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민낯

지난해 옥천신문은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역 친일사와 독립운동사를 연재보도 했습니다. 이어 올해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과정을 보도 합니다. 
오늘날 사회 모순을 이해하려면 해방이후 현대사를 정확히 알아야합니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가 오늘날까지 우리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대안도 나옵니다.
2015년 출판사 철수와 영희는 ‘한국 현대사의 민낯’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과 장동석 출판평론가의 대담형태로 해방이후 왜곡된 역사를 바로 볼수 있도록 돕는다 평가됩니다. 이에 책 내용을 나눠 보도합니다. 
옥천과 직접적 관련은 없을지라도 여러 영향을 주고받은 우리 현대사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전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 전 대한민국의 대통령

장동석: 정치뿐 아니라 경제, 사회 등 다양한 지형의 핵심으로 들어가보면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는 이 책의 주제인 ‘청산되지 않은 과거’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오늘 우리 시대에 매우 복잡한 지형으로 나타납니다. 언젠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가계도를 보고 굉장히 놀랐는데요, 그의 가계도만 봐도 오늘날 기득권이 어떻게 유지되어왔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추악한 현대사의 뒤에서 벌어진 일들이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 책에 대한 제안을 받으셨을 때 어떻게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 그 부분부터 이야기하면서 시작해보겠습니다. 

김삼웅: 현대사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지난 70년 동안 펼쳐진 우리 현대사는 정의롭고 진실한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세력보다는 반민족·반민주적인 사악한 세력에 의해서 유지되어왔습니다. 이것이 확대재생산되거나 한편으로는 세습되면서 독립운동 세력과 민주화운동 세력, 통일운동 세력 등 국가 정통 세력이 항상 소수자나 아웃사이더가 되었지요.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좌파·용공·종북으로 몰리게 된 것입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 같았는데, ‘이명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 악화되고 강화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우리가 현대사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근현대사에서 부끄럽고 욕된 부분들, 또 기득권 세력이 어떻게든 덮어버리고 싶어 하는 부분들을 좀 더 세밀하게 오늘의 시점에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동석: 사실 해방공간에서 사상과 이념의 문제들이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말씀하신 기득권 세력이 내세우는 논리 가운데 하나가 조국의 광복은 우리 민족의 끊임없는 투쟁과 고유한 저력이 밑바탕이 된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서 마치 덤으로 해방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런 부분들을 말씀하신 틀 안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김삼웅: 2014년 6월, 국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킨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삐뚤어진 역사관과 왜곡된 기독교사관, 그리고 이인호 KBS 이사장의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은 스탈린의 지령”이라는 따위의 인식은 그들 개인의 의사나 철학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의 보편적인 사고입니다. 문창극 씨 파동이 일어나던 무렵 한 보수 일간신문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낸 광고를 보니 “문창극 지명자 강연 내용의 배경을 살펴볼 때 우리 민족에 대한 각성과 분발을 강조한 것이다. 이를 왜곡된 역사의식이라고 볼 수 없다”고 엄연한 진실을 호도했더군요. 모든 사람이 진실이 아니라고 인정한 식민지사관까지도 그런 식으로 정당화하는 게 이 땅의 보수 세력입니다. 엄격히 따지면 보수도 아니죠. 극우 세력입니다. 이 사람들의 인식이나 사고방식, 역사의식이 결국 우리 한국 사회를 갈라놓고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암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창극, 이인호 사태의 교훈은 결국 이런 겁니다. 우리 사회가 극우 세력의 반동적인 구조 아래서 얼마나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는 것이죠. 이런 사태를 어떻게 돌파하느냐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동석: 한국 사회에서 세칭 보수라 일컫는 사람들은 보수가 아닌 극우죠. 결국 해방공간으로 돌아가야만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극우 세력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임시정부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됩니다. 임시정부는 선생님께서 줄곧 연구해오신 분야고 답사도 여러 차례 다녀오셨습니다. 사실 임시정부는 일제강점기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는데 그 의미와 역할이 축소되었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주셔야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 쉬울 것 같습니다. 

