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이원면 송성자 (44년생 ~ ) 구술생애사
옥천 이원면 송성자 (44년생 ~ )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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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2.05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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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이름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남편

 

그 겨울은 살을 에는 추위가 유난스러웠어. 1.4 후퇴 때 꽝꽝 언 임진강을 다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었어. 여섯 살 꼬마였던 나는 아버지 목말을 타고 끝 모를 피난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비명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아 이런 어쩌면 좋아. 얼음이 깨진 틈으로 엄마와 애기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어. 애기는 자지러지게 울고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안절부절 못했지만 그 모자(母子)를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 목숨을 내놓고 그 모자(母子)를 살릴 용기를 내기에는 피난길에 우리 명줄이 달려있었거든. 우리는 다들 비겁할 수밖에 없었지. 우리가 살아야 하니까. 도망치듯 그들과 멀어질 때마다 아이 울음소리에 한동안 밤마다 환청에 시달리곤 했어.

 

■ 살아남는 게 양반인 피난길
물에 빠진 아기가 파란 명주옷을 입었던 기억이 난다. 입성은 부잣집 이었지만 전쟁 난리 통에는 그저 목숨 부지하는 게 양반이다.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내 손을 꽉 잡고 성큼성큼 앞서가셨다. 재봉틀을 끌며 아버지를 따르는 어머니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물에 빠진 아이와 엄마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시다 나중에는 앞만 보고 가셨다. 더 이상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으셨을 거다. 나도 울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옛날 얘기 고리타분해서 나도 안하고 싶은데 일단 말하면 길어진다. 그 때를 생각하면 그 시절을 살아온 게 그저 용하다.
더 비통한 목격담은 아기 엄마는 폭격을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데 갓난아기가 엄마 젖을 빨며 보채고 있었다. 싸늘해진 시신도 엄마젖은 한동안 체온이 남아 있었을까. 6살 어린 나에게도 충격이며 애통한 일이라 할머니 소리 듣는 나이가되었지만 그 때의 일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남을 도울 수 없는 그 길을 지나온 우리는 비겁할 수밖에 없는 비극에 한동안 말없이 그저 울 수밖에 없었다. 서로 그 모자(母子)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누군가 한마디라도 하면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나에게
“성자야, 눈 딱 감고 아버지 머리 꼭 잡고 있어야한다. 아버지 잃어버리면 안 된다. 아버지 놓치면 큰일 난다.”
나에게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눈앞에 펼쳐진 피난민행렬은 끝을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든든한 목말은 나에게는 너무나 큰 위안이었다. 
평안북도 강재군 화전면 진천리 155번지. 큰 인물 되라고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송 성자. 이북 집의 주소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통일되면 뿌리 찾으러 다시 돌아가야 하는 고향 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토록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간절한 마음을 품고 사시던 아버지는 37살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고향 생각에 이승 떠나기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우리는 피난열차 뚜껑위에 벌 떼처럼 붙어서 지붕에 매달려 간신히 대전역에 내렸다. 지금 대전역 동광장 길 건너 동네가 소제동인데 이북에서 나온 철도국 사람들 피난민 수용소가 있었다. 우리는 창고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한 장씩 던져주는 가마니를 장판삼아 이불삼아 그 겨울을 나야만 했다. 1.4 후퇴 겨울바람은 뼛속까지 비집고 들어와 찬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가마니 한 장으로 막기에는 숨이 턱턱 막혔다. 그저 목숨 부지 하면 양반이라는 생각에 그 시절을 견뎌냈다. 맨 바닥에 가마니 한 장 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눈에 쌍불을 켰다. 아버지는 철도국에 다니셨다. 이북에서는 방귀깨나 뀌는 송씨네였다. 
고향집은 기역자 기와집에서 하인을 거느리고 마당에 곳간도 넉넉했다. 밤에 변소 다니던 기억은 가슴에 꽁꽁 묻어둔 그리운 아버지를 불러온다. 왜 그리 밤만 되면 변소가 가고 싶은지 깜깜한 밤중이라 귀신이라도 나올까봐 무서워하면 아버지는 귀찮은 내색 없이 나를 변소로 데려다주셨다. 닭장 밑에 서서 ‘닭아 닭아 너는 밤에 똥을 싸고 우리 애기는 낮에 똥을 싸지요’라며 노래를 불러주셔서 안심할 수 있었다. 철도국에 다니시던 아버지가 밤 근무라도 가시면 고모가 지켜주어 사랑받으며 자랐다. 금지옥엽처럼 사랑받았던 유년의 기억이다. 따뜻했던 유년 시절 덕분에 나이 들어도 마음이 넉넉해서인지 배포가 크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피난 나올 때 비로도 치마를 뜯어서 엄마와 나는 머리에 마후라로 썼다. 어머니는 임진강 건너 올 때도 재봉틀 머리를 목숨처럼 보살피며 데리고 왔다. 재봉틀이라도 있어야 먹고 살 거리가 될 거라고 그 무거운 걸 기어이 들고 나오셨다. 내려오면서 군인들의 떨어진 옷을 기워주기도 했다. 어머니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어머니는 재봉틀 윗부분만 새끼에 엮어 얼음위로 끌면서 내려왔다. 어머니에게는 그만큼 간절했던 것이다. 


