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양(畓陽)리에서 보내 온 연서, 인생을 사랑하는 '가산'으로부터
답양(畓陽)리에서 보내 온 연서, 인생을 사랑하는 '가산'으로부터
  • 추억의 뜰 김경희 작가
  • 승인 2020.02.1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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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안내면 답양리 이남규 어르신 1940년생
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42)

카메라를 맨 건장한 청년의 뒤를 쫒았다. 답양리를 지나 막지리로 향한다. 걸음도 빨라 뒤를 쫓기도 힘들다. 그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대청댐을 렌즈에 담았다. 인생의 깊이, 수몰지구의 그리움, 물안개의 정취까지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겼다. 결국 카메라의 성능보다 셔터를 누르는 이의 연륜이 사진을 만든다. 그는 가산 이남규 선생이다.

한밭대 사진반의 회장으로 활동중, 모든 피사체는 아름답다.
현역시절의 나, 강직한 소방본부장으로 정주행했다.

■ 답양리 산골내기의 유년기

푸시업 하루 80개, 매일 만보는 거뜬하다. 여든이 넘은 나의 일상 중 가장 기본인 목록들이다. 굳이 용을 쓰지 않아도 식사를 하듯이 거르지 않는 목록들.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다. 나는 옥천 제일 깊숙한 산골마을 답양리에서 나고 자랐다. 은퇴 후 다시 시골로 돌아왔다. 
골짜기 깊은 산골에서 외로움에도 익숙했고 새벽밥 먹고 학교 다니며 치열하게 사는 법도 배웠다.

1953년 6.25를 지나 휴전이 되고 옥천 중학교까지 40리를 뜀박질하며 다녔다. 통학이 어려워 자취를 하면서 답양리는 향수에 젖은 고향마을이었고 세상에서 모진 풍파와 싸워 이긴 후 개선장군처럼 다시 찾아온 곳이 답양리다. 깊은 산골의 논고랑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에 눈을 지그시 감으면 유년의 뜰에 다녀올 수 있다. 그래서 이름도 순박한 답양(畓陽)리다.  

어머니는 내가 6살 때 돌아가셨고 이제는 우리 6남매도 위로 누님과 나만 남았다. 갈 길이 바빠 먼저 간 형제들도 그리움이며 남은 누이도 애틋하다. 어머니는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나셔서 그리워도 떠올릴 얼굴이 없다. 시골 아이는 새벽을 열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동년배보다 쓸쓸함도 먼저 알았고 그 덕분에 조금은 웃자란 아이였다. 내가 다니던 군북 초등학교는 교적비만 남긴 채 쓸쓸히 폐교를 맞이했다. 학창시절을 회억하면 작은 배에 3~40명의 마을 주민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아침 배에 올랐다. 옹기종기 붙어 앉아 학교로 일터로 그렇게 아침을 시작했다. 강을 건너는 작은 배에 올라탄 교복 입은 소년, 정취 가득한 소설의 한 장면이 아닌 생존이었다. 뱃삯은 가을에 추수해서 보리로 몇 말씩 집집마다 거뒀다. 매일 아침 배를 타고 등교하는 것이 너무 불편해서 옥천에서 자취를 했다. 성장 통을 앓을 겨를이 없었다. 고등학교는 대전공고를 다녔고 수학선생님의 꿈이 있어 충남대 수학과에 입학했다. 문화동 캠퍼스에서 2년 다니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도중하차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성장 통을 앓을 겨를이 없던 학창시절
소방공무원 재직 시절

■ 인생의 전환점은 소방공무원

서러움도 달랠 겸 군대로 기수를 돌리고 제대 후에 공무원 시험을 보았다. 시험결과는 연좌제의 벽을 넘지 못한 날벼락 같은 불합격통보로 대신 받았다. 7촌 아저씨가 인민군 연대장 출신이었고 아버지가 이장이라 인민 위원장이었다. 연좌제는 나에 대해 묻지 않는다. 가족의 과거 이력이 바로 나로 결정된다. 그래서 불합리하고 억울한 사람을 양산하는 제도였다. 7촌이면 남이라 해도 서운할 이유가 없는 관계인데 억울하지만 그 시절을 거스를 수 없었다. 속울음 삼키며 받아들이고 인생의 방향을 다시 틀었다. 공무원은 연좌제의 벽으로 나에게는 응시의 의미가 없어서 연좌제에서 자유로운 회사원이 되어 삼부토건에 근무했다. 한창 재건을 시작하던 시기라 건설 경기가 좋았지만 나의 길은 따로 있었다.

1966년 대한민국 최초로 소방 공무원 시험을 보았다. 국가직 1회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연좌제의 범위를 축소해서 4촌 이내의 측근으로 조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이미 7촌 아저씨로부터 비롯된 연좌제로 쓴 맛을 경험해봐서 나에게는 서광이 비추는 발표였다.  
지금은 소방 공무원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소방 업무가 경찰부속 업무 정도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경찰은 권력을 사용할 수 있지만 소방공무원은 업무 자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막중한 책임감이 주어지지만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당연히 위상이 높을 수 없었다. 인천 경찰전문대에서 소방교육을 받았다. 84명 입교해서 76명 졸업했다. 대한민국 소방 공무원 역사의 첫 장이 펼쳐졌다. 나는 그 역사의 현장을 시작으로 36년을 근무했다. 

소방업무가 경찰에 소속 되서 서자 대우 밖에 못 받았던 그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국민들 수준이 높아지면서 소방공무원의 위상도 같이 높아졌다. 아이들의 장래희망으로 소방관이 상위에 오른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뿌듯하면서도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어느 분야든 선구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또한 소방공무원의 선구자가 되어 그 길을 닦아 왔다. 물론 선구자는 외롭고 고단하다.

