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에 거주하는 황영준 화백 막내동생 인터뷰
황영준 화백 이산가족 상봉 앞두고 유명 달리해

편집자주_옥천읍에 거주하는 황영준 화백의 막내동생(90)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막내동생은 정중하게 이름과 사진이 지면에 나오는 걸 고사하셨습니다. 독자분들의 양해 바랍니다. 동생의 목소리를 지면에 담아 독자분들께 전합니다.

해금강의 푸른 기슭 화봉 선생의 대표적인 청록산수화 중 하나다. 해금강이 그림의 소재다. 우뚝 솟은 바위와 바위에 부딪치며 부서지는 바닷물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1982년작 (사진제공:경인일보)
해금강의 푸른 기슭 화봉 선생의 대표적인 청록산수화 중 하나다. 해금강이 그림의 소재다. 우뚝 솟은 바위와 바위에 부딪치며 부서지는 바닷물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1982년작 (사진제공:경인일보)

황영준 화백의 동생이 바라본 형님의 그림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있었다. 맏아들로서의 책임감이 컸던 황영준 화백이다. 더불어 가족들에게 큰 소리 한번 낸 적 없이 온화했던 사람으로 동생은 기억하고 있었다. 

"인천 전시회에 가보니 어머니가 한복을 입고 곱게 앉아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 눈에 띄었습니다. 남한에 남겨두고 온 딸이 자란 모습을 상상하며 그린 여인의 그림도 있더라고요. 북에서 재혼도 하지 않고 아들을 입양한 채 혼자 사셨던 형님이 얼마나 가족을 그리워하셨을지 느껴졌습니다. 형님의 성품은 맏이답게 포근하고 묵묵하게 사람들을 감싸주곤 했어요. 야단치거나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죠. 맏이였기 때문에 책임감도 컸을 겁니다."

동생은 황영준 화백이 발로 뛰는 화가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작업실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발로 다니며 자연을 표현해냈던 황영준 화백이다. 북한에서도 금강산·묘향산 등 현지답사를 하며 수많은 작품을 그려냈던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교통부(일제 강점기 당시 철도국)에서 근무했었기 때문에 무료로 기차를 탈 수 있었다고. 동생은 형님의 화구를 짊어지고 들과 산을 다녔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형님은 쉬는 날이면 언제든지 그림을 그리러 산으로 들로 나갔어요. 제가 형님의 화구를 짊어지고, 도시락을 가지고 집을 나섰죠. 교통부 직원이었기 때문에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기차를 무료로 탈 수 있었습니다. 대구, 경산, 한강 등 형님과 함께 많은 곳을 다녔어요. 형님이 북한에서 이렇게 대단한 화가가 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2001년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9.11테러로 갑작스럽게 상봉이 취소됐다. 이듬해 이산가족 상봉 일정이 다시 잡혔지만 2002년 3월 5일 갑작스럽게 황영준 화백이 운명을 달리하자 가족들의 상심에 빠졌다. 막내동생은 그리운 마음을 담아 형님의 명복을 빌었다.

"이산가족 상봉을 학수고대 했는데 형님을 만나지 못해 너무 아쉽습니다. 6.25만 없었으면 가족들이 오붓하게 다 같이 잘 살았을거에요. 근데 포탄 떨어진 것처럼 가족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잖아요. 참 안타깝고 슬플 따름입니다. 형님과 이 세상에서 만나지 못한게 한입니다.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형님의 그림으로 표현되지 않았겠습니까. 형님이 극락왕생하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한줌의 흙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군 장병들이 조선에 돌아온 후 조국의 흙을 만지고 느끼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1960년작 (사진제공:경인일보)
봄볕 어미새가 새끼새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을 그렸다. 남한에 있는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이 드러난 작품이다. 선묘법과 화려한 색채가 돋보인다. 1985년 습작 (사진제공: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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