 직접 농사 지어 자급자족하는 두 사람은 쉽사리 일을 쉴 수가 없다.

안남이 본래 임옥란씨의 고향이냐는 질문에 임옥란씨가 가만히 생각해보다 '그렇지' 대답한다. 

"태어나자마자 솜에 싸여서 북만주로 떠나기는 했지만 안남에서 태어났으니 여기가 내 고향이지. 북만주는 왜 갔냐구? 그때는 북만주에 가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했거든. 온 가족이 그렇게 떠났는데 10년을 못 살고 다시 목숨 걸고 나왔어.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러시아 사람들이 일본 사람을 다 내쫓았는데, 그 와중에 중국 사람들이 한국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뺏어간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8살 때쯤이었지, 아마. 아버지 어깨에 목마를 타고 압록강 건너서 기차를 타고 서울 가는 석탄 실어 나르는 기차를 탔어. 어찌나 먼 길이었는지, 한 달 열흘 걸려 겨우 서울에 갈 수 있었어."

가족들이 마음잡고 서울에서 자리 잡으려던 찰나 이번에는 6.25 전쟁이 터졌다. 없는 짐을 끌어 모아 리어카에 싣고 육로로 걷고 걸어 다시 고향 옥천 안남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길고 긴 여정들이었는데, 벌써 내 나이가 여든셋이 됐어. 아버지 때부터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노력한 거 같은데... 안남이 좋은 것도 많지만 아무래도 농사짓고 살기에 생활은 쉽지 않은 거 같네. 내 손으로 벌 수 있는 건 감자나 깨 같은 것밖에 없잖아. 그래도 올해부터는 노령연금이 30만원으로 올라서 다행이지. 병원비로 다 나가기는 하지만. 그나저나 기자 양반, 농민수당이니 뭐니 이야기가 있던데, 혹시 언제부터 되는지, 기자 양반은 알고 있나?"

함께 일하고 있는 아들 조준식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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