김삼웅: 우선 1919년 3·1혁명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3·1혁명 직후 국내외에 여덟 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거나 선포되었는데, 대부분이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되었습니다. 잠깐 3·1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죠. 우리가 3·1혁명을 단순히 ‘운동’이라고 스스로 폄하하고 있는데, 이것은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첫째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국민의 총궐기였고, 둘째 봉건군주제를 부인하고 새로운 민주공화제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시정부로 이어졌는데, 임시정부의 약헌(約憲)과 헌법에서 3·1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공화제를 채택했습니다. 3·1혁명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중원천지를 돌면서 외적과 사활을 건 투쟁을 벌였습니다. 세계 혁명사상 또는 세계 식민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당시 프랑스 임시정부나 폴란드 임시정부가 있었지만 기껏해야 4∼5년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임시정부는 27년 동안이나 외적과 치열하게 싸웠는데, 그 방법도 아주 다양했습니다. 의열투쟁을 비롯해서 무장전쟁, 외교론, 실력양성론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일제와 싸웠습니다. 

장동석: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까지 하면서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지지 않았습니까?

김삼웅: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임시정부는 이틀 후인 12월 9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 명의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애국 청년들과 미국 OSS(전략사무국)부대가 협력해서 맹훈련을 쌓으며 본국 진입을 준비하던 중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국토회복 전쟁은 치르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임시정부는 주권국가로서의 건국 방략을 제시했습니다. 무장투쟁과 의열투쟁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던 거죠. 그런데 문제는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이 우리 임시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중국국민당 장제스 정부가 미국과 영국에 승인을 요청했지만 두 나라가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영국이 특히 더 반대하면서 미국을 움직였지요. 당시 영국은 인도,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고 있었습니다. 세계열강이 식민지를 여럿 갖고 있을 때였는데, 만약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면 다른 식민지 국가들도 동등하게 대우해주거나 그런 요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거부한 겁니다. 이것이 결국 남북 분단의 빌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장동석: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약 당시 미국과 영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했다면 어땠을까요? 

김삼웅: 미국과 영국이 우리 임시정부를 승인했다면 해방 후 우리나라의 운명이 크게 달라졌을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장제스 정부가 제안을 했지만 영국과 미국이 끝까지 반대를 했는데, 당시 식민지 문제도 있었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극동의 반공 보루를 만들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반대 진지를 만들려는 미국의 의도였지요. 반공 보루를 구축하기 위해 한반도를 세계열강의 대립의 장으로 만든 겁니다. 그때는 ‘공관(共管)’이라고 했습니다. 공동관리한다는 말입니다.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공관한다, 즉 위임통치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3·1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미국에 한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일본 대신 국제연합이 조선을 위임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죠. 이 일 때문에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신채호 선생이 당시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이었는데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이승만은 아직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추방될 만하지 않습니까? 더 큰 문제는 이승만이 위임통치안을 제시한 이래 미국 정부가 기회만 있으면 한국을 국제 공관에서 통치해야 한다는 위임통치론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해방 후까지 이어졌습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한국을 30년 동안 위임통치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를 미국 워싱턴으로 옮길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미국의 승인을 얻기 위한 고육책이었죠. 그렇게까지 하면서 임시정부를 승인하거나 인정해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경의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서 “우리 임시정부 인사들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선호하며 기독교 신자들이 많다. 이것이 미국이 우리를 승인해주어야 할 이유다. 우리는 소련을 배경으로 하는 공산주의자들과는 다르다”라고까지 이야기하면서 승인을 요청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우리나라가 분단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미국과 영국이 우리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데에서부터 분단의 비극이 발생한 것입니다. 

장동석: 남북 분단이 단순히 한 사건에 의한 게 아니라 이미 오래전 이승만이 위임통치안을 제시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말씀이 사뭇 충격적입니다.  

김삼웅: 역사 연구자들이 이 과정을 소홀히 하면서 놓친 부분이 많습니다.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에 “한국은 20년 내지 30년은 위임통치해야 한다. 아주 미개한 나라여서 짧게 끝나지 않는다”라고까지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해방 후 임시정부를 정부 차원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임시정부는 국민의 지지와 법통이 있었고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전승국이자 연합국의 일원임에도 미국 등 열강이 승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정한 것입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하면서부터 임시정부의 실체가 없어져버린 것이지요.

장동석: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 자체가 시작부터 망가져버린 상황으로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이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 간의 파워게임이나 식민지 통치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지만,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 개개인에 대한 호불호도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특히 김구 선생에 대한 평가는 어땠나요?

