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민낯

제헌 헌법초안(制憲 憲法初案)大韓民國 (1948年) / 兪鎭午(1906~1987) 縱 22 cm, 橫 15 cm 厚 cm / 高麗大學校博物館
제헌 헌법초안(制憲 憲法初案)大韓民國 (1948年) / 兪鎭午(1906~1987) 縱 22 cm, 橫 15 cm 厚 cm / 高麗大學校博物館

 

장동석: 해방 이후 정부 수립과 관련한 자료를 보니 1948년 6월 유진오 박사가 입안한 헌법 초안은 내각책임제였는데, 본회의 상정 직전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수정되었더군요. 

김삼웅: 당시 정세는 아주 복잡미묘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도 그렇고 국내에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내각책임제를 선호하는 입장이었어요.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면 상황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본 것이죠.  

장동석: 김구 선생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나요? 

김삼웅: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1940년대 임시정부는 전시 내각이니 주석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지만 해방공간에서는 내각책임제로 권력을 분산하는 게 맞다고 본 것이죠. 헌법 초안에는 내각제였는데,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주장함에 따라 간선 대통령제(임기 4년, 1회 중임 가능)를 채택한 제헌헌법이 완성되어 7월 17일 공포되었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돌아가셨고,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은 단독정부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보니 거의 유일하게 남은 게 이승만입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공개된 비밀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런데 이승만이 대통령중심제가 아니면 안 하겠다고 버틴 겁니다. 이승만의 권력 야욕이 확실하게 드러난 거죠.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당시 이승만이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는데, 1년 6개월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습니다. 중국은 위험하니까 미국에 눌러앉아 있는 게 좋다고 판단한 거죠. 그러면서도 명함에는 임시정부 ‘프레지던트’라고 직위를 명시했어요. 미국에만 있다 보니 대통령이 제일 높은 지위로 보였을 겁니다. 그래서 시정을 요청했지만 듣지 않자 임시정부 의정원이 할 수 없이 대통령으로 호칭을 바꾼 겁니다. 이런 것만 봐도 이승만의 권력에 대한 고집과 집착은 남다른 데가 있어요. 한마디로 권력지향적인 거죠. 그래서 우리 제헌헌법이 이승만을 위한 대통령중심제로 하루아침에 바뀐 겁니다. 우리 헌정사가 불안한 이유는 시작부터 첫 단추를 제대로 꿰지 못한 데 있습니다. 한 사람의 야욕에 의해서 국가의 기본인 헌법이 애초부터 망가졌으니까요. 국가의 최고 법규인 헌법이 한낱 개인의 야욕이나 권력 욕망, 장기 집권의 장식품이 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장동석: 앞서 한민당에 대해 잠시 말씀하셨지만, 이 과정에서 한민당의 영향력이 상당히 많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죠?

김삼웅: 김성수를 비롯한 한민당 사람들은 원래 지주계급 출신이잖습니까. 지주계급 출신들은 자신들의 친일 행적 때문에 처음에는 임시정부를 봉대한다고 했습니다. 여운형 선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 때 참여하라고 하자 임시정부를 봉대한다면서 한발 뒤로 뺐지요. 처음에는 그럴 생각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고 보니 임시정부는 개인 자격으로 들어왔고, 미 군정이 권력의 실세가 되었어요. 미 군정이 이승만의 뒷배를 봐주는 것 같으니까 그때부터 미 군정에 이어 이승만을 도와서 제헌국회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미 군정 산하 입법기관으로 민주의원5)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민주의원에도 이승만 세력이 많이 참여했죠. 미 군정장관이 임명하는 사람들이었으니 당연할 수밖에요. 앞서 말한 미군 선발대에 일본군이 제공한 거짓 정보 때문에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소외되고, 오히려 친일파들이 민족주의자로 분장을 해서 다수가 민주의원에 들어간 것이죠. 그리고 제헌의원에도 김구 선생 등 민족주의 세력이 참여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한민당 세력이 제헌국회의 중심이 된 겁니다.

장동석: 하지만 한민당은 이승만과는 달리 내각책임제를 선호했습니다. 이 상황은 어떻게 전개된 것인가요?

김삼웅: 한민당이 내각제를 추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승만을 얕잡아봤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이 국내 정세도 모르고 세력도 없고 하니 대통령으로 뽑고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되어 실권을 장악한다는 계획이 있었던 거죠. 대통령을 국회에서 뽑기 때문에 김성수 세력으로서는 자신만만했던 겁니다. 사실 이승만은 30여 년을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국내에 변변한 인맥과 조직이 없었어요. 그런데 한민당은 토지, 돈, 신문사까지 있는 겁니다. 각종 정보까지 독차지한 상황이었던 거죠. 미 군정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상당수가 친일 전력자이기에 한민당은 그들까지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걸 이승만이 꿰뚫어본 겁니다. 그래서 이승만은 김성수를 국무총리로 지명했다가는 뻔히 자기가 허수아비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이론가인 조소앙 선생을 국무총리로 앉히려고 했던 것이죠. 여론도 있고, 건국 강령 등을 전부 조소앙 선생이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소앙 선생도 만만치 않은 분이죠. 워낙 이론이 강하고 민족주의가 투철한 분이셨으니까요. 그래서 광복군 출신 이범석을 국무총리에 앉히고 국방부 장관까지 겸직시켰어요. 한민당으로서는 시쳇말로 죽 쒀서 뭐 좋은 일 시킨 꼴이 되고 만 거죠. 자기들이 실권을 장악하려고 했는데 내각제도 성사되지 않고 국무총리 자리마저 빼앗겼으니 말입니다. 장관급 인사에서도 한민당 계열은 핵심에서 제외되고, 시시한 자리만 차지했어요. 

