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1호 종묘제례악 일무 이수자 송민숙씨, 6년전 남편따라 귀촌
이원면 강청리서 복숭아 농사 도우며 서울, 대전, 논산, 세종서 공연과 강습 번갈아
'옥천에서도 많은 공연과 강습 해보고 싶어, 시설 인프라 등 아쉬워'

 춤을 추는 새가 되고 싶었다. 춤새는 송민숙(46, 이원면 강청리) 춤새 무용단 대표의 아호이다. 6년전 남편을 따라 남편의 고향인 이원면 강청리에 귀촌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15년 12월 청산면 한곡리서 열린 동학영령 달래는 진혼굿에서였다. 하얀 소복을 입고 춘 살풀이 춤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2016년 11월 지용시낭송협회 정기발표회에서 그는 향수를 주제로 기타리스트 김광석, 행위예술가 김석환씨와 환상적인 무대를 펼쳤다. 간간히 지역 행사에서 선을 보인 그를 아직 사람들은 잘 몰랐다. 옥천 사람인데 무용을 한 사람이라 그런지 외부에서 온 사람인양 착각했다. 옥천에 더 머물고 싶은데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아서 서울로 인근 지역으로 무용과 강습을 하러 돌아다녔다. 옥천사람 송민숙, 춤을 멋들어지게 추는 송춤새, 그를 한번 만나보자. [사진제공=송춤새]

그는 무용신동이었다

 어릴적부터 흥겨운 음악에 몸을 흔들었던 그는 ‘신동’이라 불리웠다. 어릴적부터 음악의 선율에 몸을 맡겼던 본인을 자칭 ‘신기한 동물’ 신동이라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했지만, 그는 ‘신동'이었다. 5살 때부터 춤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는 40여 년 동안 그 꿈이 한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춤, 무용가가 그의 변치 않는 꿈이었다. 춤과의 혼연일체, 그래서 받은 예명도 ‘춤새’였다. 춤을 추는 새, 또는 춤사위, 춤의 모양이란 중의적 의미를 담은 춤새는 그가 창단한 무용단 이름이자, 그의 새로운 이름이 되었다. 

 부산 동래가 고향이다. 온천초등학교, 유락여중, 동래여고를 나왔다. 부모님은 춤을 제법 추는 아이가 신기해 초반에는 그 꿈을 응원해주었지만, 고된 길임을 알기에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접신한 것처럼 신들린 그의 춤의 세계를 막을 자는 없었다. 물 좋은 동네에서 그는 안수탕, 녹천탕, 허심청 등 목욕탕도 여기저기 군데군데 다녔고 동네 솔밭에서 자치기, 말뚝박기하고 놀던 그런 시절이었다. 나름 리더쉽도 있는 골목대장 출신이었다. 몸을 자유자재로 쓰는 그는 어릴적부터 인기가 많았고 친구들로부터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무용은 삶을 지탱해주는 꿈이었다. 그 꿈이 산산조각이 날 뻔한 사건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있었다. 

 꿈이 좌절될 뻔한 교통사고

 어스름해질 무렵 하교하는 그를 덮친 것은 큰 덤프트럭이었다. 속도위반, 신호위반을 하며 무대포로 달려드는 덤프를 보고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뇌를 다치지는 않았지만, 몸 한 쪽이 완전히 으스러졌다. 허벅지 살이 타이어 자국이 선명하게 박힐 정도로 두부처럼 이겨졌고 손목뼈가 금이 가는 등 장장 5개월 넘게 입원할 정도로 중태였다. 죽음의 그늘을 본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절은 하지 않았다. 뺑소니를 안 당하려면 운전자 얼굴을 봐야겠다는 일념으로 눈을 떳고 사점이 지나왔는지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시원하게 일렁이는 바람이 박하사탕처럼 ‘화’하게 느껴졌죠. 다음에 바로 병원으로 옮겨진 것 같아요.” 몸을 쓰는 꿈을 가진 소녀였다. 아득했고 절망스러웠다. 입시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뇌리를 맴돌았다. 몸은 다행히 회복되고 있었지만, 5개월의 병실 생활에 몸무게는 10kg가량 불어났고 재활도 참 멀어보였다. 

  얼른 퇴원하고 싶었다.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정신적 피폐함을 극복하고 싶었다. 집에 돌아온 후 3일 동안은 못 일어났다. 노인처럼 비가 오면 삭신이 쑤시기 시작했다.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재활을 위해 일어나고 움직였다. TV에서 본 택견을 배우면 왠지 나을 것 같아서 택견을 배우러 가는 길에 단전호흡을 하는 친구를 만났다. 부들부들 떨면서 걸어가는 나를 붙들고 그가 가르쳐 준 단전호흡은 심신의 안정을 주었다. 단전호흡과 택견을 병행했다. 몸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움직임이 자유롭게 되기 시작했다. 