김삼웅: 미국은 처음에는 김구 선생을 ‘극렬한 민족주의자’라고 해서 부정적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미 군정청 내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특히 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은 1945년 11월 2일 주한 미군 사령부 참모회의 석상에서 “김구는 스튜에 필요한 소금이 될 것이고, 그의 출현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어요. 하지의 정치 고문 베닝호프도 미국 국무성에 “공산주의자들조차 중경의 임시정부를 전적으로 부인하지 못하는 상황이므로 김구 세력을 활용하는 것이 미 군정에 대단히 유리하다”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지요. 그러니 일본 패망 직후까지 미국의 실무자들, 특히 한국을 비교적 많이 아는 실무자들은 임시정부에 적대적이지 않았던 겁니다. 

장동석: 그렇다면 어떤 세력의 입김이 작용한 것일까요?

김삼웅: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는 이승만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승만은 해방이 되자 맥아더가 보낸 군용기를 타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미 군정은 중경의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3개월 후에, 그것도 1진과 2진으로 나눠서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때부터 임시정부가 분열하기 시작한 거지요. 1진에는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진은 약 보름 후에 서울도 아닌 목포 비행장으로 들어왔는데, 2진에 포함된 분들은 대단히 상심했고 분노했습니다. 이승만이 하지를 움직여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우선 분열시켜놓고 보자 한 것이죠. 1진과 2진으로 나눠서 들어온 후에 김구 주석이 머물던 경교장에서 첫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이것 때문에 시비가 붙었습니다. 왜 1진만 먼저 들어오고 2진은 비행기를 늦게 보냈느냐, 그것도 하필 목포 비행장이냐 등등 울분이 폭발한 것이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며칠 늦은 게 무슨 대수랴’ 싶지만 해방공간에서 누가 먼저 들어오고 누가 나중에 들어오느냐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승만이 미국 육군성에 애걸하다시피 해서 먼저 들어온 것이지요. 여기에도 사연이 많이 있습니다. 

장동석: 어떤 사연인가요?

김삼웅: 애초에 미국 국무성은 이승만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분열주의자라고 생각했죠. 이승만은 미국에서도 설 땅이 좁아지자 미국 육군성에 줄을 대고 맥아더에게 거의 애원하다시피 전보를 치고 편지를 씁니다. ‘당신은 반공주의자로서 소련을 폭격해야 한다’는 내용까지 있습니다. 당시 맥아더는 미국 국무성에서 따돌림당하던 인물이에요. 미국 국무성은 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맥아더는 확전주의자였죠.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이승만이 맥아더에 선을 대서 자꾸 부추긴 겁니다. 미국 신문에 맥아더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는데,  맥아더 입장에서는 하버드 출신의 동양 정치인이 자기를 치켜세워주니 얼마나 고마웠겠어요. 그런 관계인지라 해방이 되자 이승만을 도쿄로 불러 미 군복까지 입혀서 한국에 들여보낸 겁니다.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누군가는 ‘국부’라고 부르는 사람이 미군 대령 군복을 입고 들어온 겁니다. 게다가 맥아더는 하지를 도쿄로 불러서 이승만을 영접하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하지가 이승만을 ‘모시고’ 김포공항에 도착하게 된 거지요. 
반대로 임시정부에는 석 달이 지나도록 비행기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장제스가 중경에서 상하이까지 비행기로 이미 ‘모셔다드린’ 상태였습니다. 거기서 한국으로 오려면 맥아더가 비행기를 보내야 하는데 안 보낸 겁니다. 석 달이 지나도록 말이죠. 결국 이승만은 미 군정의 호위 속에서 화려하게 조명을 받으면서 들어올 수 있었고, 김구 주석의 임시정부 세력은 관심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규모의 임시정부 환영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는데도 귀국 일정조차 알리지 않았으니 얼마나 통탄할 노릇입니까. 게다가 미 군정은 김구 주석 일행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바로 지프차에 태워 숙소인 죽첨장(지금의 경교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숙소까지 가는 동안 지프차의 커튼을 다 쳐버려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했습니다. 1진이 이 정도였으니 2진은 어땠겠습니까? 
사실 당시 국민들은 이승만이 누군지 전혀 몰랐습니다. 김구 주석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져 있었죠. 하지만 미 군정이 이승만을 엄호하면서 방송이나 신문에는 이승만 이야기만 나오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임시정부 2진까지 들어온 다음 날 임시정부 첫 국무회의가 경교장에서 열렸고, 일종의 분란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나리오를 이승만이 계획했다는 말이 있어요. 이승만이 임시정부를 분열시키기 위해 미 군정과 함께 모종의 공작을 폈다는 주장을 역사학자인 김기협 선생이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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