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낚는 강태공, 해빙을 맞은 시냇물처럼 잔잔한 일상
세월을 낚는 강태공, 해빙을 맞은 시냇물처럼 잔잔한 일상
  • 추억의 뜰 김경희 작가  
  • 승인 2020.03.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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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오 1938년생 동이면 수북리 출신
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45)

겨울 한파 속에 강태공들이 모였다. 옥천군 동이면 수북리 빙어낚시터. 드리운 낚시 대에 안간힘을 쓰지 않는다. 밤낮을 잊은 채 몰입하던 강태공들도 빙어낚시터에서는 유유자적이다. 깨끗한 빙질을 자랑하는 수북리가 고향인 정 선생님. 죽향 국민학교를 다니던 소년은 7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세월을 낚는 강태공이 되었다. 안내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옥천의 중고등학교에서 41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이제 해빙을 맞은 시냇물처럼 잔잔한 노년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다. 미술 선생님답게 입성이 깔끔한 노신사다.

■ 수북리 고향 마을처럼 때 묻지 않은 삶의 여정들 

우리 어린 시절 고향 수북리의 빙질은 깨끗한 유리 같았다. 청정지역이던 고향마을에 이제 우리 형제들은 살지 않고 친족들이 간간이 명맥만 유지하며 연일정씨가 일가를 이루었다는 흔적을 남겨주고 있다. 나는 부모님 슬하에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진오라는 이름은 오래'진' 깨달을 '오'를 쓴다. 죽향 국민학교 출신이며 옥천 중학교 대전 사범학교 충남대 법과 대학을 졸업했다. 죽향 국민학교는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학교다. 시골의 많은 학교들이 폐교의 수순으로 몰리고 있지만 아직도 건재한 학교다. 

1945년 죽향국민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이했고 6학년 때 6.25 전쟁을 만났다. 격동의 시대에 작은 아이였던 나는 학교 교사인 아버님이 만들어준 환경덕분에 또래의 친구들 보다 입성이며 교육의 여건이 좋았다. 친구들이 비오는 날 짚신신고 등굣길의 불편함을 감수할 때 나는 운동화를 신고 잰 걸음으로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유년시절의 나는 당시의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암울한 가난의 시기를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를 살아내야 하는 여건은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수북리에서 옥천중학교까지 4키로를 걸어 다녔다. 지금 아이들에게 10리를 걷는 다는 건 극기 훈련 코스에서나 있을법한 일이지만 우리 어릴 때는 10리 20리 걷는 건 당연했고 차편이 없어서라도 이동 수단으로 튼튼한 다리가 최고였다. 응석을 부릴 여유도 없었고 그때는 대부분 삶의 방식이 모두 그러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장질부사로 한 차례씩 홍역을 크게 치루면서 한 시대를 넘곤 했다. 2020년 3월 지금도 혼란의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살면서 1950년 1960년 그 때마다 치러야 할 홍역들이 있었고 또 다 지나간다는 것이다. 인생의 해답은 각자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1955년 옥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전 사범학교로 진학했다. 옥천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대전 사범에 가곤했는데 우리 동창생 세 명이 대전 사범에 합격했다. 내 진학의 동기는 가정환경이 주는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었다. 아버님은 삼양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이셨고 형님과 누님이 교편생활을 하셨다. 이후의 진로는 충남대 법대를 졸업하고 서울 공군사관학교 행정 특기병으로 군대생활을 하게 됐다. 신병 시험에서 1등을 한 덕분에 서울 대방동에서 군대생활은 얼차려와 기합에서는 자유로웠다. 내 인생이 극심한 우여곡절 혹은 종잡을 수 없는 파란만장으로 기억되지 않는 것은 비교적 평탄한 부모님 슬하에서 교사이자 소시민으로 안착하면서 살아 온 덕분일 것이다.

