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용 대표
안남 화인산림욕장 정홍용

뜬금없이 전 일본 총리 다나카 씨가 나타나 어리둥절 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나카 씨는 일본정객 중 대표적인 친한 (親韓),지한( 知韓)파로 국내외로 널리 알여진 인물로서, 선친과도 개인적인 우정으로 깊은 관계가 있으며, 필자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 분으로 옥천도 선친의 권유로 3~4번 다녀 가신 분이다.
1918년 비단잉어와 북송선이 떠나는 곳으로 유명한 니가타(新潟) 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945년 2월 27세 때에 대전에 와서 군수공장 건설에 토목기사로 배수로 공사및 기초공사 책임을 맡아 토목공사 사업을 했다.  패전과 더불어 모든 기자재,자산을 한국인 직원들에게 통 크게 기증하고 본국으로 귀환 했다. 
대전 광역시 중구 선화동 仙花洞)에 그가 살던 집이 남아 있어 도시 계획에 따라 철거 유무로 논란이 많았었는 데.....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겁기 그지없다.
다나카 총리는 필자 선친 보다 두살 아래여서 부관 연락선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는 옥천에서 지척인 대전을 갈 때 일부러 내려 옥천 정거장 인근  대포집에서 선친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호형호제 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돌아가 고향인 니가타에서 국회의원에 입후보 했으나 애석하게도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정규교육 이라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그에게 재력이 있을 수 없어 선거 사무소를 빌릴 형편이 못 되었다.
어느날 선친이 계신 동경으로 한살 아래 친구인 경남 함안 출신 안판석(安判錫) 씨로부터 전화가 걸여와 “형님 다나카라는 분이 한국말도 더듬더듬 몇마디 섞어 가며 형님과는 절친 하다고 하면서, 니가타 역전에 있는 제 파찡꼬 건물 3층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빌여 달라고 애걸 하여 귀찮아 죽겠습니다.”
“자네나 나나 외국생활 하니 나중에 덕이 될 지도 모르니까 눈 딱감고 어서 빌여주게” 그러나 애석하게도 낙선하고 말았다.
재차 도전하기 위해 다나카 씨가 안판석 씨에게 부탁을 드리니 펄펄 뛰면서 절레절레 손을 저으며 거절하여, 다급한 나머지 다나카 씨가 선친에게 전화를 걸어와 “안 선생이 거절하니 형님이 오셔서 설득해 주셔야 겠습니다”라고 간곡히 부탁 했다고 한다.
그래서 현지에 가보니 안판석 씨 부인( 부인은 일본인으로 재력가의 딸)이 흥분된 어조로 정적들이 돌을 던져 유리창을 모조리 깨부시며 조센징 (조선 놈)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아우성을 처서 무서워서 더는 못 빌여 주겠단다. 그래서 선친께서 며칠 머물며 설득 시킨후에 아예 직접 선거사무장을 맡으셨다고 한다. 그 결과 운 좋게 방년 28세로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당선 되었다.
필자가 유학한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유학자격시험을 치루어야 했다. 자격은 병력을 필한 자로 4년제 대학을 졸업(이과는 2년 수료 자) 하고,유학시험 합격자( 과목은 국어,국사,상식,영어,유학할 나라 국어=필자는 일본 이므로 일어:그러나 전부 만점을 받을 지라도 국사를 59점 받으면 전부 다음 분기에 모든 과목을 다시 차루어야 함.) 로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고, 안보교욕(유학생은 4주) 을 이수한 자였다.
서류는 대학교 총장 추천서( 4년 평균 학점이 50% 이상 A학점 이어야 발행해 줌),성적증명서,유학할 학교의 입학허가서(총장 추천서와 성적증명서,재정보증서를 검토후 발행), 재정보증서,양국(한국과 필자인 경우 일본) 국회의원 1인 이상의 신원보증서가 있어야 7년 짜리 준외교관 유학생여권을 발급 받을 수 있었다.
국내는 선친과 절친인 정석모(鄭石謨) 의원님이 서 주셨고,일본측에서는 다나카(田中) 현 총리가 선친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쾌히 보증을 서 주셨다.