■ 36년 간, 한국 소방의 역사를 쓰다.  

대전 충청남도 경찰국에서 10년 근무했다. 당시는 소방과도 없어서 민방위과 그 하부 조직인 소방계였다. 민방위 국장은 중령 예편한 군 출신이었고 그 사람 밑에서 근무를 했다. 충청남도 경찰국 소방계장을 역임했다. 후에 조직이 개편되면서 소방과로 승격됐다.   

공주 최초 소방서가 생기면서 공주소방서를 시작으로 중부소방서 서부소방서등 3대 서장을 역임했다. 승진이 돼서 서울소방학교장을 역임했다. 소방감 계급으로 경찰의 위치로는 경무관 급 이었다. 마지막 근무지는 대전소방본부장으로 3년간 근무 하다가 계급정년으로 퇴임했다. 백도 없는 산골 촌놈이 그 정도면 출세라고 말할 수 있다. 자랑이 아닌 그만큼 성실하게 임무에 충실했다는 반증이다. 각 시도에 하나 밖에 없는 소방본부장을 역임한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36년간의 소방 공무원을 퇴임하며 대한민국 소방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우리 고향 답양리로 돌아와 노년을 한가로이 보내고 있다.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던 내 삶의 덕목들이 있었다. 가정이든 사회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기본적인 예의를 지킬 때 업무의 성과뿐 아니라 관계도 친밀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유년시절부터 아버님께 배우기를 

출필고지(出必告之) 하며 반필면지(反必面之) 하라.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부모님께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뵙는다. - 사자소학-

유년시절 외출 할 때는 "아버님 다녀오겠습니다." 아버님은 조심히 다녀오라시며 나의 행보를 격려하셨고 돌아오면 반드시 그날의 일정을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사회생활에서도 그 기본을 놓치지 않았다. 좋은 습관은 쌓이면서 신뢰로 인정받게 되어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현역시절 유난히 구령이나 강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학창시절로 돌아가면 우렁찬 음성의 근원지를 찾아낼 수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다닐 때 옥천 집에 올 때면  차비를 아껴야 돼서 6시간 이상을 걸어서 옥천에 왔었다. 대전 비래동 산을 넘어서 대청  댐 수몰 지구를 지나 진벌을 넘으면 용호리다. 용호리에서 배를 타고 넘어간다. 

생각해보면 참 기막히게 살았다. 집으로 가는 길 6시간이 넘게 걸려 끼니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남의 밭에 무를 뽑아 먹고 길을 다시 나서기도 했다. 산을 넘을 때는 아무리 기개 좋은 청년이어도 어둠에 묻힌 깊은 숲속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나지막하지만 거친 짐승들의 신음소리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에도 뒷목이 뻣뻣해진다. 불빛 하나 없는 그 산을 넘으려면 나와 싸워서 이겨야 한다. 뱃속에서부터 소리를 끌어올려

야 !!!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숨죽이고 있던 날짐승들이 그 소리에 놀랐는지 날개를 푸드덕 거리며 날아올랐다. 나는 그 소리에 다시 놀라기도 했다. 그 어둠을 뚫고 집으로 가던 길은 나와 싸워 이긴 시간이었다. 이제 추억으로 되새김할 수 있는 그 오랜 기억들이 나의 흔적이다. 그래서 애틋하다. 

은퇴 후 답양리로 돌아와 다양한 인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 답양리에서의 유유자적한 노후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와 나의 일상은 지는 석양이 아름답듯이 내 노년 또한 윤기난다.
주 1회 차를 몰고 대전으로 나간다. 한밭대 사진 클래스에서 6년간 회장을 맡았다.   

전국으로 출사를 나가 사진 찍는 즐거움과 새벽 출사는 나에게 환희다. 수요일은 옥천에서 시와 수필 창작 반 수업을 하고 있다. 노년에 맛보는 문학과 예술의 깊이는 나를 다시 청춘으로 되돌리고 있다. 

나만의 산책길도 만들었다. 별도로 시골길을 걷는다. 산책 코스는 답양리 막지리 용호리 보은군 회남면에서 분절리 용천리등 7군데 산책 코스를 정했다. 오가는 길에 풍경이 좋을 때는 카메라 렌즈에 정취를 담아둔다. 제일 좋은 코스는 답양리에서 용호리 코스다. 다녀오면  왕복 2시 30분 내지 3시간 이다. 언덕을 오르는 산골이라 차는 듬성듬성 그야말로 나만의 길, 가산의 길이다.

사진을 통해 들여다보는 인생도 각별하다. 제 아무리 멋진 사진도 보이지 않는 곳은 정취가 없거나 지저분하다 그러면 우리는 과감히 삭제하고 가장 보기 좋은 그림만 따로 사진으로 남긴다. 사람이나 인생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가려진 곳이 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한다. 남과 나를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 나이는 나만의 행복을 찾는 여유를 가져야 할 때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부족한 것을 찾아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우리 4남매, 향림이 종주 은영이 지연이 다들 잘살고 있어 노년의 기쁨이다. 딸이 챙겨준다고 세종으로 오라하지만 아직은 내 거취를 당당하게 결정할 수 있는 건강과 여유가 있다. 노년의 위안이 되는 편안한 동지, 여자 친구도 있어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사람이다. 대단한 삶은 아니었지만 이만하면 자존심을 지켰고 사진 속에 담기는 나의 노년도 부족함이 없다. 내일 내 카메라 렌즈를 유혹할 피사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래서 더 설레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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