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세어라 금순아' - 강인하고 자상한 우리네 '누님'
'굳세어라 금순아' - 강인하고 자상한 우리네 '누님'
  • 추억의 뜰 김경희 작가
  • 승인 2020.03.25 1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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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46)
1937년생 청산면 백운리 정금순 어르신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노래가사)
고) 현인 선생님의 '굳세어라 금순아'의 한 소절이다.
그 시절 금순이처럼 굳세게 살아오신 청산면 백운리 마을의 정금순 어르신.
새벽마다 소리 없는 빗질이 백운리를 그림 같은 마을로 만들었다. 
골목에 먼지 하나 없어 길바닥에 이부자리 깔고 누워도 될 만한 백운리 마을.
그 정갈한 마을의 가장 깨끗한 집에서 환한 미소로 반겨주시는 정금순 어머니
"어서 와요"
강인하고 인자한 우리의 누님 모습 그대로셨다. 

■ 배짱 두둑한 열여섯 살 금순이 

영동군 황간면 서송원리, 내 유년의 뜰이었던 소박한 마을이다. 7남매로 태어났지만 택자 돌림의 남자 형제들은 먼저 떠나고 인순 금순 칠순 우리 세자매가 남았다. 원래 물 맑기로 소문난 황간 상촌리 물한계곡 동네에서 태어난 후에 아버지 고향인 서송원리로 아홉 살에 이사를 갔다. 잠시 숨 돌리자마자 1950년 열 네 살에 6.25사변이 일어났다. 집은 폭격을 맞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 가족은 충격에 넋을 잃고 무주 계곡근처의 마을로 피난을 갔다. 

집 폭격이후 집안 형편도 나아질 기미가 안보이고 부모님한테 기대어 살고 싶지 않았다.

애나 어른이나 다 어려운 시기였다. 삶에 뾰족한 묘수가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배짱 두둑한 선택을 하게 됐다. 내 인생을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동네 친구들과 의기투합해서 친척언니가 있는 경남 밀양으로 돈 벌러 가기로 작정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방년 16세가 아니라 그 나이에 시집을 가는 친구도 간간이 있었다. 

친척언니는 밀양의 방직공장에 다니고 있어서 우리는 언니를 만나 취직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영동역에서 비둘기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가슴에 보따리 하나씩 안고 기차에서 내려 밀양이라는 곳에 첫 발을 내디뎠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밀양역은 낯설고 두려웠지만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로 위로가 되었다. 충청도에서 온 순박한 큰 애기들의 어설픈 모습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기가 찬다. 밀양은 처음부터 만만하지 않았다. 언니와 연락이 안 되서 막막하기만 했다. 연락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언니를 만나겠다는 마음으로 떠난 길이라 우리는 언니를 만나지 못하고 일단 며칠 지낼 곳을 물색했다. 그리고 어차피 내려온 길, 취직을 할 요량으로 며칠 묵으면서 살아갈 방도를 모색했다. 여인숙의 아주머니는 전국을 다니는 보따리장수였는데 한날은 아주머니가 

"너희들 부잣집에 수양딸로 갈래?"
하시며 달콤한 제안을 하셨다. 솔직히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돈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밀양행을 결단했기에 취직을 한다는 생각으로 수양딸로 가게 되었다. 우리 셋은 각각의 집으로 흩어졌고 나는 운이 좋아 너무 좋은 엄마를 만났다. 내가 수양딸로 간 집은 약주 공장이었다. 제사 때 쓰는 약주나 정종을 만드는 공장 이었다. 밀양에서 약주 공장 사장이면 부자소리 듣던 때였다. 

빛바랜 가족사진

■ 낯선 밀양 땅, 호인이신 수양어머니

수양딸로 처음 들어간 며칠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매일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엄마품의 온기가 다 식지 않은 열여섯 살 이었으니까...밤마다 베개를 눈물로 흠뻑 적시고 아침이면 눈은 퉁퉁 부었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어나 공장 일을 돕고 야무지게 일을 했다. 나는 사춘기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밀양까지 간 것이 아니었다. 돈을 벌겠다는 야무진 마음에 용기를 얹어 밀양까지 갔던 길이다. 눈물은 잠자리에서나 훔치고 아침이면 또 새날을 맞이했다.

성공해서 집에 가겠다는 마음 하나였다. 밀양에서 4년을 살았다. 인덕이 있어서 수양어머니는 나에게 너무 잘해줬고 식구들도 나를 막내딸처럼 예뻐해 주었다. 물론 내가 말들을 일을 하지 않았고 성실하고 착하게 생활한 까닭도 있다. 명절이면 추석빔도 해주시는 그 분들이 너무 감사했다. 약주 공장에서는 술 담는 약주 병에 표 붙이는 일 술 담는 일을 도왔다. 여럿이 하니까 고단하지 않았다. 나는 사장님 내외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다. 사장님 댁 가족들은 정말 호인이었다. 그 집에서 시집갈 밑천도 마련했다. 처음 밀양으로 나선 길은 부모님 몰래 감행했던 일이라 나는 더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추석 때 고향마을에 갈 때는 빨간 우단 저고리에 검정 비로드 치마를 입고 금의환향하듯이 고향마을에 왔다. 영동역에서부터 내 옷 맵시에 힐끔거리는 남정네들이 있었다. 마을 어귀에 내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아니 정씨네 금순이 맞아?" 하며 놀라기도 했다.

