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그대와 나는 땐스(dance)파트너로 멋지게 살았지

 

천상여자로 살아온 나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 금지옥엽처럼 사랑받았다. 나는 대전 선화동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친정아버지가 대전여중 육성회장이라서 나는 신설학교인 대전서여고로 진학하였는데 6회 졸업하고 학교가 없어져 버렸다. 친정아버지는 개방적이셨다. 나는 아버지와 양식집도 애인처럼 즐겨 다녔고 백화점에서 팔짱끼고 쇼핑도 했다. 아버지는 한편으로는 몹시 가부장적이어서 나는 숙명여대에 가고 싶었는데 서울로 유학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무조건 충남대를 가야 한다고 주장하셔서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 거면 진학의 의미가 없어서 대학진학을 접었다. 돌이켜보면 대학을 가지 않은 것이 가장 아쉽다. 대전여고 출신인 친구가 내 23번째 생일날인 4월8일 미팅을 주선하였다. 중앙대학을 졸업하고 이원면사무소 직원으로 근무 중이던 강영식씨! 

대전 중앙시장 근처인 왕생그릴에서 만났는데 그는 나에게 첫눈에 반해서 줄곧 쫓아다녔다. 내 사진을 6촌시누이에게 얻어서 벽에 붙여놓고 좋아했다더라. 시할머니가 돌아가시게 생겨서 시고모님과 시어머님이 대전으로 출동하셨다. 지나가는 사람인데 물 한 잔만 달라고 위장 방문을 감행해 우리 집에 들어오셨다. 이때 시어머니가 당신이 맏며느리라 튼튼한 맏며느리를 데려와야 하는데 나를 보시고는 멋만 부리고 하늘하늘해서 마음에 안 드셨다고 했다. 시고모님은 ‘물을 몹시 교양 있게 내오는 것 보라’고 시어머니를 설득하였다고 들었다.
납치당하듯 결혼했다.
남편이 군수 여동생과의 선 자리에서 음식을 주문해 놓고 날 만나러 그냥 빠져 나왔다는 전설을 들었다. 나는 27살이라는 그가 나이가 들어 보이고 와리바시처럼 바짝 말라서 안 만나려고 했다. 그런데 자꾸 찾아와서 한 달 만에 납치하듯 8월19일 약혼식을 치루고 9월23일 대전 중동 국제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말았다. 동짓달이 될 때까지 친정에서 보내는 동안 그는 꿀벌마냥 드나들면서 살짝살짝 만났다. 호마이카 농을 구르마에 실어서 먼저 보내고 나는 족두리를 쓰고 구식으로 신행을 왔다. 나는 무용을 해서 사치스럽게 여겨지는데다가 귀걸이까지 달고 시집을 왔으니 이원에서 화려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시집살이는 몸이 힘들지 않아도 그 나름의 고단한 일들이 있었다. 그 옛날 결혼이 여자들의 결정권이 없던 때라 손위시누이를 시누이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집으로 시집을 보냈는데 얼마나 애가 탔는지 그만 양잿물을 마셔버렸다. 식도가 녹은 상태로 죽을 끓여 체에 걸러서 봉양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얼마 후 독립해서 나갔다. 식모가 있어서 육체적 고생은 없었으나 30살에 혼자되신 시어머니와 살면서 정신적 고통은 남 못지않았다. 이제 세월이 흐르다 보니 모든 게 감사하고 혼자 살면서 특히 시어머니가 너무 그립다. 
삶이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았지만 문화생활을 향유하고 싶은 내 마음과 맞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남편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가사 일을 못해 시어머니에게 만족한 며느리는 못됐다. 친정에도 명절 설에만 한번 간신히 다녔다. 연탄가스 마시고 김칫국 들이키며 살아나면서도 24살에 큰아들 낳고 3년 터울로 4남매를 낳았다. 그냥 살았다. 애들 키우느라 잊어버렸다. 남편이 옥천군 청성면으로 발령받아서 4년 살았다. 아이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일가를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서 내게 기쁨이 된다. 가장 기뻤던 것은 너무 예뻤던 둘째 딸이 결혼해서 10년만인 40살에 아이를 가진 게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기다렸다. 2년 후 자연임신으로 둘째를 가져 얼마나 축복인지. 나는 엄하게 자식을 키우지 않았지만 다들 잘 커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자식들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는 각자 건강을 잘 챙겼으면 좋겠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말이다.