천중학교졸업(1996년) 앨범속의 정 선생님

■ 28살에 안내 초등학교로 초임 발령, 그 후로 41년간의 교사 생활

1966년, 법대를 나와 법조인으로서의 미래도 꿈꿔봤지만 28살에 교직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 후로 41년간 교사의 길을 걸었다. 시작은 언제나 설레듯이 작은 시골학교지만 선생님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자부심과 책임감이 동시에 있었다. 안내 초등학교 발령 후 근무 중 중등 교원 자격증 시험에 통과하고 30살에 안내 중학교로 다시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미술교사로 안내중학교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다. 도안 포스터 디자인분야에 관심과 감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 학년에 6반 한 학급에 60명이내의 학생들이 있었다. 1960년대 후반만 해도 안내는 시골 동네지만 읍내는 장터가 활성화되었고 공무원들이 많아서 젊은 사람들도 그 마을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지금처럼 나이든 마을이 아니었다.  

1966년 안내 초등학교 초임 발령 후에 아버지 친구 분의 중매로 아내를 만났다. 우리 연령대의 결혼풍속도가 자기 결정권으로 결혼 하는 것이 아닌 집안에서 정해주는 혼처와 결혼을 하다 보니 혼인이 의무감 같던 시절이다. 얼굴도 못보고 결혼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불합리한 결혼 제도속에서도 다들 해로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 세대들이 지금 젊은 세대들보다는 인내심과 책임감이 더 절실히 요구되는 시절을 살아온 덕분일까? 

당시의 결혼 문화를 되짚어 본다면 나는 행운아였다. 아내와 맞선 보기전날은 아내가 청주 사범출신으로 회남에 소재한 국민학교 교사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마음이 싱숭생숭 했지만 아내를 보고 마음에 들었다. 아내는 평소 내가 좋아하는 색상인 보라색 블라우스를 입고 나를 만나러 나왔다. 자태도 고왔고 마음 씀씀이도 큰 사람이었다. 긴 세월이 지났지만 첫 만남의 아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는 이미 천생연분이었던 모양이다. 

그날의 아내는 고왔고 지금의 아내는 귀하다. 나이로 어여쁨을 평가할 수 없다. 20대도 80대도 사람에게는 향기가 있다. 지금의 아내는 깊은 연륜으로 은은한 향기를 품고 있다.  

스물여덟 가을에 만나서 두 달 만에 그해 겨울 12월 17일에 결혼했다.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나도 뜨거운 청춘의 신혼시절이 있었다. 그 때 대전에서 가장 좋은 예식장인 대전예식원에서 결혼하고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 당시 최고의 결혼식 코스였다. 하와이나 진배없는 신혼여행지가 바로 온양온천이었다. 온천도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라 일생에 한 번 결혼식 때 누리는 호사였다. 그 조차도 없이 신혼을 시작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부자로 살지는 않았지만 소박하고 안정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대전 예식원과 온양온천은 향수 깃든 추억의 장소로 남았다. 우리는 부부교사로 출발했다. 

하지만 아내는 둘째를 낳고 아이들 교육에 전념하느라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아내가 근무하던 회남의 작은 학교도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폐교의 수순을 밟았고 아내는 나를 내조하면서 교편생활을 접어야 했다. 인생의 한 갈래 길에서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1999년 옥천중학교 명예퇴임식
 1999년 옥천중학교 명예퇴임식

■ 소읍의 미술교사, 아이들과 소박한 꿈을 그리다.

소읍에서의 교사 생활도 대과없이 천진한 아이들과 소소한 추억들을 남기며 인생의 41년이 교사로 기록되었다. 아이들과 청주 교육감 대회를 준비하며 미술실에서 늦게 까지 연습하고 좋은 성적을 거둬 희열을 맛보는 그런 시간들이 이제 잔영만 남았다. 

이원중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미술반의 유차연이라는 학생이 최근 5년 전까지 안부를 나누던 제자였다. 학교 다닐 때 열심이더니 그 제자도 대전 대신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었다. 제자들도 나이 들고 세월 속에서 잊혀지며 옅은 흔적으로 위안 받고 있다.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희미한 소풍이야기.

