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진 후미진 곳에 있지만, 맛과 이야기는 일품
나눔카페의 고급재료로 직접 만든 디저트를 맛보고

첫 외관이 확 눈에 띠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커피를 마시는 ‘카페'가 대부분 그렇듯이 내외부 인테리어에서 대부분 판가름나고, 이는 확대재생산되는 홍보창구인 인스타그램에 얼마나 회자되느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목'도 좋지 않았다. 부러 마음먹고 찾아가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지점들에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놀랍게도 주목할만한 ‘콘텐츠'와 ‘스토리’가 있었다. 가까이 가야 보이고 이애기를 들어야 좀 더 알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 주렁주렁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있었다. 
 ‘자활’,  자활사업은 노동자의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노동역량의 배양 및 일자리 제공을 통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기능 습득과 근로의 기회를 제공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지역자활센터는 노동의 기회를 얻지 못한 지역주민들에게 배움의 기회와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옥천센터는 기본형-농촌형으로 실무를 담당하는 직원은 5명. 충북에는 현재 ‘자활관리사례사’나 ‘게이트웨이(Gateway) 전담관리사’가 없어 해당하는 업무를 옥천지역자활센터의 실무자들이 담당하고 있다. 
 게이트웨이 전담관리란 신규참여자를 의뢰하고 배치한 후, 초기 상담 및 진단평가를 통해 기초교육을 하고, 교육훈련을 담당하는 업무이다. 
 자활사례관리는 자활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자활에 성공했을 때 사후관리, 실패했을 때 원인분석 등을 평가하고 상담 및 계획을 재수립해 자활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옥천지역자활센터의 사업단은 60여 명으로 30명으로 감소했던 구성원이 다시 증가한 형태이다. 현재 가공사업단(김, 누룽지 등의 가공), 들향기 사업단(농작물수확), 디딤돌사업단(조립 등의 업무), 새로이세차, 외식사업단(강호식당), 매점사업단(카페프란스), 커피공방사업단(나눔카페), 영농사업단(한울타리사업단) 등 총 8개의 사업단이 운영되고 있다.
 척박한 자본주의 땅에서 어떻게든 삶을 일구어 서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지갯빛으로 스며 있었다. 
 자활에서 운영하는 카페 두 곳, 읍내 기업은행 뒷 골목 나눔카페와 장계관광지 ‘카페프란스’ 두 곳을 다녀봤다.
 가서 보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평범한 곳이지만, 발걸음을 하면 할 수록 색다르고 멋진 곳이 될 거라는 어떤 예감이 들었다.  

 