 
■ 오래된 그리움 
피난 오는 도중에 허기진 배도 채울 겸 청국장 냄새에 주저 없이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부엌 아궁이 옆에 청국장이 냄비 째 그대로 있었다. 청국장만 끓여놓고 서둘러 피난을 떠난 빈집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허겁지겁 그 청국장을 먹고 배고픔을 달랬다. 살면서 그렇게 맛있는 청국장은 아직 맛보지 못하고 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고파서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그 때 먹었던 그 청국장은 피난길의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위안이었다. 
간간이 남편한테  
“여보 피난길에 먹었던 그 담북장 맛이 안나. 아무리 이 양념 저 양념 넣어 봐도 그 맛이 안나네.”
남편은 
“우리 마누라 큰일 났네. 큰일 났어. 그 때 그 맛을 어떻게 흉내 내겠어”
그래 맞다. 그 맛을 어떻게 흉내 낼까. 그 시절도 까마득한 옛날의 꿈같은 이야기가 되었고 마누라 피난길 이야기에 같이 마음 아파 해주던 남편도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났다. 피난길에 목말태워 주던 아버지, 재봉틀 끌고 오던 어머니 이제 다 그리운 이름들이다. 
이북에서 내려와 삶의 조건들이 자리를 잡아 갈 무렵 아버지는 선로반에서 일하시다 화물열차에 치여 큰 사고를 당하고 37살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33살에 혼자되셔서 4남매와 함께 모진 세상에 던져졌다. 나에게 애통한 슬픔이 와도 세상을 운행하는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어머니와 우리 4남매는 한 고비 한 고비 넘기며 살아왔다. 사람은 또 그렇게 살기 마련이다.

 

■ 마음은 아직도 옥천여중 다니던 열다섯 살 성자.
옥천여중 다닐 때는 자취를 했다. 60년 전 그 친구들을 지금도 만난다. 옛날 이야기하면서 깔깔 거리며 열다섯 살로 돌아간다. 박안용. 윤혜순. 최경애 그리고 나호자 친구는 이민 가서 만날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주름은 깊어지고 한 살 한 살 나이 먹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추억 할 수 있는 옛날이야기가 있다는 건 감초처럼 달콤하다. 마을 회관에 나가면 아흔이 넘은 형님들부터 동갑 내들 동생들 까지 모여 작은 학교가 된다. 같이 웃고 놀면서 하루를 무료하지 않게 보낸다. 가끔씩 서로 서운해 하거나 토라질 때는 영락없는 열다섯 소녀들이다. 나이 들어도 마음은 소녀 시절에서 다들 멈춘 모양이다. 가슴속에 그리움 하나씩 꽁꽁 숨겨둔 소녀들이다. 
피난길 애환도 눈에 선하지만 남편과 연애담도 내 인생의 달콤한 추억이다. 말하면 또 길어져. 남편과 알콩달콩 로맨스는 다음번에 다시 2탄으로 ...

박승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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