장동석: 한민당으로서는 뿔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로군요. 

김삼웅: 이승만과 한민당은 어차피 오래갈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대목이 있는데, 이승만이 대단한 혁명가는 아니지만 정치가로서는 노회한 면이 있어요. 조봉암 선생을 농림부 장관에 임명한 겁니다. 당시 국민의 80퍼센트 이상이 농민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정치력이죠. 죽산 조봉암 선생은 독립운동가이면서 조선공산당 창립 멤버이기도 합니다. 해방 후 전향해서 반공주의자가 되었고, 제헌국회에 참여해서 국회 부의장까지 지냈습니다. 제가 『죽산 조봉암 평전』을 쓸 때 자료를 살펴보니, 독립운동을 얼마나 치열하게 했는지 모릅니다. 신의주 감옥에서 8년을 옥살이했는데, 그때 손가락 여덟 개가 동상에 걸렸어요. 당시 신의주 감옥은 춥고 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수감되어 고문을 받았죠.
이승만이 조봉암 선생을 농림부 장관에 임명한 것은 두 가지 배경이 있어요. 하나는 한민당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죠.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조봉암을 통해 지주계급이 중심인 한민당 사람들의 토지를 몰수하려고 한 거죠. 한민당을 제지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출신의 조봉암에게 칼을 들게 한 겁니다.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입니다. 또 하나는 미국의 입김입니다. 비록 분단 정권 수립에는 이승만을 지원했지만, 초대 내각의 면면을 보니 모두 보수 세력이거든요. 이렇게 되면 UN 감시 아래 남한 총선거를 실시한 터라 국제사회의 여론이 무척 신경 쓰였을 겁니다. 이런 여론을 감안해서 미국이 사회주의 계열인 죽산을 농림부 장관으로 추천했다는 설이 있어요. 미국으로서는 이승만과 조봉암을 다 써먹은 셈입니다. 

장동석: 조봉암 선생의 토지개혁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강도가 높았죠? 

김삼웅: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남한은 미 군정이 거부하여 정부 수립 후에야 뒤늦게, 그것도 다소 모자란 측면이 있습니다.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했으니까요. 문제는 시기예요. 해방 후 3년이 지난 1948년 후반부터 농지개혁을 했는데, 그사이 지주들은 이런저런 편법으로 땅을 다 팔아넘긴 상태였어요. 차명으로 넘겨줬지만 실소유주는 그대로였죠. 한민당의 완강한 저항에도 그나마 토지개혁을 해낸 건 모두 조봉암 선생의 공입니다. 
6·25전쟁 때 북한의 전략가들은 인민군이 내려가면 남한 농민들이 모두 환영할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당시 미군이 모두 철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김일성은 삼팔선만 돌파하면 남한 점령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랐어요. 비록 손바닥만 한 땅뙈기였지만 농민들이 토지를 유상분배라도 받았기 때문에 인민군에게 오히려 저항했던 것입니다. 더러는 강압에 의해 지지도 했지만 다수는 인민군을 지원하지 않았어요. 조봉암 선생이 한민당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토지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인민군을 환대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토지개혁 이후 조봉암 선생의 인기가 대통령보다 좋았어요. 국민들이 조봉암 선생의 손가락 마디가 없는 손을 붙잡고 ‘대통령 하셔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정보를 보고받고 이승만의 심사가 얼마나 뒤틀렸겠어요. 그래서 한 1년 만에 쫓아내버리고 감찰기관을 동원해서 뒷조사까지 한 겁니다. 그런데 막상 뒤져보니 아무런 흠이 없었어요. 조봉암 선생이 장관 할 때 국제회의차 외국에 다녀오는 사이에 누가 미군이 쓰던 냉장고를 하나 갖다주었는데, 그거밖에 없었어요. 그걸 감찰기관이 흘렸고, 보수 신문이 대서특필했어요. 

장동석: 냉장고가 뭔지도 모르는 시대였으니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김삼웅: 여담입니다만, 4·19혁명 당시 시민들이 이기붕의 집에 쳐들어갔을 때 분노한 게 뭡니까. 그때가 4월인데 수박이 나온 거예요. 경무대야 말할 것도 없겠죠. 그때는 수박이 나왔는데 지금 권력자들의 집에서는 뭐가 나올까요? 

장동석: 진귀한 뭔가가 나오겠지요. 사실 이승만이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를 등에 업을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드러났는데요. 출신 배경도 그렇지만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통째로 들어먹기 위해 친일파를 수용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순간의 선택이었을까요? 어쩌면 오랜 계획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김삼웅: 이승만으로서는 기반이 없으니 그들을 등에 업을 수밖에 없었죠. 친일파들은 일제가 항복하자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불안과 공포를 느꼈을 겁니다. 젊은 층은 대부분이 군대나 경찰에 입대해서 자기 전과를 숨겼어요. 이승만에게 줄을 선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정권을 잡기 전부터 돈과 정보를 갖다주고, 라이벌을 죽여주기까지 했죠. 이승만 주변에는 일제 치하에서 관리나 법관, 경찰을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이승만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고, 친일파들은 자기 구명을 할 수 있으니 절묘하게 궁합이 맞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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