■ 기업은행 뒷 골목 ‘나눔카페’에 가보자

숨어 있는 것 같은 길목 모퉁이에 서 있는 ‘나눔카페'에선 고급진 재료를 써서 만든 제과 디저트의 맛이 일품이다. 
 마침 그 날 나온 쫄깃한 식감의 파베초콜릿과 초코 브라우니, 치즈케이크는 여느 카페와 다른 맛이었다. 직접 만드는 ‘수공예’의 느낌이 맛에 은연중에 베어있달까. 디저트 뿐만 아니라 차들도 가성비가 높다. 아메리카노가 2천500원, 카페모카가 3천원이고, 가장 비싼 음료인 에이드와 자바칩이 3천500원일 정도로 4천원이 넘는 메뉴가 없다. 저렴하지만 양질의 메뉴로 카페에서 소담소담 대화를 나누기엔 최적지라는. 
 좁은 공간이라 테이블은 많지 않다. 4팀 정도가 앉으면 꽉 찰 정도.  
 사람이 많이 없어 오랫동안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큰 장점, 시가지 접근성도 나쁘지 않았고 차가 많이 지나지 않는 이면도로여서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최적지였다. 
 우여곡절끝에 탄생한 이 카페의 매니저 A(42)씨는 카페를 직접 운영하기 위해 바리스타 교육은 물론 제과학원을 6개월 가량 일주일에 두번씩 꼬박 다녔다. 
 매일 오늘의 디저트가 있는데 직접 만든 색다른 디저트를 랜덤으로 맛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 옥천으로 귀촌한 지 벌써 12년, 아이들도 면 지역 작은 학교에 일부러 보내고 ‘경쟁’에 치이기보다 자연과 마을이 휘감아 도는 그런 곳에 맘껏 뛰놀 수 있어 행복하다고. 그런 마음으로 지역에 뿌리내려고 시작한 나눔카페는 그에게 또 다른 의미이다. 
 이번 카페가 어느정도 활성화되면 창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그런 꿈을 갖고 조심스레 한걸음씩 내디디고 있다. 
 “옥천자활센터를 통해 바리스타와 제과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제과학원을 다녔는데 학원비의 일부를 광역지역자활센터에서 지원받아 수월했죠. 현재는 가게에서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디저트를 스스로 개발하고 연구하고 있어요.” 
 일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물었다. “아이가 셋 있는데 어느정도 자라고 나니 일을 하고 싶더라구요. 옥천 살기 좋은 것 같아요. 이렇게 일자리도 생겼고 아이들도 학교 인근 축사에 송아지랑 교감하고 마을탐방도 하며 행복해 하는 모습 보면 기분 좋아요.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건데 굳이 미리 시킬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A씨와 함께 일하는 자활 일자리는 두명이 더 있다. 이렇게 시작한 사업은 사회서비스 형 2년을 거쳐 투입된 자금의 30%이상 수익이 나면 시장진입형 3년을 거쳐 창업하게 된다. 지역자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애착과 자부심이다. 다행히 카페매니저 A씨는 가게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나눔카페는 손님들께 편안함을 드리고 싶은 공간이에요. 원가가 비싸더라도 고급재료를 사용해 맛을 내고 있어요. 디저트를 잘 모르는 분들도 이름만 들어보면 아실만한 재료를 사용하구요. 가공버터나 쇼트닝은 사용하지 않아요. 재고관리가 어려워 아직 7가지 메뉴만 판매하고 있어요. 디저트를 전부 직접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강호신 자활센터장은 “가게에서 본인이 수익을 내는 만큼 적립을 한다"며 "공익형 사회서비스 사업단을 2년 내에 하고, 투입된 예산의 30%의 수익을 내면 시장 진입형으로 진출하게 되는데, 나눔 카페는 대략 연간 2천만 원 정도의 수익을 창출하면 창업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미 그런 과정을 거쳐 새로이크린, 새로이건축, 희망나르미쌀이 창업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안착되어 있다. 

 

폐허가 된 장계관광지에 새 생명이 움트고 있다

카페프란스의 수몰민의 애환을 그린 노래를 들으러 가자

‘영광’이 사라진 곳에 ‘폐허’는 더 쓸쓸하다. 2008년 총사업비 70여 억원에 달하는 신활력사업은 한바탕 반짝이는 ‘일장춘몽’이었다. 국토도시디자인 공공 공간부문 공공디자인대상 최우수상을 받았지만, 대청비치랜드를 위탁 관리했던 (주)대청이 철수하고 신활력사업인 ‘멋진 신세계사업'이 끝나마자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쇠락의 길로 걸어섰다.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나마 마지막 볼거리였던 시비마저 세월의 때가 입혀져 ‘어수선’하고 향토사료전시관과 그 옆에 작은 공간에 문화관광해설사 등이 배치되어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먹고 마시는’ 공간이 없다보니 쓱 들러보고 말았고 그렇게 둘러본 곳은 재방문의 매력을 못 느끼는 곳으로 전락했다.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 곳에 옥천자활센터가 명함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심장박동이 사실상 멈춰져 소생불가 판정을 받는 것이 아닌가 했던 그 곳에 ‘떡하니' 매점을 열었다. 
 '매점을 열면 그냥 현상유지하면서 되긴 될껴’하는 추정치의 말로 이 사업을 끌고 가기는 만만치 않다. 어떻게 매점 하나만으로 그렇게 큰 폐허가 된 공간을 살려낼 수 있을까? 그것은 오만한 자신감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기 이전 까지는 말이다. ‘애착’은 중요하다. 더욱이 자활에서 ‘애착’이란 사실상 큰 고개를 넘어서는 성공요인에 가깝다. 삶의 의지를 일로써 끌어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이미 생의 쓰디쓴 패배를 경험한 지라 다시 일어서기에는 충분한 교감과 소통, 재능을 알아봐야 했다. 그냥 매점을 열었다고 마냥 장사가 되는 건 아니었다. 가서 시간만 때운다고 해서 사람이 절로 와서 물건을 사는 것은 아닐 터. 풍경이 아무리 수려해도 그것이 다시 올 수 있는 매력을 부여하기까지에는 많은 의미가 추가되어야 했다. 
 사람이 중요했다. 적합한 사람을 골라 배치하는 것이 사실 시작할 수 있는 주요 요인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향토가수로 발돋움하려는 박홍희 반장과 만난다. 강호신 센터장은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 반장님이 버스킹도 하고 활성화시키는 데 일조를 할 거에요. 무엇보다 카페에 대한 애정이 많으시거든요,”