1973년 메구로(目黒) 에 있는 다나까 총리 자택을 선친과 함께 인사차 방문했을 때, 필자에게 대뜸 괄괄하고 커다란 목소리로 “俺は小學校だけ出て鞄のひもが短い=난 초등학교만 나와 가방끈이 짧네. 早稲田は良い學校ですよ= 와세다는 좋은 학교야. 頑張ってくれ=열심히 해 봐.沃川の駅前のタグバギが本当に美味かった=옥천 역전 탁배기 맞이 참 좋았어”.  탁배기(막걸리)란 말은 요즘 한국에서도 듣기 힘든 데 다나카 총리로부터 들으니 이상한 뉘앙스가 교차 되어 왔다. 이어서 필자와 동년배로 보이는 딸 마끼꼬(眞紀子)달변가와 속사포로 유명세를 탔고, 후일 국회의원과 외무장관 역임) 씨를 소개해 주셨다.
요즘 국내언론에 수시로 얼굴을 내미는 일본인의 으뜸은 단연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다. 그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조부는 육군 대장에 자작 (子爵), 외조부 형제도 나란히 총리를 역임 했고, 그 중 한 명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부친은 외무장관을 지낸 11선 국회의원이며, 아내는 유명한 모리나가(森永) 제과 재벌의 사장 딸이었으니 금수저가 아니라 다이야몬드 수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견주어 흙수저 출신으로 일본 역사상 최고 권좌에 올라 나라를 좌지우지함으로써 지금껏 일본인들이 경외(敬畏)하는 두 인물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금맥,파벌정치로 유명한 다나카 가쿠에이 뿐이다. 다나카는 소장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무작정 상경하여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독학으로 토목을 배워 건축기사 자격을 획득한 고학도 였다.
그 기술을 대전에서 펼치지 못하고 귀국 했다. 
두뇌회전이 빠른 명석한 두뇌와 결단력,실행력,추진력,권모술수로 최연소 장관,16선(選)의 신화를 창출 하였다. 그는 “정치는 숫자이며, 숫자는 힘이고, 힘은 돈이다”는 믿음 아래 120여 명의 국회의원을 휘하에 거느린 최대 파벌 영수로 군림했다. 그는 비록 록히드 사건등으로 거액의 검은 돈을 손에 쥐었으나, 휘하 의원들이나 지인들, 심지어 정적들에게 까지 나누어 주는 용병술의 달인 임에도, 정작 자기를 위한 사욕으로 빼돌린 돈은 일절 없는 불가사이한 인물이다. 
그가 대장성(大藏省=우리의 재무부) 장관에 취임하여 핵심간부들을 모아 놓고 “나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싶이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귀관 들은 아까몽(赤門=도쿄 대학교 정문이 붉은 색으로 도색되어 도쿄대를 지칭함) 출신이니 알아서 소신 껏 하시요. 전적인 뒷 책임은 내가 질테니...”라는 짤막한 명언을 남겼고 ,그가 금권정치와 요정정치로 애인을 서너명 거느리고 있다고 하여 야당이 국회에서 “다나까 총리 ! 당신은 총리의 박봉으로 어떻게 3~4명의 애인을 거느릴 수 있오”라며 떠져 물었다. 다나카는 잠시 의석을 둘러본 후 미소를 지으며 “나도 그걸 잘 모르겠오. 여기는 신성한 국사를 논하는 민의의 전당이니 그런 사적인 배꼽밑 얘기는 나중에 제 사무실에 오시면 자세히 들여 주겠오”라고 하여 만장의 기립박수를 받은 일화는 지금도 이자카야(居酒屋=선술집)에서 술안주로 회자되어 쉼게 들을 수 있는 다나카 어록이다.
선친께서 그의 저서 “일본열도개조론(日本列島改造論)”을 다나카 총리로 부터 100부를 기증 받아 그의 한국의 지인들께 배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필자가 일시귀국시에 탁송편으로 갖고 왔다. 정석모 의원님께 전해 주었더니 너무나 고맙다고 만면에 미소를 지으시며 잡아 주시던 손끝의 온기가 지금도 느껴 오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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