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래 (금산 간디학교 교사)

이번주부터 금산간디학교 이덕래 교사가 책 소개를 연재합니다. 이덕래 작가는 2016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서랍속 블랙홀'이란 작품으로 데뷔한 작가로 SF소설에 관심이 많습니다. 옥천에도 간디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덕래 작가가 소개한 다양한 책의 세계로 한번 흠뻑 빠져보시죠. <편집자주>

대학 시절 학교도서관에서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를 찾고 웃었던 게 기억난다. 그 책은 690번 대 분류되어 '오락, 스포츠' 분야 서가에 꽂혀 있었다. 그래서 사서에게 가서 이 책은 '문학' 쪽에 분류되어야 한다고 말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안녕하세요, 저기..." 이러면서 책을 내밀지 않겠는가?

"무슨 일이시죠?" 뿔테 안경을 쓴 사서는 턱을 올리면서 나와 책을 번갈아 쳐다볼 것이다.

"이 책은 낚시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네? 그런가요?"

"이 책은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대표 작가인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입니다."

당시 사서가 자리에 있었거나 비웠거나 여자였거나 남자였거나, 기억나는 것은 없다. 나는 사서에게 가서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그리고 그의 책 '미국의 송어 낚시'에 대해 말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수줍음이 많다. 

어쩌면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은 어디에 꽂혀 있든 상관없겠다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리처드도 도서관의 분류 따위엔 별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헤밍웨이처럼 총으로 자살했다. 그래서 그에게 한국의 한 국립대학 도서관에서 당신 책이 스포츠 쪽에 분류되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그는 이메일이 없는 시절인 1984년에 죽었다. 아마도 그는 이메일 계정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책은 지금도 내가 다니던 대학교 도서관의 레저 쪽에 꽂혀 있을까?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일어 웹브라우저를 열어 검색했다. 그 짧은 순간 내 심장 박동은 근 십 년 만에 처음으로 160을 넘겼다. 

'843 ㅂ956ㅁ' - 시간이 많이 흘렀고 누군가는 사서에게 말했음이 분명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미국의 송어 낚시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미국 캘리포니아 어딘가로 출장을 가는 낚시광 교수가 사서에게 흥분해서 재분류 신청을 했을지도 모른다. 주위에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참 많으니까. 어쩌면 그는 제목만 보고 이 책을 대출해서 미국으로 날아가는 아시아나 항공에서 기내식으로 나온 생선구이를 먹으면서 펼쳐 봤을 수도 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기에 이 작가에게 완벽하게 홀렸는지도 모른다. 당시 내게는 어려운 책이었지만, 그의 책은 제목부터가 근엄한 농담 그 자체였다(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다). 이렇게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나는 그의 한국어 번역본을 모두 가지고 있고, 그의 대표작인 '미국의 송어 낚시'와 '워터멜론 슈가에서'를 두 번씩이나 읽었다. 심지어 나는 그의 책을 번역한 사람 이름도 외우고 있다(그의 책은 모두 김성곤이라는 사람이 번역했다).  

오늘 저녁 집에 돌아가면 내 책장 한 곳에 리처드 브라우티건 책을 모아둘까 생각한다. 그가 하얀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뒷짐을 진 채 무슨 동상 옆에서 히피처럼 보이는 여자와 함께 있는 사진을 출력해 액자에 담아 두면 세계 유일의 리처드 브라우티건 컬렉션이 완성될 것이다. 어쩌면 일본에는 나 같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중국 가정에 모셔놓은 가족 위패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작년 여름에 이 책이 나오자마자 샀지만, 바로 읽지 않았다. 사실 50페이지가량 읽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영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햇볕이 잘 드는 거실 한구석에 '샀으나 어쩌다 보니 읽지 않은 책' 칸에 두고 반년 이상 지나서 다시 펼쳤다. 빨간색 책갈피 끈으로 표시한 페이지부터 읽을까 다시 처음부터 읽을까 고민했다. 잠깐일 뿐이었지만, 유대인을 이끈 모세와 같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지는 무거운 결정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읽었지만, 어디에서부터 읽든 큰 차이가 없었을 것 같다. 아마 맨 뒷장부터 읽어도 이 책이 주는 느낌은 비슷할 것이다. 반년 동안 묵히면서 내가 많이 변했거나 책이 숙성되었나 보다. 이번엔 아주 잘 읽혔다.

이 소설은 소설과 시의 딱 중간에 위치한 것 같다. 각각의 글들이 길지 않아서 산문시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짧아서 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무엇이 산문이고 무엇이 시인가는 내가 피하고 싶은 논제 중 탑10 안에 든다. 많은 문장이 참신하고 상징적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풍기는 아우라가 놀랍다. 낯설게 하기 천재라고나 할까? 그에게는 일상적인 것에서 삐끗대는 것을 감지하거나 어긋나 있는 것을 찾는 날카로운 감각, 그리고 그걸 기막히게 표현할 수 있는 비유 능력이 있다. 

"벨이 일곱 번 울리고 여덟 번 울리려 한다. 벨소리를 너무 열심히 듣다 보니, 그녀의 아파트 어두운 방에 들어가 전화기 옆에 서서 벨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다." P97

그는 어떤 여자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는 벨소리를 따라 그녀의 방에 들어가서는 냉장고를 열어보고 탁자 위에 놓인 뜯지 않은 채 쌓여 있는 청구서를 본다.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전화선을 따라 그는 그녀의 방에 이미 있다.

"나는 다음 달 받을 우편물이 아주 따분하고 흥미로울 게 없다는 내용의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그랬다. 내가 받은 우편물이라고는 청구서와 광고 전단지 그리고 사소한 것들뿐이었다. 우체부가 오는 것을 보면 눈이 서서히 감겼다. 때로는 봉투를 개봉하면서도 졸았다." P150

꿈마저도 이렇게 현실적이고 건조하다. 너무 심드렁해서 무섭기까지 하다. 그는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는 현실을 이렇게 표현했다. 미국에서의 삶이란 이렇게 따분하고 돈만 밝히고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그는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맨 뒤의 서평을 보니, 미국적인 것에 신물을 느낀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동양적인 것에 희망을 건 것 같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은 두서없이 도쿄, 캘리포니아, 몬태나를 오가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문화를 비교하는 글들이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한 것 같다. 곧 삶을 스스로 마감했으니까. 
그의 차분하고 건조하면서도 서정적이면서도 섬세한 글들을 보며, 그가 보통 사람들처럼 적당히 무딘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고 믿게 된다. 그는 느긋해 보이나 불안하게 날카롭다. 나는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다. 무디지만 날카로운 칼이라는 표현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다. (끝) 

도쿄 몬태나 특급열차(리처드 브라우티건 저, 비채)
도쿄 몬태나 특급열차(리처드 브라우티건 저,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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