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제 (옥천작가회의 회원, 동이면 세산리)

요즘 세상살이가 한 줌 모래알 같이 뒤집힌다. 삶과 죽음이 목전에서 번갯불처럼 번쩍거린다. 중국발 '신종코로나'가 미치는 사태가 심각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살이에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다. 모두가 경계의 대상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여건 하에서 순식간에 불어 닥친 여파가 격랑의 물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한 치 앞을 예단할 수 없는 우리네 살림살이가 바람 앞에 촛불 같다.

중국발 사태라지만 남의 일이 아니다. 세계는 지금 한 울타리 속의 다가구 같은 운명공동체이다. 모두가 이웃사촌이다. 더구나 우리는 무역을 통해서 경제의 축을 이끄는 최대교역국이 중국이다.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신종 코로나 사태'가 경제의 발목을 움켜쥘, 직격탄이 될 수도 있기에 불안은 가중되고 있다. 오늘의 중차대한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할 민족적 역량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다. 국민의 지혜를 모아 상생의 묘를 발휘할 때다.

우리의 몸은 '몸'이 아니다. 이름이 '몸'일 뿐이다. 당면한 현실, 그 자체가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기에 방황의 늪이 깊어만 간다. 분별과 집착이 있기에 너와 내가 모래알 같이 흩날리고, 세상은 요지경 속을 면할 길이 보이질 않는 법. 우리의 몸은 '마구니'의 곳간이면서, 그 마구니를  단련시키면  신성한 생명체의 곳집으로도 변한다. 내 안에 그분,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의 성스러운 품성 속에, 내가 존재하는 삶이 또한 우리네 삶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마구니의 스펙트럼은 다양한 빛깔로 존재한다. 마구니도 아버지의 품성이다.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몸이 아닌 '성령'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구조다. 진리는 하나다. 그분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다르듯, 이름을 달리한다. 그분을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라고 칭한다. 공자와 맹자는 인(仁)이라 받들고, 하느님의 음성으로 부르면 성령(聖靈)이라 모신다. 노자와 장자는 그분을 인간의 손길을 부정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칭한다. 길은 다양하지만 궁극의 길은 하나로 통하는 묘미가 진리의 참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처럼 진실한 법은 늘 우리네 마음에 달린 것 같다. 평생 '은둔의 대가'이신 『장자』의 '대종사'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배를 골짜기에 감춰두고, 그물을 늪에 감춰두고 우리는 아주 잘 감추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힘이 센 사람이 짊어지고 가면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을까. 작은 것을 큰 것에 감추면 빠져나갈 구멍은 언제든지 존재한다. 하지만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면(藏天下於天下)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천하를 천하에 맡겨두면 새삼 근심할 건더기가 없다. 감춘다는 말만 있지, 실상은 감추어진 바가 따로 없다는 말이다. '너와 나'라는 이름은 있지만, 네가 곧 나요. 내가 곧 너라는 말인데, 무엇을 감출 것이냔 말이다. 천지 만물이 더불어 나와 하나이거늘, 새삼 잃을 것이 무엇이며, 얻을 것이 무엇이 더 있느냔 말이다. 잃음이 얻음이요, 얻음이 잃음이라는 말이다. 작금의 '신종 코로나사태'가 이를 여실히 방증 하고 있다. 언론의 통제와 조작, 그리고 숨기길 좋아하는 공산당의 실체가 빗은 비극의 말로이다. 단지 바꿀 것이 있다면, 하나뿐이다. 내가 문제이다. 나의 잘못된 오류를 인정하면 모든 것은 항시 제 자리이다. 내 마음이 요동을 치기에 '욕심의 불티'가 바람에 날려, 세상을 시끄럽게 흔든다는 말이다. 이것이 참교육이 아닐까. 공교육이 추구하는 바가 이 길로 접어들어야 인류가 공존의 길을 걸을 수 있단다.

우리네 인생이라 도대체 무엇일까. 태어나면서부터 이 문제는 풀래야 풀 수 없는 '영원한 숙제'다. 살면서 내가 얻은 생각들은, 이 육신 하나를 건사하려고 고생만 실컷 하다가, 어느 순간 멈추고 마는 게 우리네 삶이라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네 삶은 자기 주관 속에서 밑그림을 그리다 간다. 길은 여러 갈래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직선은 죽음의 선이다. 느리지만 여유와 생명을 보듬는 굽은 곡선인 '곧추선'이 생명선이다. 하늘이 그린 보름달의 선 말이다.

며칠 전, 곁에서 함께 호흡하던 지인이 꽃다운 청춘에, 바람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아침부터 소식을 접한 집사람이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울먹이는 눈자위가 세상 시름 다 품은 듯 숙연하다. 저녁에 문상을 갔더니, 차마 말문이 막힌다. 선한 눈자위와 붉던 입술이 어른거려 앉아있을 수가 없다. 

번갯불 같은 우리네 살림살이가 야속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모두가 '허공에 금 긋기 '작업에 몰두하는 우리네 수레바퀴인 것을.

욕심이 없으면, 아니 마음만 비우고 살면 귀신도 순한 친구가 되어서 아니 돕는 일이 없단다. 그곳은 하늘이 무너지기 전엔 도달할 수 없는 곳. 그래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 정답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우리말로 옮기면 '잘 나간다고 으스대지 말자.' 살면서 얻은 생각인데, 돈은 우리네 삶에 있어서 고통을 건네주는 '뗏목'과 같다. 뗏목은 강을 건너면 필요치 않은 물건이다.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것은 고칠 수 없는 큰 병이다. 윤활유와 같이 활용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그것을 쓴다는 것은 해방이 된다는 뜻이 아닐까. 주인이 돼야지 돈이 주인이 되면 더욱더 슬픈 일일 것 같다. 삶과 죽음도 그런 것 아닐까. 죽음도 삶의 연장선이다. 내 시각을 돌릴 때, 나에게 주어진 오늘이 더욱 살뜰해지고, 보람찬 나날로 일상을 불꽃처럼  한 점 남김없이, 건강한 에너지로 태울 수 있지 않을까. 살면서 얻은 생각들을 정리해 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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