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본 오대리 버들개 나루터

 

지난 세월이 잠시 꿈을 꾼 거 같아. 어느새 여든을 훌쩍 뛰어넘어 인생의 가파른 고개 길을 걷고 있네그랴. 내 위로 오빠 셋, 언니 둘, 모두 6남매가 나고 자란 그리운 고향 옥천군 삼양리가 내 고향이여. 어머니는 나를 낳고 바로 돌아가셨데. 그래서 서너 살 때까지 큰 올케가 엄마인줄 알고 자랐어. 남들이 나를 얼마나 가여워했을까.

 

■ 가여운 아이였지만 사랑에 배고프지 않았다
큰 올케가 막내인 나를 조카의 젖을 나누어 먹이면서 키워 주었어. 어린 나는 올케를 엄마라고 불렀나 봐. 내가 5살 정도 되니까 이웃집 아줌마들이 큰올케라고 부르라고 시켰어. 그런데 천만다행인건 우리 올케는 천사고 나는 복둥이였어. 마음 고운 큰올케한테 구박도 별로 받지 않았어. 나는 집안일도 열심히 거들었지. 내 나이 17살이 되었을 때 인근 마을의 아줌마가 내가 손이 마디고 일을 야무지게 잘 한다고 동생의 중매를 섰어. 말하자면 그니가 손윗 시누이가 된 거지. 남편 얼굴 한 번 못 보고 사람 좋다는 소리만 듣고 바로 결혼을 했지.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9월에 나는 원삼 족두리에 남편은 사모관대를 하고 결혼식을 올렸지. 열일곱 수줍은 신부는 열아홉 신랑이 어떻게 생겼나 몹시 궁금했지만 내 가슴은 콩닥거리고 늘어선 이웃들의 걸쭉한 농과 왁자지껄한 웃음에 얼굴이 빨개졌었지. 아마 신부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볼에 붉은 연지를 찍은 것인지 몰라. 
결혼식을 마친 후 우리는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신랑의 고향인 안남면 오대리에 들어갔어. 
지금은 옥천읍 오대리가 됐지. 행정구역이 바뀌었다고 들었어. 오대리는 강가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버들개 라고도 불렀지. 시골 동네는 이름도 마을처럼 정스럽고 고운 이름이 많았어.
몇 가지 소박한 살림살이를 함께 실은 나룻배는 깊은 수심의 대청호 물살에 흔들렸지. 앞으로 펼쳐질지도 모를 내 인생의 풍파처럼 기우뚱했지만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의 흔들림에 눈이 다 부셨어. 그래서 잠시 위로 받았지. 그 위로처럼 시집살이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
작은 배에 익숙하지 않아서 몸이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했지만 신랑이 쑥스럽게 잡아준 
손에 힘이 들어있었어. 듬직했지.

 

■ 열일 곱 살 새댁 여든 넘은 할미, 다 꽃처럼 어여쁜 사람들
열일곱 어린 내가 시집살이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지만 새로운 삶에 잘 적응하며 아들딸 낳고 알콩달콩 살겠노라 다짐했었지. 오대리는 당시에는 100가구 정도인 큰 마을이었어. 대청댐이 수몰되면서 6~7 가구만 남아서 살고 있는데, 배가 없으면 걸어서 옥천읍을 나 올 수 없는 육지 속의 섬이 돼버렸지. 작년까지만 해도 집안산소도 마을에 있어서 명절 때면 아들과 내가 함께 갔는데 올해부터는 아들에게 전적으로 일임하였지. 친척도 몇 살고 있고, 집안 제사라거나 소소한 잡곡 등을 사러 아들 혼자 가기로 했거든. 신이 나서 노를 젓던 뱃사공 얼굴이 가끔 그리울 것도 같네. 

오대리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어. 자상한 신랑과 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았지. 결혼한 지 3년 만에 입대 통지서를 받고 신랑은 군대에 갔지. 면회를 갈 형편은 안됐어. 혼자 식구들 건사하고 농사지으며 어찌 살아야 하나 한숨은 나왔지만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열심히 농사를 지면서 남편을 기다렸어. 
다들 먹고 살기 힘든 시기였지만, 지독한 구두쇠로 쓸 줄은 모르던 시아버지 덕분에 오히려 궁색하지 않게 별 문제없이 살았어. 6.25 때 우리는 피난도 가지 않고 그대로 살았어. 북한군이 내려와서도 그렇게 괴롭히지는 않았던 것 같아. 우리 마을이 그때만 해도 가구도 많으니 사람도 많고 시내라 큰 피해가 없었던 거지. 
참 감사하게도 큰 풍파 없이 28년 함께 살았던 신랑은 속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어. 나는 큰아들 조규진, 향순, 규식, 귀정, 덕성, 막내 영옥이까지ن남매를 두었는데, 진작에 다 여웠지. 아이들은 제금 나서 가정 건사 잘 하고 살고 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여. 자식들이 벌써 손주들까지 봤으니 세월 참 빠르네. 47살에 하늘로 간 남편과 해로하면서 이 행복을 같이 보았으면 좋았으련만. 
꽃 중에서도 가장 예쁜 꽃이 사람 꽃이라고 하지. 
남편과 내가 만들어 낸 귀하고 아름다운 자손들.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고 자주 못 봐도 감사하고, 명절 때나 볼 수 있는 것도 다 고마운 일이여. 이제는 뭐 별 걱정이 없어. 내가 자식들의 속 썩이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부지런히 운동하기 시작했어. 80살까지 집 근처 산에 올라 운동기구로 운동도 했는데 이제는 그저 무리하지 않게 동네 산책하면서 걷기 운동을 열심히 하는데 걷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해.
옛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 그 시절 어떻게 살았나 싶기도 하지. 그 시절을 사는 것만으로도 참 힘들고 대간했지. 지금은 시대가 얼마나 좋아졌어! 나는 배를 많이 곯거나 심한 고생은 없었는데 두통이 심해서 고생을 많이 했어. 머리만 아프면 뇌신이나 명랑을 사서 먹고 머리에 헝겊을 질끈 동여매도 좀처럼 두통이 가시지 않았지. 아무 일도 못하고 누워있어야만 하는 날이 많았어.
어느 날 옆집 엄마가 귀를 뚫으면 머리가 안 아프다고 귀띔을 해 주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귀를 뚫고 은 귀고리를 했지 뭐여. 손거울을 보니 내 가 봐도 참말로 예뻐 보였지 뭐야. 아. 그런데 신기 하게 머리가 덜 아프고 일도 할 수 있게 되었지. 내가 마을에서도 처음으로 귀를 뚫고 귀고리를 해서 전파를 시켰지.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어. 아프게 하는 녀석들과 친구 먹어야지 싸울 작정을 하면 우리는 못 당해. 앞으로 봄날을 몇 번을 볼지 아무도 모르지만 올 봄은 유난히 기다려져. 진달래 꽃 화사한 눈부신 산허리가 많이 보고 싶어.

작가 이연자
작가 이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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