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옥 (시인, 옥천군문화관광해설사)

벌써 입춘을 보낸 절기는 우수를 지나고 있다. 이미 전성기를 보낸 추위는 기세가 한풀 꺾이어 산마루를 넘어 서고 있다. 올해는 유독 따뜻해서인지 앞뜰 산수유 꽃봉오리가 부풀대로 부풀어 올라 만삭이 되어있다. 훈풍의 바람이 살랑인다. 조금만 있으면 살기 어린 꽃샘추위도 경계를 허물고 팽팽했던 땅으로 내려앉으리라. 

나는 눈꽃처럼 하얀 배꽃이 흐드러지게 필 산등성을 떠올리며 배 밭으로 향하였다. 스치는 바람결이 한결 온화 해져있다. 지난겨울 나목이 되었던 나뭇가지마다 물이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한 계절이 지나면 한 계절이 오듯 자연의 이치다. 그 자연 속에서 나무도 사람도 서로 가지를 비비며 살아간다. 

자연의 법칙을 배우기 좋은 이봄, 하얀 입김을 내 뿜으며 싹둑싹둑 날 선 전지 가위질을 하고 있다. 잘린 배나무 잔가지들이 사다리 발밑으로 떨어진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기 빠진 배처럼 배나무에 매달려있는 큰오빠. 넉넉지 않았던 3남2녀의 장남으로서 가장 아닌 가장이었던, 하늘처럼 넓고 컸던, 삶에 무게도 감당하기 힘이 겨웠으리라. 

남은 것 나눌 것도 없이 다 주워도 괜찮다던 큰오빠가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반긴다. 웃는 모습이 마치 안동 하회마을 양반 하회탈과 같다. 축 처진 눈초리가 세월만큼 깊어진 광대뼈 주름과 맞닿아 있다. 입춘을 건너온 햇살이 꼬들꼬들 무말랭이처럼 말라가는 한낮, 오빠의 얼굴에 넉넉한 미소가 배꽃처럼 화사하다. 

늘 땅 한 평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하더니, 몇 해 전 이곳에 땅을 사고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던 오빠부부는 생전 처음 삽과 호미를 들었다. 척박했던 땅을 손에 물집이 생기고 불어 트도록 일구고 배 나무을 심었다. 꿈을 모내기 하듯 한 그루 한 그루 정성을 들여 가꾸고 보살폈다. 겨울동안도 밑거름을 내며"자고로 질 좋은  과실은 햇볕과 밑거름을 듬뿍 줘야 건강하고 달달 한 뱁여"하며 푹 썩어 콩고물 같은 거름을 땅에 뿌리고 파고 넣어주었다. 낮과 밤을 배에 관한 서적을 뒤적이며 농업기술센터의 자문을 받아가며 정성을 쏟았다. 그 결과 가을이면 꿈처럼 탐스런 누런 배가 주렁주렁 열렸다. 다른 농장의 배보다 당도가 좋다는 전문가의 입증도 받았다. 아마도 정성도 들어갔게 지만, 이곳 배 밭의 지형이 양쪽에 야트막한 야산과 양지바른 골짜기라서 물 수량도 좋고, 산자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일조량과 맑은 공기도 한 몫 했으리라. 

봄 햇살에 큰오빠의 하얀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더욱 더 배꽃처럼 희게 보였다. 

긴긴 세월 뾰족했던 삶에 고르지 못했을 굵고 자잘한 멍 자국이 삶에 무게였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눅눅해져온다. 갑자기 싸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시린 눈으로 하늘을 보니 청명한 하늘에 새털구름이 흰 물감을 흩어 놓은 듯하다.

키보다 꿈이 웃자라던 어린 시절, 오래되어서 기억이 시원치 않지만 나와 4살, 11살 정도 차이가 나는 오빠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오빠들이 가는 곳이라면 울면서 기를 쓰고 따라다녔다. 

한번은 추운 겨울이었다. 동네를 벗어나 들길을 따라가면 큰 연못, 작은 연못이 있었다. 큰 연못에 스케이트를 타러 간다고 했다. 추워서 안 된다고 하는데도 때를 쓰며 따라나섰다. 나는 큰오빠 등에 업혀 신이 났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큰 연못 방축에 버려진 나는 추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 두 오빠는 노는데 팔려 안중에도 없었다. 참다 참다 못해"큰 오빠! 작은오빠! 이제 그만 집에 가."울며 아무리 불러도 나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때 뒤늦게 온 동네 오빠가 그 광경을 보고 소리 질러 오빠들을 불러왔었을 때는, 내 얼굴은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두 볼은 빨갛다 못해 새파래져 있었다고 한다. 그때 기억인지 들은 기억인지는 잘 모르겠다. 작은오빠는"형 엄마한테 이를 거여"앞 뒤로 오가며"형만 신나게 놀았다고"협박을 했다. 큰 오빠는 화가 나서"너 이르면 가만 안 둬"하며 잡으려 했다. 작은 오빠는 먼저 저 만치 뛰어 달아나 집으로 갔다. 내가 업혀 있어서 빨리 뛰지도 못하고 기가 죽어 어깨가 축 처졌던 큰 오빠, 아련했던 추억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화살보다 더 빠른 세월 앞에 하늘만큼 땅만큼 컸던, 큰오빠의 얼굴 가득한 주름살은 배나무 잔가지와 같다. 그 가지들이 아프게 가슴을 찌른다. 5남매의 맏이로서 배려와 양보를 미덕으로 살았을, 언제나 질척이던 진흙땅처럼 녹록치 않았던 한 생이 맵찬 바람에 다시 등이 떠밀리고 있다. 배나무에 매달린 경건한 일상이 햇살에 반짝인다. 큰오빠는 쪼그라든 어깨를 내밀고 남은 생을 가지치기하고 있다. 

거친 눈보라를 이겨낸 꽃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 향기로 녹록치 않았던 삶의 여정이 향기롭고 아름다워지길 간절히 바래본다. 

머지않아 보드라운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순백의 배꽃이 활짝 피어 온통 산골짝을 하얗게 물들이고, 만(萬) 벼랑 너머 조롱조롱 초록망울 맺히면, 마음은 한없이 달이 뜨고 봄은 깊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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