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북면 대정교회 임재록 전 목사, 마을 주민들한테 칭송을 받다
공주시 장기면 제천리가 고향, ‘옥천은 나를 품어준 제 2의 고향’
마을 결혼, 장례 등 대소사까지 그의 손을 안 거쳐 간 것이 없어

대정교회 임재록 전 목사
대정교회 임재록 전 목사

매일같이 새벽 4시 전에 일어나서 누군가를 실어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15년 동안 아무런 댓가 없이 지속했다면 그것은 진정 ‘마음’일 것이다. 무엇이 필요한 지 살피는 것도 어렵지만, 제안하고 한두번 실행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한다는 것은 여간해서 어려운 일이다. 
 대전 역 앞 새벽시장에 동네 할머니들 운송을 매일같이 챙겼다고 하면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인가’하고 다시 보게 된다. 새벽 4시에 출발해 8시 쯤 돌아오는 일이니 만만찮은 일이다. 고스란히 귀한 잠잘 시간과 상쾌한 아침 시간을 빼앗기는 것인데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을회 동계 총무를 맡는다는 것도 괜한 시시비비에 휘말리고 말거리만 낳았다가 자칫 내동댕이 쳐질 수 있는 자리다. 공금을 관리한다는 것은 더더욱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삐끗하면 괜한 구설수에 휘말려 ‘마음’만 괴로운 일이 될 수 있다. ‘장’처럼 폼 나는 일도 아니고 표나지 않게 살림살이 잘 챙겨야 하는 책무는 나서서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자리를 여든살 될 때까지 20년 동안 하고 있다니 흔치 않은 일이다. 
임재록(80, 군북면 대정리 거먹골) 전 목사다. 군북면 긴급민원대응반 김기영씨가 참 선하고 고마운 사람이라고 추천한 이다. 인상이 때론 살아온 궤적을 말해준다. 현재의 삶이 또 그를 말해준다.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타향살이하며 마을 목회를 일궈왔던 퇴직한 목사를 그냥 내치지 않았다. 고향도 아닌 곳에 목사에서 퇴직하면 자칫, 마음 몸 둘곳 없을 수도 있다. 마을 주민들은 옛날 마을회관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임재록 전 목사는 일정정도의 마을기금에 돈을 보태고 마을회관을 새 터전으로 삼았다. 
사람들이 오가면서 마실오는 쉼터가 됐다. 임 전 목사는 사람들을 반가이 맞는다. 언틋 보면 전 목사라는 느낌보다 마을과 같이 늙어가는 여느 시골촌로와 같다. 35년 세월 동안 낯선 땅 거먹골에서 살아가면서 그는 마을과 한 몸뚱아리가 되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많이 배웠다고 했다. 벼농사 밭농사 적지 않게 지으면서 고령농이 되었다. 
여든살, 모든 것을 내려놓을 법한 나이임에도 그는 마을의 궂은 일을 도맡아 여전히 하고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새벽3시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더블캡에 시동을 걸고 대전역 새벽시장에 갈 할머니들을 태운다. 짐칸에는 할머니들이 팔 농산물을 가득 싣고서 말이다. 새벽시장에 내려주고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7시나 7시30분 쯤에 새벽장을 파하면 다시 싣고 온다. 거먹골에서 대전으로 나가는 아침 첫 차는 7시다. 그 버스를 타고 가면 물건을 팔수야 있지만, 제값도 못 팔고 다 못 팔기도 했다. 할머니들은 새벽시장을 가고 싶어했는데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었다. 목회활동을 하면서 그 마음을 읽어낸 임재록 목사가 기꺼이 자처한 것이다. 몇 번 했다 안 하면 괜한 욕만 먹기 십상이다. 꾸준히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터. 하지만, 그는 이 일을 15년째 하고 있다. 교회에 다니든, 안 다니든 상관하지 않고 마을 주민으로 태워준다. 아내도 가끔 동반해서 할머니들 곁에서 물건을 판다. 물건을 좋은 값에 다 팔았다고 하면 그 말 만큼 보람차고 내 일처럼 기쁘다. 그에겐 어떤 말씀보다 그런 말들이 ‘복음’이다. 주일 예배하는 일요일만 빼고, 물건 팔게 별로 없는 겨울만 제끼고 시계추처럼 매일 했다. 
“큰 교회가 아니라서 가능한 일이었죠. 새벽예배가 있으면 그거 준비하느라 하지 못했을 텐데. 어째튼 할머니들 태우고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지요”
때론 불법 용달꾼이라고 신고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그에게 새벽시장 출입은 진정한 ‘새벽예배’나 진배 없어 보였다. 
그 뿐이랴. 마을에 필요한 것들은 하나둘 대신 사다주었다. 허물없이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 임재록 전 목사를 칭송하는 이유이다. 

