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민낯

지난해 옥천신문은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역 친일사와 독립운동사를 연재보도 했습니다. 이어 올해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과정을 보도 합니다. 
오늘날 사회 모순을 이해하려면 해방이후 현대사를 정확히 알아야합니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가 오늘날까지 우리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대안도 나옵니다.
2015년 출판사 철수와 영희는 ‘한국 현대사의 민낯’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과 장동석 출판평론가의 대담형태로 해방이후 왜곡된 역사를 바로 볼수 있도록 돕는다 평가됩니다. 이에 책 내용을 나눠 보도합니다. 
옥천과 직접적 관련은 없을지라도 여러 영향을 주고받은 우리 현대사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이승만과 김구. 미국은 자주 국익추구에 적합한이승만을 지지하고, 김구를 배척했다.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장동석 : 해방공간에서 임시정부가 국내에 들어오는 과정을 보면 정부의 법통 자체가 시작부터 무너진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해방이 되었음에도 우리 스스로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권한 자체를 상실한 상태였던 것이죠. 이 과정에서 신탁통치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렇다면 신탁통치는 위임통치안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봐야겠군요. 

김삼웅 : 미 군정이 임시정부를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하자 김구 주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정이 실시되고 있으니 대외적으로는 개인 자격이지만 한국 사람 입장으로 보면 임시정부가 환국한 것이다.”분명한 선을 긋고 시작한 것이죠. 반면에 이승만은 귀국에 앞서 미 국무장관 애치슨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습니다. “나는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 구역이 현재 미군에 의해 통제되는 군정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군정이 종식되기 전까지는 동 지역에서의 체류 기간 중 본인의 모든 활동이 동 기관의 법령과 규칙에 의해 통제받는 것에 동의한다.”이승만의 서약과 김구의 환국 선언을 보면 미 군정이 누구를 더 선호했겠습니까? 이때부터 이승만에 대한 선호가 시작되고, 김구 주석은 배척된 것이죠.
또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1945년 12월 30일, 임시정부는 신익희 내무부장 이름으로 임시정부 국자(國字) 포고문 1, 2호를 선포합니다. 당시에도 김구 선생이 주석이었는데, 이것이 미국과 대립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첫째가 ‘미 군정청 산하의 모든 한인 직원들은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아라’입니다. 사실상 미 군정에 선전포고를 한 겁니다. 둘째는 ‘모든 국민은 임시정부의 지휘 아래 반탁운동에 참여하라’입니다. 이 포고문은 임시정부가 국내 행정과 치안, 경제를 담당하겠다는 ‘주권 선언’입니다. 그러나 미 군정 측에서 보면 일종의 쿠데타와 같은 것이었죠. 놀라운 일은 이 포고문이 나가자 서울 시내 7개 경찰서장들이 경교장을 찾아와서 충성을 맹세한 겁니다. 단순히 포고문만 내놓은 것이라면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자 미국으로선 거대한 도전을 받게 된 것이죠. 

장동석 : 미 군정이 상당히 기민하게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삼웅: 경찰서장들이 임시정부에 충성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하지 장군은 12월 31일 0시를 기해 김구 선생을 체포하여 인천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실천 단계에서 주위의 만류로 포기하고 맙니다. 만약 임시정부 주석을 중국으로 추방할 경우 한민족의 거국적인 저항에 부딪힐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꽤 농후했습니다. 추방 계획은 포기했지만 하지는 김구 주석을 불러 “만약 당신이 나를 거역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런 것에 놀랄 김구 선생이 아니죠. 오히려 “그런 협박을 한다면 나는 자살로써 민족혼을 지키겠다”고 큰소리쳤죠. 이승만 등 다른 사람들은 하지를 못 만나서 안달인데, 이런 일들로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는 미 군정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얼마 후 이승만 정권에서 미국 CIC(미군방첩대) 요원인 안두희에게 김구 선생이 암살되고 말지요. 

