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43)
김영순(87, 군북면 대정리)

김영순(87, 군북면 대정리)
김영순(87, 군북면 대정리)

 

이번에 만난 사람은 군북면 대정리에 사는 김영순(87)씨입니다. 그의 이름 영순은 여자 이름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물론이고 군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호적에는 출생연도가 실제보다 2년 앞선 ‘1932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성장하며 두 살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1932년 태어난 누나가 있었는데, 이름이 바로 영순이었습니다. 그런데 네 살이 되던 해에 동네에 홍역이 돌더니 누나가 죽고 말았지요. 당시 두 살이었던 그는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아버지는 먼저 세상을 떠난 누나의 이름과 생일을, 역시 홍역을 앓다가 살아남은 그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누나의 이름과 생일을 그대로 물려받은 한 남자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눈만 뜨면 산에 가서 화전(火田) 일궈

나는 1934년 대전시 회덕면 법동에서 7남매(25) 중 여섯 번째(차남)로 태어났다. 옥천군 군북면 대정리 출신인 아버지는 대전 일대 공사 현장을 돌면서 석공(石工)으로 일하셨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법동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기간에 내가 태어났다. 예닐곱 살 때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아버지가 일하던 공사 현장까지 나르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40년 가족을 이끌고 귀향(歸鄕)했다.

죽은 누나의 이름과 나이로 취학 통지서가 나왔을 때 내 실제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바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어쩐 일인지 어린 내가 학교에 가고 싶다고 떼를 썼다고 한다. 그 바람에 나는 또래들보다 항상 2년 앞선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정초등학교를 다녔고, 대전역 앞에 있던 영수학관을 다녔다. 영수학관은 영어와 수학만 가르쳐서 중학교 과정을 1년 만에 마치는 특수학교였다. 나는 두 학교를 모두 걸어서 다녔다.

나는 군대에 입대한 시기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바로 단기 4288316일이다(단기 4288년은 서기 1955). 처음에는 3(36개월) 동안 복무하면 되는 병사로 입대했는데, 중간에 강제로 장기복무자로 분류되었다. 그래서 졸지에 군복무 기간이 7(84개월)으로 늘어났다. 요즘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그때는 많았다. 전역 당시 계급은 일등중사였다. 덕분에 제대 이후 예비군 소대장을 맡게 되었다.

군복무 기간 동안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다. 나는 사격에서 탁월한 성과를 냈다. 총을 쏠 때마다 표적을 정확히 꿰뚫는 바람에 부대를 대표해 각종 사격대회에 출전했다. 전군에서 가장 사격을 잘 하는 사람 12명을 뽑았을 때는 2등으로 합격하기도 했다. 12명을 국제사수(國際射手)’라고 불러주었는데, 우리는 연천 사격장에서 별도의 훈련을 받았다. 나중에 태릉 사격장에서 M1으로 주한미군과 사격 경기를 했는데 참패하고 말았다. M1이 서양인 체형에 맞춰 만든 총기인데다 훈련 당시의 규칙과 경기 당시의 규칙이 전혀 달랐다.

평생을 새마을지도자, 이장, 노인회장으로 헌신해온 김영순씨의 거실 한 구석을 각종 감사패와 표창장이 장식하고 있었다.
평생을 새마을지도자, 이장, 노인회장으로 헌신해온 김영순씨의 거실 한 구석을 각종 감사패와 표창장이 장식하고 있었다.

 

새마을지도자로 16, 이장으로 3년 헌신

1961년 제대하고 옥천으로 돌아왔으나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눈만 뜨면 산에 가서 화전(火田)을 일궜다. 그렇게 일군 화전이 4천 평이나 되었다. 땅 주인에게는 1천 평당 콩 한 가마를 도지로 주었다. 거기에 뽕나무를 심어서 누에도 치고 담배 농사도 지었다. 송아지도 사서 길렀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논 세 마지기(6백 평)와 밭 2백 평을 마련했다. 당시만 해도 땅 한 평에 쌀 3~5되 되던 시절이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땅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성실한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하던 해에 안내면 답양리 출신으로 나보다 네 살 어린 차복화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새마을지도자를 맡아주지 않겠나?” 1970년 어느 날 면사무소 간부 직원이 집으로 찾아와 던졌던 말이다. 예비군 소대장으로 리더십을 발휘해 왔으니 새마을지도자로 적임자라면서 설득하는 데 무조건 거부하기 힘들었다. 결국 청주에 가서 교육을 받고 돌아와 무보수 새마을지도자 16년의 임무를 시작했다.

새마을지도자로서의 첫 임무는 농로(農路)를 넓히는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농로가 너무 좁아 곡식이나 거름을 나르려고 해도 지게나 소달구지밖에 이용할 수 없었다. 농로를 넓히려면 주변 전답 주인들이 땅을 내놓아야 했다. 반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주민이 호응해주어 추진할 수 있었다. 관에서 지원해준 것은 불도저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주민들이 직접 해결해야 했다. 주민들이 삽과 곡괭이 등을 가지고 나와서 부역에 동참해주었다. 덕분에 농로에 경운기나 트랙터가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임무는 신작로를 뚫는 일이었다. 옥천과 보은을 연결하는 신작로부터 마을까지 이어지는 소로를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혀야 했는데, 그 길이가 6km나 되었다. 이 역사(役事)에는 와정리, 대촌리, 항곡리 3개 마을이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길가에 있던 집이 일부 헐리는 일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다수 주민들의 협조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나니 얼마나 좋은가라고 반응해주었을 때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까지 신작로가 뚫리자 버스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까지만 해도 옥천이나 대전을 가려면 큰 길까지 걸어 나가야만 했다. 이용희 의원의 소개로 도지사를 면담하고 버스 배차(配車)를 요청했다. 도지사가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실제로 하루 3회 버스가 마을 앞까지 들어왔다. 버스가 처음 들어오던 날, 주민들과 함께 돼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다.