1970년대 시골학교의 소풍지가 뭐 특별할 게 없다. 호랑이 사자를 볼 수 있는 신기한 동물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풍은 주로 서대리 연못으로 낙점되었다. 저수지 보다 큰 연못이라 아이들에게는 학교를 벗어나 나들이 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김밥에 삶은 계란 칠성사이다 한 병이 곁들여지면 최고의 도시락이었다. 교실을 벗어나는 즐거움은 아이들도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연못에 볼 것이 뭐 있을까 만은 봄이면 연못가에 둘러 피는 진달래 철쭉만으로도 그날은 잔치다. 학부모님들이 준비해주는 선생님들 도시락도 김밥에 특별한건 없다. 그래도 양은 도시락에 켜켜이 쌓아주는 김밥만 봐도 학부모들의 정성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 맞으며 목을 넘기던 톡 쏘는 사이다 한 잔으로도 콧바람 시원하게 쐬는 날이었다.

대단한 것에만 명분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골학교에서 아이들과 생활하며 배웠고 오히려 소박한 삶속에서 하루하루의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미술시간 준비물을 챙기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그런 일로 혼내기에는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이미 그 아이들은 친구에게 준비물을 빌리는 그 시간에 마음을 앓고 있을 텐데 나까지 불을 지피고 싶지 않았다. 

미술교사로 안내 중학교 이원중학교 옥천고등학교 옥천여고 등에서 근무했고 모교인 옥천 중학교에서 59세로 퇴직하면서 현역에서 은퇴를 했다. 아버님으로부터 형님 누님 그리고 나까지 교편생활을 했지만 우리 4남매에게는 대물림되지 않았다. 미술 교사였던 나에게는 우리 큰 딸과 손녀딸이 그림을 전공으로 택한 것도 큰 위안이 된다. 

1996년 옥천중학교 전경

■ 노년에는 불청객도 벗 삼아야.

나의 하루 24시간 중 3할을 복지관에서 보낸다. 버스를 타고 10시에 가서 4시까지 하루를 잘 보내고 온다. 출 퇴근 하듯이 매일 정해진 일상이다.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1500원 짜리 점심을 먹는다. 바둑도 어차피 인생과 모형이 같다. 격동의 시절을 살아낸 인생 좀 아는 개선장군들이 모여 맞상대가 되고 훈수를 둔다. 앞에 앉은 맞수들은 젊은 시절 '나는 누구였소. 당신은 누구였소?' 라고 묻지 않는다. 그저 다리 튼튼하고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최고다. 나도 4급이라 쏠쏠한 재미를 보며 상대와 만나고 있다. 그렇게 나도 바둑과 장기 그리고 맞수들이 좋은 벗이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3주간 휴관중이라 일상이 많이 무료하다. 빨리 어려운 이 시기를 잘 지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일요일이면 9년째 출석하는 우리 '행복한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간다. 이제는 식구다. 몇몇 가정이 모여 예배를 드리지만 이름처럼 소박하고 따뜻한 교회다. 집에서 15분 거리. 예배 후에 일부러 산책삼아 집으로 걸어오는 길도 평안하다. 내 걷는 뒷모습이 발걸음에 힘은 없겠지만 아직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어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감사를 나눌 가장 큰 덕목이다.

나이 들면 좋은 벗들만 사귈 수 없다. 불청객과도 어울렁더울렁 지내야 한다. 다들 당뇨 불면증 고혈압이 손을 내민다. 나도 예외일수 없어 불면증과 만났다. 맞서 싸울 생각이 없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약으로 살살 달랜다. 그러면 그 녀석도 백기든 나를 받아들이고 잠을 청하게 해준다. 
소란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좋은 것만 취하고 살 수 없는 여건 속에서 타협하면서 한 발 물러서 동행하는 지혜도 필요한 시절이다. 결국,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행복한 교회' 사모님(좌측)과 아들 영목이 (우측)

아버지

한파를 지나고 봄이 되면 부모님 건강이 걱정됩니다. 

저도 아이들의 아버지이지만 부모님 계셔서 감사하고 위안이 됩니다.

일요일 아버지와 예배드릴 수 있어 또 감사합니다.

예배 후에 산책삼아 걸어서 집에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때로는 가슴 아프지만 저희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에 힘은 없지만 거동하실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지금처럼 복지관도 교회도 건강하게 잘 다니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 앞으로도 오랫동안 불러보고 싶은 이름입니다.

아들 영목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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