 

■ 카페프란스 박홍희 반장의 재발견, ‘옥천과 대청호를 노래하다’

 그를 두번에 걸쳐 만났다. 그는 카페프란스에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누가 하라 하지 않았는데 집에서 귀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오래된 물건들을 가져와 카페 인테리어에 사용했다. 지금은 구하기 힘든 엘피판, 옛날 TV, 옛날 책자, 성냥, 화폐 등 옛 물건으로 진열을 해 놓아 ‘향수’를 느끼게끔 배치해 놓았다. 턴테이블도 곧 가져와 엘피판도 틀 예정이다. 
 우쿨렐라와 기타도 가져다 놓고 노래도 부를 심산이었다. 그에게 카페 프란스는 ‘자발성’을 일으키게 하고, ‘자율성’을 부여했으며 이런 것들이 자연스레 쌓이면서 ‘자주성’을 장착하게 했다. 
 카페 매점이 생겨도 좀처럼 사람이 오지 않는 이 곳에 어떻게든 이목을 끌어보겠다고 그는 버스킹을 스스로 제안했다. 주말마다 버스킹을 일단 해보고 싶다고. 그냥 옛날 노래가 아니라 고향 이야기를 직접 가사에 담은 번안곡 ‘내 고향 석호리’와 곡을 받아 오롯이 본인의 노래가 된 ‘내 고향 장계리’를 번갈아 부르겠다는 것이었다. 가사를 직접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본인의 곡을 받다니, 이는 자기곡이 있는 가수인 것이다. 간절하면 이뤄진다고. 고향에 대한 간절함과 새롭게 취업한 카페프란스를 어떻게든 일으켜 보겠다는 일념이 모아져서 이런 노래들이 탄생했다. 
 노래 자체도 주옥 같지만, 노래를 만들어낸 배경도 기막히다. 
 '내고향 석호리'는 나나무스꾸리의 ‘오버 앤 오버’에 가사를 입혔다. 악보를 보면 그의 고향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절절한 지 절로 느낄 수 있다. 악보 상단에 '1937년 개교한 군북초등학교(함티학교), 수몰당시 학생수가 600명, 1979년 인근 소정리로 옮긴 뒤 94년 학생수가 줄어 폐교되었습니다’, ‘1910년 어머니 고향 진산에서 1920년 석호리 진걸로 이사, 대청댐 1980년도’ 위 내용이 적혀 있다. 가사를 보면 수몰민이 아니어도 울컥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석호리, 함티 나의 고향, 할아버지-할머니 살던 고향, 윗집에 영희가 살았던 나의 고향, 그 옛날 함티학교 어디갔나, 아재집에 광덕이 살던 고향, 순이와 친구들 어디갔나’ 이런 가사들이 3절까지 박혀있고 잔잔하게 흐르는 후렴구는 가슴을 후벼판다. ‘대청호야 고향을 돌려다오’, ‘대청호야 너를 보니 슬프구나'로 반복되는 후렴구는 대청댐에 의해 수몰된 고향을 애절하게 찾고 있다. 이후 원곡에서 ‘나나나나’로 표기되는 음에도 인근 마을(맥기, 진걸, 늘티, 함티, 용호리, 구건리, 소징이, 문박골)의 이름을 나열하며 향수를 자아내고 있다. 
 선택한 팝도 이런 가사에 잘 어우러져 번안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가사가 곡에 잘 스며들었다. 
 번안곡을 만든지 얼마 안 돼 카페에서 흥얼거리며 부르던 노래를 귀담아 들었던 작곡가가 있었다. 동요작곡가 및 상임지휘자 김철진(70, 대전) 작곡가이다. 교과서에도 실린 1987년 MBC 창작가요제에 수상한 ‘섬마을’ 동요를 작곡한 유명 작곡가(곡의 작곡가는 당시 사정에 의해 음악교사 계훈복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 작곡가는 김철진으로 현재까지 노래에 대한 저작권료를 받고 있다고 함)이기도 하다. 장계관광지를 바람쐬러 가끔 들렀던 그에게 기타를 치며 절절하게 부르던 박홍희 반장의 모습은 색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가 인사를 건네자, 박홍희 반장은 그를 극진하게 대접을 하면서 챙겼고 곡을 조심스레 부탁을 했다. 