장동석 :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서 공히 군정을 실시했는데 그 방식이 참으로 달랐습니다. 이 대목도 상당히 중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김삼웅 :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 패전 이후 군정 실시에 대비해서 약 2,000명의 민정관을 양성했습니다. 맥아더 휘하에 2,000명 정도의 행정관과 민정관을 두고 일본을 간접 통치했던 겁니다. 하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일개 야전군 사령관에게 맡겨버립니다. 그리고 3년간 직접 통치를 했어요.
여기에도 모종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부 어용학자들이 우리나라가 독립이 된 데에는 카이로선언1)이나 얄타회담2), 포츠담선언3) 등의 영향이 큰데 그것이 모두 이승만의 역량이라고 주장하는데 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30년 넘게 외교 활동을 벌였다고는 하지만 미국 국무성 등에서는 이미 기피 인물이 되었습니다. 한인 사회의 분열주의자였기 때문이죠. 어떻게 보면 미국이 한국에 관심도 없고,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이승만 탓일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는 민정관 2,000여 명을 양성하면서도 한반도는 전혀 준비도 없이 야전군 사령관에게 맡겨버렸는데, 미국이 우리를 아주 우습게 봤던 것입니다. 그러니 20년 내지 30년은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할 수 있었던 것이죠. 
해방 후에 몇 가지 유행어가 있었는데요. 미 군정 사령관 하지에게는 ‘조선 독립 하지 하지 하고 하지 않는 하지’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은 ‘아놀다하지’라고 불렀어요. 아놀드 소장이 물러나고 2대 군정장관으로 임명된 러치 소장은 ‘그렇지, 그렇지, 그러니까 러치’라고 조롱했습니다. 자신의 의견은 하나도 없고 본국 명령에만 순종하는 것을 비꼰 것이죠. 

장동석 : 하지가 처음에는 김구 선생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해방 이후 마찰을 빚으면서 충돌하게 되는데요, 자신들의 계획에서 자꾸 어긋나니까 기피 인물로 낙인을 찍은 거겠죠?

김삼웅 : 미국 국익에 맞도록 신탁통치도 받아들이고, 임시정부도 내세우지 말고 미 군정에 추종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국자 포고문 1호와 2호를 선포하면서 미 군정에 대립하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리고 남북협상을 벌인 것은 미국 입장에 크게 반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미국이 이승만을 선택하는 결과를 낳은 겁니다. 이승만에 앞서 미국 박사 출신의 임시정부 부주석 우사 김규식 선생을 타진해보았지만 우사 선생은 통일정부 아닌 단정에는 결연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장동석 : 일본에서 군정을 실시하기 위해 2,000명 정도의 민정관을 양성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 무렵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출간되었습니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사실 이 책은 적국 일본을 알기 위한 치밀한 조서라고 봐야 합니다. 심지어 일본을 연구하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이자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반도에 대한 조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우리를 일본의 속국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김삼웅: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4)을 맺는 등 일본을 동북아시아의 맹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을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처할 수 있는 방어선으로 봤던 것이죠. 반면 한반도에 대해서는 일본을 방어하는 정도로 여겼을 뿐 인식이 아주 낮았습니다.

장동석 : 잘 알지도 못했고요. 

김삼웅: 미국 국무성에서 분석한 자료를 보면 ‘한국인은 분열이 심하다’는 내용이 있어요.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교포 사회에서 많은 분열과 분파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죠. 사실 그 중심에는 항상 이승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망명가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고, 그것이 중경 임시정부까지 연결된 것입니다.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인정하자고 하니까 미국은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세력이 조선 민중을 대표할 수 있는 세력이라 할 수 있느냐, 우리가  보니 그런 건 아니더라”고 응수했어요. 이승만의 죄업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장동석 :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었으면 그 죄악들이 모두 알려졌을 텐데요. 