동네사람들이 내가 맞냐고 수근 거리는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던 건 입성 좋은 차림새로 고향에 올 수 있던 뿌듯함이었다. 나의 결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 내심 흐뭇했다. 

■ 인생의 갈래 길, 결혼

스무 살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모가 청산에 살았는데 어느 날 시집가라고 중신을 섰다. 

중매쟁이 말은 절반에 또 절반 거기에 절반만 들으라는 말이 있듯이 이모는 집안 청년을 소개하며 머슴이 둘씩이나 있는 잘사는 집이라고 외할머니를 꼬드겼다. 신랑감을 이모 집에서 잠깐 보고 쑥스러운 만남으로 헤어졌다. 그 만남이 맞선인지도 모른 채 불쑥 남정네랑 얼굴한번 스치고 뺨만 발그레해져서 헤어졌다. 정월에 선을 보고 갔는데 신랑감이 이모한테 돈 주면서 중매하라고 재촉을 했단다. 어머니가 신랑감을 보고 아버지한테 말씀하시는 것을 문풍지 너머로 들었다.  

"신랑감 보니 그만 하면 됐어요. 제가 7월에 사주단자 가져오라고 했어요."

정작 시집 갈 장본인은 나인데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결혼을 했다. 나는 시집 안 간다고 하소연 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21살의 정금순과 26살의 박일선을 부부로 만들었다. 

1957년 금순이 시집가던 해 그 때도 나라에 난리가 한번 났다. 메뚜기 떼가 날아들어 곡식 나락을 다 갉아 먹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새까맣게 떼 지어 오는 메뚜기 떼는 우리를 원망과 공포로 주눅 들게 했다. 6.25 전쟁 중에도 전염병이 돌아 사람이 픽픽 쓰러지곤 했다. 그 기막힌 상황들을 뚫고 여기까지 살아온 게 대단하기는 하다.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가면 양식이 없어서 싸래기죽 빠람죽을 끓여 먹었다. 옛날 전래동화책에 나오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우리는 살면서 겪어온 세대다. 살길이 막막해 고민하고 있을 때 당시 청주에서 작은 아버지가 콩나물 도가를 했는데 작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나에게 콩나물 도가를 해보라고 제안을 하셨다. 남편과 의논하고 청주에서 4년을 살면서 콩나물 도가를 했다. 콩나물이 우습게 보여도 기온에 따라 쑥쑥 자라기도 하고 시원찮기도 해서 별 재미를 못보고 손을 털고 다시 청산으로 왔다. 

성서를 2년4개월간 친필로 써왔다

■ 밀가루 신자, 마리안나

다시 청산면으로 와서 고생을 좀 하고 있을 때였다. 이장님이 청산 성당에서 백운리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은 성당에 오라는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때야 다들 어려우니 니 집 내 집 할 거 없이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애기 먹이라고 옥수수 가루 한말을 받았다. 그걸 타서 먹고 너무 고마웠다. 성당에 사람이 꽉 찼다. 간단한 일들을 하고 밀가루를 줘서 밥거리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물을 한 솥 씩 끓여서 물에 옥수수 가루를 풀어 뻑뻑하게 만들고 소금을 넣어서 죽처럼 먹었다. 우리 아이들이 잘 먹었다. 나는 고마워서 그 때부터 성당에 나갔다. 친정이 불교였지만 지금까지 성당에 나가고 있다. 나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금순이 성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마리안나.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밀가루 신자라고 했다. 밀가루 덕분에 마리안나가 되었다. 

작은 동네라 일거리가 많지 않아서 애들 굶기지 않으려고 소소한 일들을 많이 했다. 두부장사를 시작했다. 두부를 떼어다가 팔고 다음에는 내가 직접 맷돌에 갈아 팔면서 작은 오두막집도 장만 했다. 아직 백운리에 그 집이 있다. 메밀묵 장사도 해보았다. 남의 집 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묵을 만들었다. 집안의 생계 아이들의 끼니가 달린 일이다. 안간힘을 쓰면서 묵을 쑤어 팔았지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꼴이었다. 사람들이 먼저 묵을 사먹고 돈은 뒷전인 경우들이 허다했다. 돈 몇 푼 이라고 우습게보겠지만 돈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 나는 한 푼 두 푼이 모여 큰돈이 된다. 고생스럽지만 돌아보면 어느 틈에 키가 한 뼘씩 자라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한숨 돌리고 또 힘을 얻었다. 