이미 작사를 해 놓은 노래가 있었다. '내 고향 장계리’ 온전히 장계리 카페프란스를 위한 맞춤형 곡이었다. 그는 그 가사를 받아들고 흔쾌히 작곡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작곡비를 지불할 형편도 아니었는데 그가 무상으로 작곡을 해주겠다 한 것이다. 그 곡을 정말 목놓아 기다렸다. 그 곡이 오던 날 그는 근무시간이 아닌데 자원해 나왔고 김철진씨한테 곡을 받아들고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번번한 녹음실 하나 없어 장야리 지정화피아노음악학원에 양해를 구해 거기서 녹음을 했다. 그렇게 전세계에 하나뿐인 ‘내 고향 장계리’가 탄생한 것이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친구야 친구야 노래부르자/옥천에 가면 장계리 가자/ 바람 소리에 물새들 소리가/고운 사랑 그리며 오라 부르네’ 3절까지 있는 이 노래는 ‘장포강 따라’, ‘진모래성 짓고’, 옛날 지명이 고스란히 노래에 들어있다. ‘연가’처럼 쉽게 따라부를 수 있도록 곡을 만들었다. 
 "고향 석호리가 수몰되었을 때의 아픔을 가사로 쓴 ‘내 고향 석호리’와, 장계리에 대해 노래하는 ‘내 고향 장계리’예요. 어디 음반을 내지는 않아서 이 곳에 방문해주시는 분들만 들을 수 있어요. ‘내 고향 석호리’는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 떠나야 했던 아픔이 담겨있어요. 실제로 소금을 싣고 가다가 장마철에 배가 뒤집어졌던 사건, 석산에 돌을 싣고 다니던 화물차의 이름 등 우리네 고향의 삶을 가사에 담았습니다.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넣기도 했고요.”
 군북초(37회)와 옥천중(29회)을 졸업하고 줄곧 옥천에서 살았던 옥천 토박이 박홍희(58, 옥천읍 장야리)씨가 가수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카페프란스에는 전 세계에 하나뿐인 옥천에서도 유일하게 수몰민의 아픔을 그린 오리지날 명곡 두곡을 감상할 수 있다. 카페 프란스 앞에 흐르는 금강과 강의 배경이 되어주는 산 병풍은 덤이다. 조용히 강과 산을 응시하면서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심연의 슬픔은 애잔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것이다. 
 장계리 카페프란스로 가자. 석호리와 장계리, 옥천과 대청호를 노래하는 향토가수 박홍희 반장을 만날 수 있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운이 좋아야 그를 만날 수 있다. 매일 근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3월1일부터는 동절기(5시30분)가 해제돼 오후 6시까지 근무하니 평일 점심을 이용해 드라이브 겸 한번 가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벌써 흥얼거림이 느껴진다. ‘친구야~ 친구야~ 노래부르자. 옥천에 가면 장계리 가자’ 옥천의 대표 노래 각이다. 
 현재 8살때 헤어진 어머님을 환갑이 넘은 나이가 될 때까지 애타게 찾고 있는 강영자(67, 이원면 신흥리)씨가 후발 주자로 열심히 기타와 노래를 같이 배우고 싶다. 이미 지면에 한차례 소개된 강영자씨의 애절한 사연은 KBS ‘그 사람이 보고 싶다’애도 소개가 됐다는. 사연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 그래서 이야기가 더 풍성한, 정지용 시인이 이야기한 ‘옛이야기 지즐대던’ 그 실개천 장계리 카페프란스로 가자!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