김삼웅 : 당시에도 아는 사람은 많이 알고 있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이승만이 임시정부 외교위원장 신분이었는데, 하와이 한인회 등에서 자격을 박탈하라고 수차례 청원을 했어요. 하도 동족끼리 분열을 부추기고 하니까 그런 탄원서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장동석 : 이런 인물을 ‘국부’라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정권을 잡고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를 더 큰 격변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화제를 좀 바꿔보겠습니다. 해방 이후 가장 큰 문제는 독립을 쟁취하긴 했지만 나라가 사실상 풍비박산이 난 상태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200퍼센트 이상의 인플레가 일어날 정도로 경제는 파탄이 나 있었습니다. 민초들의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던 거죠. 일본이 물러가면서 국민들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불안이 결국 경제적인 불안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김삼웅 : 일제가 항복하고 나서 총독부가 몇 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가장 먼저 한 일이 제일은행에 있던 금괴를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고, 두 번째가 식민통치 기간 독립운동가는 물론 죄 없는 사람마저 고문하고 죽인 비밀 자료들을 불살라버린 것입니다. 세 번째는 화폐를 대량으로 발행해서 금과 은 등으로 바꾼 것입니다. 일제는 패망하고도 화폐를 계속 발행해서 총독부 경찰이나 공무원, 헌병들에게 민간복을 입혀서 이런 일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니 일본이 물러가고 3개월 후에는 화폐 가치가 200~300퍼센트 인플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쌀 한 가마니 사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죠. 일본이 얼마나 교활하고 잔인한지는 우리나라에서 금과 은 등 귀금속류를 일본으로 얼마나 많이 빼돌렸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와 국민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만행도 그렇지만, 해방 후에 우리가 자립 경제를 건설할 수 있는 기본적인 물자를 다 빼돌린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보 등 문화재 유출은 말할 것도 없고요. 

장동석 : 36년 동안 그렇게 많은 착취를 했으면서도 도망가는 와중에 실리를 확실하게 챙겨간 것이군요. 

김삼웅 : 당시 우리 민족은 36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달림과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보복당할까 두려웠던 것이죠. 그래서 일제가 이런 유행어를 만들어서 유포했던 것입니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말라. 일본놈 다시 일어선다, 조선놈 조심해라.”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경찰, 공무원, 헌병들을 민간복으로 갈아입히고 일본 화폐를 금과 은으로 바꾸면서 이런 말을 퍼뜨린 것입니다. 시장 등을 돌아다니면서 말을 옮긴 것이죠. 우리 민족은 하도 많이 속고 당해왔기 때문에 피해의식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정세를 자세히 모르니 유언비어대로 ‘일본놈들이 다시 일어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거죠.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 국가들 중에서 장기간 피해를 입고도 해방 직후 억압 세력에 보복을 하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총독부의 지시에 따른 유언비어가 얼마나 큰 효과가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당시 나돌았던 유행어들은 한번 스쳐 지나가는 일회용 같은 것인데, 생겨난 연유를 따져보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농간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장동석 : 전쟁에 지고서도 당당하게 자기네 것도 아닌 것을 챙겨간 일본의 뻔뻔함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당시 인플레가 얼마나 심했으면, 서민들이 지폐 다발을 한 묶음 들고 가도 쌀 한 되 받아오기 힘든 지경이었다면서요? 

김삼웅 : 일제강점기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종종 나오죠. 그런데 인플레도 인플레이지만 실은 귀환 동포들, 즉 일본과 만주, 러시아, 동남아시아 등지로 오로지 살기 위해 떠났던 사람들이 일시에 엄청나게 들어온 이유도 있습니다. 

장동석 : 그렇군요. 당시에 엄청난 동포들이 이른바 환국선을 타고 돌아왔죠.

김삼웅 : 일본의 잔악함은 여기서도 드러나는데요, 1945년 8월 24일 귀환선 우키시마호를 침몰시켜버립니다. 태평양전쟁 중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 북쪽 끝 아오모리 지역에서 비행장 건설 등 강제노동에 투입되었다가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한국인 노동자와 가족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가던 배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사건인데요, 우키시마호 사건으로 6,000~8,000명 정도 수장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비극을 겪으면서도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 귀환 동포들이 시시각각 몰려 들어왔고, 갑자기 인구가 불어나버리니 인플레가 더 심해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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