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다시 돌아온 고향, 시쓰고 운동하는 노년의 즐거움
옥천읍 양수리 조준순씨를 만나다

편집자주_어렵게 쓴 시가 있다고 신문에 싣고 싶다고 기별을 넣었기에 찾아뵈었습니다. 짧은 시간 삶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들려주었습니다. 1인칭 시점으로 기술하고 그가 직접 쓴 시를 첨부합니다. 

조준순(73, 옥천읍 양수리)<br>
조준순(73, 옥천읍 양수리)

옥천토박이인 나는 조준순(73, 옥천읍 양수리)이다. 옥천읍 오대리 조씨로 동이면 남곡리가 고향이다. 

동이초(22회)를 다녔는데 책보를 등에 걸머쥐고 동네 친구들과 걸어서 학교 다닌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팔남매 중 장녀인 탓에 부모님이 공부는 초등학교 밖에 허락하지 않았다. 몹시 배우고 싶었지만, 그 때 시대가 그랬듯이 남동생들 공부시키려면 내 차례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난 집안 농사일을 돌봐야 했다. 아는 선배가 중학교 책가방을 건네줬는데 엄마가 깜짝 놀라 뺏어 소 여물 주는 짚에 같이 태워버려 엄청 서러웠다. 그래도 험한 세상 홀로 잘 살아왔다. 40대에 남편 여의고 홀로 남매 키우려다 보니 어려운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남편은 맹호부대에 입대해 월남 파병 다녀와서 고엽제 휴유증으로 이른 나이 저세상으로 갔다. 그래도 이 악물고 부동산 중개인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대전 가면 살림살이가 나아질까 동구 쪽에서 부동산 일을 하다가 나이가 들다보니 고향에 가고픈 생각이 부쩍 들었다. 가고 싶었다. 꿈에 그리던 그 고향으로. 쉰 일곱 되던 해인 2002년에 그동안 모아뒀던 돈으로 초등학교 친구와 함께 옥천읍 양수리 샛별빌라 3동을 지었다. 고향에 오니 너무 좋더라. 형제고, 사촌이고, 다 이 동네에 사니까 옛날 얘기하면서 만나는 재미가 어찌나 솔솔한지. 

시는 40대부터 쓰기 시작했다. 나는 불자다. 남편 먼저 가고 두 아이들 키우고 삶이 막막할 때 너무 힘들어서 죽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시로 마음을 다 잡았다. 대전 서구 평촌동에 있는 구한사에 다녔다. 거기 신도회장을 할 정도로 열심히 불공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미륵부처가 나에게 시상을 떠올리게 하며 시를 쓰게 했다. 시를 쓰면 어지럽던 마음이 정리가 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이 시를 옥천신문에 실어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투고를 한 것이다. 요즘에는 영동 천태종인 대동사에 다닌다. 양쪽 무릎을 수술하고 나서 매일 보건소로 가서 운동을 한다. 딸도 옥천에서 살다가 서울 쪽으로 이사 가서 잘 살고 있다. 손녀가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고 해서 더 기쁘다.  고향에서 조용하게 운동하면서 시도 쓰고 사는 게 참 행복하다.

 

관세음 부처님

관세음부처님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당신
힘들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당신에게 찾아가면 
따스한 손길을 살며시 내밀어
엄마의 포근한 가슴으로 감싸 안아주네

고민과 괴로움으로 방황하며 
길을 잃었을 때
당신에게 찾아가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른 길을 가도록 등대가 되어주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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