 

■ 마을 동계 총무를 25년 동안 맡다
“처음에 들어올 때는 마을에 체계가 잘 잡혀 있지 않았지요. 그래도 제가 이것 저것 배우다보니까 마을에 체계를 잡는데 보탬이 될까 싶어 마을 동계 총무를 자처했어요. 제가 이런 저런 조언을 하니까 그럼 임 목사님이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하길래 마을에 도움이 된다면 제가 해보겠다고 나선게 벌써 25년 째에요.” 노인회장도 아니고 마을 동계 총무를 여든살 전 목사가 맡는다는 것은 옥천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인 것 같다. 군북면 대정리는 이장은 행정과의 가교 구실을 하고 동계가 있어 마을기금은 동계장과 동계 총무가 관리한다. 전 마을 주민이 회원이고 약 2천여 만원의 마을 기금을 관리하는 일이다. 신뢰가 없으면 맡길 수 없는 일이다. 
마을 일을 문서화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돈만 관리하는 것 뿐 아니라 모든 마을의 대소사를 스스로 챙기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 자식들이 결혼을 하면 철필을 학교에서 빌려와 청첩장을 등사해서 찍어서 배포하는 일도, 마을에 누가 돌아가시면 염도 직접 하며 장례 치르는 방법부터 시신 안장까지 다 안내를 해줬다. 주민들이 임 전 목사가 하는 걸 보더니 너도나도 부탁하더라. 
“제가 돕고 싶었지요. 마을에서 쓸모가 되었으면 했지요. 그래서 하다보니 이것 저것 많이 하게 되었네요.”

 

■ 그는 어떻게 거먹골에 스며들었을까
충남 공주 장기면 제천리가 고향이다. 지금은 세종시로 편입되어 장군면으로 되었지만, 그는 거기서 태어나 당암초등학교, 공주영명중학교를 졸업하고 김천에 있는 성경신학교를 졸업했다. 9남매 중 둘째로 어려서부터 위장 쪽이 좋지 않았다. 김천 성경 신학교는 목회를 하기 보다 요양차 간 곳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에도 몸이 좋지 않아 군대를 가기 어려웠다. 몸이 아픈데 군대도 못 간다고 생각하니 서러웠다고 했다. 그래서 악착같이 가려던 차에 서대전역 인근에서 행정병을 모집하는 펼침막을 보고 응시해 40일간의 교육을 받고 논산훈련소에 배치돼 군복무를 했다. 일부러라도 군대를 빠지는 추세에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가려했다는 것은 그에게 젊은 시절부터 어떤 ‘사명’의 기운이 내재되어 있는 듯 하다. 몸이 안 좋아 훈련받는 과정에서 고통은 컸지만, 3년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는 정치활동을 했다. 당시 야당으로 출마한 박찬 국회의원 후보 집사 구실을 하면서 그 집에서 기거했다. 65년에 군 제대하고 정치 활동에 뛰어들면서 읍면단위 청년조직을 만들었다. 9까지 가야 정상에 갈 수 있다는 일념으로 이른바 3,6청년회라는 것을 조직해 청년 조직을 해서 선거에서 몇 차례 당선의 영광을 누렸다. 그는 정치 뿐 아니라 지역 운동에도 앞장 서 면단위 농협을 만드는 데도 역할을 했다. 78년까지 13년 동안 정치활동을 했지만, 몸이 좋지 않아 그만뒀다. 선거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다 한자리씩 차지했지만, 그는 조용히 신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목회활동을 처음 한 곳은 연산이었다. 그 후 계룡에서 2년, 서울에서 2년 목회활동을 하다가 시골 오지에서 목회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부러 찾아다녔다. 누군가 전해주더라. 대전 인근의 군북면 대정리에 교회가 없어 개척교회로 하면 좋을 것 같다고. 그 말이 한번 듣고서 잊혀지지 않았다. 교육전도사 3명이 직접 다녀오고서 거기는 할 곳이 못 된다고 했지만, 머릿 속에 여전히 맴돌았다. 84년 4월 대전에 모임이 있어서 왔다가 일찍 파해 시간이 남길래 택시를 타고 한번 가봤다. 대정리에 가서 대정국민학교 선생님들을 만나고,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 선생님 한 분이 자기 집도 보여주고 별채에 머물 수 있도록 빌려주겠다는 말까지 들었다. 서울에 와서 15일간 그 문제를 갖고 기도를 드리다가 가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서울교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온 가족이 함께 트럭에 짐을 싣고 내려갔는데 신도들이 옥천까지 쫓아왔다. 그런데 교회당이 없었다. 땅도 없었다. 전전긍긍하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당시 이장을 보던 김영일(87, 대전)씨가 봉투 하나를 던져 주더라. 그 봉투 안에 140만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현 대정교회 부지 180평을 사서 교회를 지을 수 있었다. 땅 사는데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땅 주인이 안 팔려는 것을 마을 주민들이 술을 받아놓고 먹이면서 구슬러서 살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마을 주민들의 은혜를 입었고 살면서 갚고 있는 지도 몰랐다. 지금 그는 100세인 장모를 모시고 마을에 산다. 여전히 마을 동계 총무를 맡고 있고, 마을 할머니들 새벽시장에 데려다 주면서 마을일과 농사를 병행한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으로 늘 반겨주며 마을의 둥구나무를 닮아가는 것 같았다. 옛날 마을회관 자리에 그가 산다. 그 앞에 커다란 둥구나무가 있다. 그렇게 그는 마을주민과 함께 나이테를 하나하나 그려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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