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옥
(시인, 옥천군문화관광해설사)

며칠 전 까지도 한 장 남은 달력이 펄럭였던 벽엔, 하얀 눈을 덮어 쓴 산수화가 그려진 새 달력이 자리했다. 벌써 달력의 숫자는 소한을 넘어 대한의 코앞에 닿아 있었다.   
한동안 연말연시로 바삐 지냈다. 새로운 맛이 그리워 장날이기도 해서 시장을 기웃거렸다. 시골 할머니들과 장꾼들이 좌판을 벌리고 있는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지난 가을이 떠오르는 말갛게 곰삭은 홍시가 내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 ! 저도 어머니를 닮았나 봅니다. 젊었을 땐 홍시는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만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어머니처럼 떡도 좋아하고 홍시도 아주 좋아한답니다. 
가을에 빨갛게 잘 익은 감을 딸 때면 마음은 둥둥 뜨고 보름달처럼 한없이 둥그러집니다. 그렇게 딴 감을 바람이 잘 통하는 상자에 부딪치지 않게, 한 채씩 넣어 서늘한 곳에 보관 해 두었다가, 한 개씩 꺼내 먹는 그 홍시 맛도 일품이긴 하지만요,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주셨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겨울이면 빨갛고 탐스러운 홍시를 하얀 사기그릇에 담아 수저로 속살만 먹여 주셨던 어머니, 오늘 어제의 그 홍시를 어머니가 되어 먹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겨울이면 가을에 따서 옹기 항아리 담아두었던 홍시가 유일한 간식거리였습니다. 겨울 햇볕이 좋은 날이면 어머니는 우리 남매들을 양지바른 뜰 돌 위나 툇마루에 앉혀 놓았었습니다. 머리에는 하얀 수건을 쓰셨던 어머니, 흰 무명치마 저고리에 하얀 행주치마를 두르시고 늘 정갈해 보이셨지요. 바삐 움직일 때마다 저고리 고름이 펄럭이고 옷자락에서 건조했던 어머니의 푸석했던 삶이 달그락거렸습니다.   
어느 겨울날 햇살이 봄볕처럼 쏟아지던 날이었지요. 그날도 어머니는 툇마루 끝에 우리 남매들을 앉혀놓고 종종걸음으로 뒤꼍을 다녀오셨지요. 다녀오시는 손에는 빨갛고 투명한 홍시가 들려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건드리면 ‘톡’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지요. 좀 더 겨울이 깊어지면 먹음직했던 두서너 개의 홍시는, 바짝 마른 겨울 햇살에 어머니의 손등처럼 쪼글거리고 말갛게 변해 바라만 봐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지요. 그렇게 줄어든 어머니의 얼굴과 뒷모습을 가슴으로 껴 않고 홍시를 먹고 있습니다.

 
입 안 가득 가을이 퍼진다
 
겨울이면 
하얀 사발 그릇에 달콤한 향을 담아 먹이던 당신

오늘은 도자기 그릇에 그려진 
난 꽃이 지워지도록 긁어대며
홍시를 먹는다

자식에겐 속살만 먹이고
빈 그릇만 흩던 
몸에서 향긋한 사랑을 뿜어내던

그 향이 그리워
나 오늘 당신이 되어
    - 졸시「홍시」

어머니 아주 많이 보고 싶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의 자리에 있어도 그때 그 맛이 그립습니다. 곁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그리울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어머니가 석삼년 계시다 가신 고향집엔 겨울바람에 대숲마저 목 자져 있었습니다. 어스름 저녁 앞마당에는 지금도 여전히 어제의 먹감나무 위로 달빛이 돋고 지고 있더군요. 그때 작고 아담했던 감나무가 지금은 우람한 고목으로 잘 자랐답니다. 지난 가을에도 그 먹감나무는 소담스럽고 탐스럽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열렸었습니다. 가을마다 감을 딸 때면 골 붉은 감잎 같은 어머니의 고운 미소가 그립습니다.
안방에 벽에 걸린 액자 속 내 어릴 적 여린 얼굴에 지금의 내 우묵한 얼굴을 대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액자 속에 나인 듯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순을 막 넘기고 보니 내가 엄마였습니다. 
표정 없이 나를 보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짚어봅니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아무런 내색도 없는 어머니 살 냄새가 그리워, 문짝처럼 마음은 자꾸만 덜컹거립니다. 아직도 마당가에는 어제의 먹감나무가 우람하게 우뚝 서서 무거운 그림자 드리우며 아직도 덜 떨어지지 않은 제 잎을 세고 있습니다. 
어머니 가시던 날 밤 초겨울 바람에 문풍지는 오래 떨고 먹감나무가 흔들리며 울던 그 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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