 

아내와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었던 까닭

새마을지도자로서의 세 번째 임무는 지붕개량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대전에 있는 슬레이트 공장을 찾아가 계약을 맺었다. 1년 안에 대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외상으로 슬레이트를 공급받는 계약이었다. 담보가 필요하다고 해서 나와 아내가 피땀 흘려 마련한 전답 6백 평을 내놓았다. 그런데 일부 주민들이 대금을 제때 지불하지 못하는 바람에 담보로 내놓은 우리 땅 6백 평을 매각해야만 했다. 의지할 것이 땅밖에 없는 농사꾼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당시 우리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고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새마을운동에 헌신했던 지도자 개인이 피해를 보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수수방관했던 정부와 관청에 솔직히 섭섭했고 실망했다. 늦으나마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서 그나마 속이 시원하다. 당시에는 이런 발언조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새마을지도자로 16년 동안 활동한 다음에는 마을 이장을 맡게 되었다. 이장으로 3년 동안 일하면서 집중한 것은 마을에 전기를 끌어오는 일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항곡리까지만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한국전력 청주지사를 찾아가 허락을 받아내고 대전에 있는 업자와 계약을 맺었다. 공사를 모두 마치고 그해 추석날 저녁에 점등식 행사를 했다. 집집마다 백열구와 형광등이 밝혀지는 순간, 동네 곳곳에서 박수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마을지도자와 이장으로 활동하면서 마을의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장례(葬禮)도 그 중의 하나였다. 마을에서 누군가 돌아가시면 제일 먼저 나부터 불렀다. 시신을 수의로 갈아입히는 염()은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궂은일 중의 궂은일이었다. 나는 그 일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지방을 쓰는 것도, 부고를 만들어 돌리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장사가 끝날 때까지 사흘 동안 상가(喪家)를 떠나지 않았다. 나중에 장례식장(葬禮式場)이 생기면서야 나는 그 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군북면협의회장도 8년 동안 맡았다. 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사례 발표도 했다. 새마을지도자와 이장으로 활동을 마친 이후에는 다시 노인회 회장을 8년 동안 맡았다. 아내도 학부모회 회장, 노인회 회장으로 봉사했다. 당시 사람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 독수리인데, 일처리를 빠르게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첫째아들 대학 졸업식 기념사진. 사람은 가난해도 배워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자식들이 원할 경우 상급학교에 진학시켰다.
첫째아들 대학 졸업식 기념사진. 사람은 가난해도 배워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자식들이 원할 경우 상급학교에 진학시켰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식들이 자랑스러워

나는 젊은 시절 병원에 가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 하지만 팔순을 넘기면서 하나둘 아픈 곳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탈이 난 것은 눈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로 가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안과에 갔더니 빨리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택시를 타고 대학병원에 갔지만 의사들의 착오로 치료 시점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1급 시각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다. 노인회 회장을 그만둔 이유이기도 했다.

경운기 사고로 갈비뼈 두 개를 다쳤는데, 치료를 하다가 폐암을 발견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폐암 1기라서 수술을 통해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귀도 잘 안 들려 보청기에 의지해 산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거니와 더욱 겸손하게 조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그래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눅 들지 말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교차하는 요즘이다.

나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6남매(33)를 얻었다. 그리고 장남 재섭, 장녀 미순, 차남 훈섭, 차녀 미용, 삼남 병섭, 삼녀 미정이 모두 10(55)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 위치한 곳에서 자기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며 살아가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자랑스럽다.

 

장남이 보내온 감사편지

이제 우리가 아버님의 눈과 귀가 되어드릴게요

 

아버님.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고마운 날들이 있었는데 감사 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살았네요. 그래도 부모님이 해로해주셔서 이제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편지를 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옥천신문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편지를 쓰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 봅니다. 꽁보리밥 도시락이 창피하니 쌀밥을 해달라고 뒷산 너머 보리밭으로 일하러 가시는 어머님을 따라가며 조르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님에게 회초리를 맞았던 일, 모름지기 사람은 가난해도 배워야 한다면서 주변의 반대와 조소에도 불구하고 저를 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진학하도록 지원하고 격려해주셨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버님이 새마을 지도자와 이장으로 활동하셨던 일입니다. 우리 마을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만 되면 칠흑처럼 어두웠는데 아버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전기가 들어오면서 대낮처럼 밝아졌지요. 동네잔치가 벌어지던 그날, 술을 못 하는 아버님에게 감사의 표시로 주민들이 앞 다퉈 술을 따라주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고, 그것이 저로 하여금 대학에서 ROTC를 지원하게 만들었지요.

불과 2~3년 전만 해도 경운기로 농사일을 직접 하실 정도로 건강하셨던 아버님이 노환으로 시력이 나빠져 자식들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청력도 약해져 보청기에 겨우 의존해 자식들 목소리를 들으시고, 작년에는 폐암 수술까지 받으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안 걱정, 동네 걱정, 문중 걱정으로 여념이 없으신 아버님. 이제는 모두 내려놓으시고 넉넉하고 여유롭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 자식과 후손들이 아버님의 눈과 귀가 되어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장남 재섭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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