 팔순잔치때 사랑스런 손주들

■ 반들반들 스텐그릇 장사, 내 인생에 볕 뜬 날

40년쯤 전의 일이다. 부산 사는 큰 사위가 곶감 장사 해보자고 권유를 했다. 사위가 옥천 와서 곶감을 가져가서 부산에서 잘 팔았다. 나는 사위와 죽이 잘 맞아 사위가 50개짜리 10개짜리 묵어주고 나는 곶감을 줄줄이 팔았다. 내가 곶감 팔던 옆자리에 스텐 그릇 장사가 반들반들한 그릇을 팔고 있었다. 다들 양재기 양은그릇을 쓸 때라 스텐장사가 구미가 당겼다. 얼마가 지났을까 스텐장사와 어울렁더울렁 장사를 같이 하는데 어느 날 스텐장사가 

"나 곶감 팔고 싶은데 우리 바꿔 팔자"

옛말 그른 말 없다고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이다. 그렇게 우리끼리 구두로 의견을 맞추고 우리는 전업을 하게 되었다. 나는 스텐그릇을 들고 청산으로 왔다. 부녀회 하는 날 방 귀퉁이에 스텐그릇을 모아놓았다. 이웃 주부들이 신기하다며 반들반들한 그릇에 얼굴도 비춰보고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렇게 첫 개시를 잘하고 나는 스텐그릇을 팔면서 재미를 톡톡히 봤다. 곶감 팔러 부산까지 천리를 마다하고 부지런히 다닌 결과물이 스텐이었다.

용산장에 난전을 펼쳤다. 장에 나온 사람들은 반들반들한 스텐그릇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스텐장사를 16년 했다. 애들 다 키우고 결혼시키고 우리 땅이 없었는데 땅까지 샀다. 줄서서 그릇을 사는 사람을 맞는 재미, 돈 세느라 힘들어도 매일이 꿈같았다. 스텐창고가 불이 나서 그릇을 다 태워먹기도 했지만 인생의 우여곡절은 우리네 인생에 맛깔 나는 양념일 뿐이다.

■ 이정도면 말년이 좋고말고 

스텐장사를 뒤로하고 포도 나무하던 때 내 나이 66살에 남편이 돌아가셨다. 남편이 유언으로 이제 일 그만하고 쉬라며 마지막 가는 길에 살가운 말 남기고 떠났다. 마누라 고생한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은 너무나 평안한 노년이다.

총기가 흐려지지 않아 병원 약 타러 대전 성모병원 가는 길에 지하철도 이용할 줄 알고 아직 건재하다. 그리고 딸들이 수호천사처럼 우리 동네에 살고 있다. 거기에 마을 이장이 어찌나 잘 챙겨주고 마을 살림을 똑순이처럼 잘 하는지 세 여자만으로도 너무 든든하다. 우리 아이들 영숙이 영용이 영임이 영진이 다들 착하고 건강하게 잘살고 있어 그만한 감사가 없다. 자랄 때 배불리 먹이지 못했지만 자기 앞길 잘 닦아가는 아이들이 고맙고 미안해서 눈물이 난다.

동생 같은 박선옥 이장은 야무진 여장부다. 동네가 깨끗하니 내 입성도 우리 집도 깨끗하다. 정갈한 노인네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이장 덕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추레한 시골 노인네가 아니라 아직도 여자처럼 살고 있다. 거울 앞에서 머리도 만지고 단추도 한 번 더 여미고 외출을 한다. 자존심 잃지 않으며 살아 온 내 인생을 살며시 보듬어 본다.

사랑하는 엄마께 

청산에서 '웃음꽃방'하는 영임이 (좌측)든든한 큰딸 영숙이(우측)

옥천신문을 통해 이렇게 마음을 전합니다

자운영 꽃이 피고 개나리가 하나 둘 씩 피어나는 따사로운 봄날이 왔네요

어젯밤 편지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으나 많은 생각들이 오고가는 길목에서 펜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라는 이름이 이렇게 눈물짓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한 번도 표현해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맘으로 크게 느껴지네요.  평소에는 느껴보지도 못했던 감정들이 글을 쓰면서 엄마를 생각하게 되었네요.  옆에서 살면서 너무도 가까이에 있기에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멀리 있고 잘 해 주지도 못했습니다. 딸 집 밭에 밭일을 하겠다고 아침저녁으로 오시면서 농사일을 하시는데도 엄마의 맘도 모르고 힘들게 왜 하시냐고 투정도 부리고 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네요. 엄마, 이젠 힘도 부치고 하니 올 해부터는 제가 밭일을 할 터이니 엄마는 옆에서 가르쳐만 주세요. 조금씩 배우면서 농사도 배울게요. 

사랑하는 엄마, 지난 날 엄마 무릎 연골이 다 달아서 양쪽 무릎 수술하는 날 갈 수 없었던 제가 차 안에서 손 편지를 쓰면서 불효자의 눈물을 맛보았습니다. 다행히도 수술을 잘 마치고 회복이 되어 돌아오신 엄마는 제게 생일 선물이라며 엄마께서 아끼던 금팔찌를 제게 주셨지요 주시면서 이거 못 주고 죽는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제 팔에 걸어 주셨지요. 사랑하는 엄마 옆에 살면서 잘 해 주지도 못하고 막 대게 굴고 했던 작은 딸을 용서해 주세요. 사랑하는 엄마 우리 더 더욱 행복하게 살아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대로 아버지 몫까지 더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아요. 제가 더 잘 할게요  엄마.
 

2020.3.24 / 엄마의 소중한 딸 영임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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