인생2막 프로젝트
집안 내력인 당뇨를 가지고 있는 남편을 건강하게 사회생활 하도록 내조하는 게 시급했다. 남편은 운동을 싫어해서 같이 춤을 추자고 하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무용을 배웠기에 춤이 내 전문분야 아닌가. 58세에 퇴직하자마자 우리는 인생2막 프로젝트에 도전했다. 공무원 생활하느라 고생도 많았는데 이제 우리만의 즐거운 삶을 살기로 했다. 이원면에 실력이 출중한 춤 선생의 집에 가서 춤을 배웠다. 그 춤 선생에게 춤을 안 배운 여자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굉장히 빨리 배웠고 무용을 해서 포즈가 예쁘게 나왔다. 개인지도로 지루박 도롯도(트로트) 부르스를 금방 떼었다. 
실력을 장착하고 남편과 함께 대전으로 진해서 춤을 추었다. 중앙캬바레 제일캬바레 그리고 충무체육관 쪽 황제캬바레로 같이 다녔다. 캬바레가 어두침침한 불륜의 온상이라고 생각하면 당신은 구식이다. 정식으로 춤을 배운 도사들이 진검승부를 펼치는 음악과 공연이 넘쳐나는 예술 공간이라고 하면 어쩔 건지? 우리는 순전히 남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운동 중에서 가장 적성에 맞는 춤을 선택한 것이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단장을 하고 12시까지 도착하기 위해 즐거운 준비를 하는 일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대략 춤 구력 20년 동안 내가 실력이 있고 깔끔한 여성 파트너를 3명을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남편이 75세에 대상포진이 머리와 이마에 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 체력이 떨어져 춤을 30분도 못 추고 주저앉아서 쉬자 전직 교장사모인 파트너가 ‘병을 고치고 건강해지면 나오라’고 충고를 했다. 남편은 너무 자존심이 상해버렸는지 춤을 딱 끊어버렸다. 나는 속이 많이 상했다. 운동을 끊어버리면 건강이 급속도로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100수 할테니 당신은 90세까지 살아주셔요.”하고 부탁했는데...마음의 준비 할 새도 없이 갑자기 떠나버린 남편, 그립고 또 그립다 
그렇지 않다면 당장 춤을 추라. 
우리 사회에서는 춤을 경시하였고 무조건 나쁘다고 했다. 중국은 몇 천 명이 광장에 나와서 건강 춤을 운동으로 한다. 춤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것이지. 춤 동작 하나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는지, 내가 인생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려줄 수 있다. 
나는 나이를 먹은 티를 내는 게 제일 싫다. 집 앞 제일 미용실 원장이 65세인데 대화가 잘 통한다. 나이가 별건가 마음이 맞고 대화가 통하면 친구이지. 나는 65살까지 사교적인 춤을 추었다. 현재는 이원 다목적회관에서 화 목 스포츠댄스와 월 수 라인댄스로 몸매와 건강을 유지하니 아직도 현역이다.
노인이라고 몸이 무너지고 팔다리가 흐느적거려 힘없이 똑바로 서 있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움직일 수 있는데 무기력하게 방안에서 티비를 보며 시간을 허허롭게 흘려보내지 않으리라. 걸을 수 있다면 박차고 나와 춤을 추라고 권한다. 기교는 상관없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포즈로 움직이면 더 좋겠지만 움직여야 살아있는 거라오. 
내 나이를 말하면 다들 놀라면서 10년은 젊어 보여요”
그 기분 좋은 칭찬의 비결은 바로 어느 여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함께 춤을 추어요. 행복한 춤을 추어요.’

작가 이연자
작가 이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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