전통굿 배우러 전국 유랑도 

자유인이었다. 얽매이기를 싫었다. 굳이 대학 가는 것에 목메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존경하는 무용 선생님한테 가서 배우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대학을 고민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간절히 원해 이듬해 재수하고 용인대학교 무용학과에 진학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착실한 모범 학생은 아니었다. 짜여진 정규과정보다 배우고 싶은 것을 배워보고 싶었다. 교수님하고도 의견이 안 맞으면 수시로 싸우고 학교를 빠지기도 했다. 대신 바깥으로 전국으로 돌아다녔다. 전국을 떠돌면서 동해안 별신굿, 진도 씻김굿, 풍물굿과 무릎을 굽히고 펴고 하는 저정거림에 대해서 배웠다. 풍물을 보통 ‘매구친다'고 했다. 매구란 말은 꾕가리를 뜻하기도 하고 매귀(귀신을 파 묻음)엑서 어원을 두기도 했다. 돌아다니면서 ‘풍장친다’, ‘굿친다’, ‘걸궁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마을 고샅에서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풍물을 깊숙하게 배우기도 했다. 무대로 불러들인 정형화된 김덕수의 속도전 사물놀이보다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신명이 절로 나는 마을 주민들의 매구치는 것이 더 끌렸다. 20대에는 그렇게 풍물에 흠뻑 빠졌다. 

종묘제례악이 산처럼 솟구치더라

30대가 되니 음악이 달리 보이더라. 수제천, 종묘제례악을 딱 접했을 때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다는 느낌보다는 웅장한 산맥과 광활한 들판, 거침없는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느꼈다. 어떤 장쾌한 대륙의 기운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고요함 속에 숨겨진 웅장함은 혈관을 파고 들었다.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1호로 종묘제례가 무형문화재 56호로 지정받은 것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200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가 될 정도로 가치와 의미가 깊은 악가무일체의 유산이었다. 무엇보다 600여 년을 이어온 조선 유교 문화의 결정판이었다. 종묘제례악에는 다양한 음악과 무용이 함께 진행되어 ‘악가무일체’의 값진 유산이라 평한다. 정대업, 보태평 등의 음악이 연주되고 왕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는 문무와 무무가 병행되었다. 문무와 무무를 합쳐 일무라고 하는데 이는 여러명이 도열하여 추는 춤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종묘제례악 보존회에 들어가서 김영숙 전수교육조교(사단법인 정재연구회 이사장)에게 종묘제례악을 사사받았다. 4-5년 이상 사사를 받고 시험을 쳐서 합격을 해야 이수자가 될 수 있었다. 이수자는 전국에 100명 내외,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일무 이수자로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까지는 국립국악원 외부 강사로 활동했고 (사)한국전통가무악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무용 치료와 장애인 봉사에도 열심

여러 한국무용을 섭렵하면서 그는 무용학과 심리학을 접목시킨 무용치료(댄스 테라피)에도 관심을 갖고 공부를 했다. 서울시 장애인체육회 홍보대사도 역임했고 장애인들에게 무용을 가르치면서 심신을 치유하는 방법도 함께 가르쳤다. 대전에서는 달팽이의 꿈이란 프로젝트를 만들어 장애인 무용치료를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또 대전시민대학에서 춘앵전 강의를 할 때 만난 인연으로 한밭도서관 녹음봉사에도 매주 2시간씩 참여한다. 벌써 4-5년이 다 되어간다. 목소리가 좋다는 그 말에 힘입어 목소리 봉사를 하기 위해 시각장애인이 보고 싶어하는 책을 대신 읽어주며 녹음을 한다. 봉사하는 삶이 체화되어 있다. 하지만, 재능기부란 말은 또 싫어한다. ‘재능기부’란 말은 프로무용가의 삶을 더 척박하게 해 놓았다. 아마추어들의 무대욕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재능기부는 그 뜻의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프로연주자와 무용가들의 입지를 좁혀놓았다. “열악하지요. 프로 연주자와 무용가에게는 그것이 생계인데 재능기부란 말은 삶을 더 힘들게 만들죠. 예술을 향유하는 그 마음을 조금 더 고민한다면 ‘그냥 해주면 안 돼’라는 상처주는 말 보다 그 이면에 예술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피와 땀을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지금은 똑같이 유네스코 지정 인류문화유산에 지정된 처용무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처용무는 궁중무용의 하나로 음력 섣달 그믐날 악귀를 쫓는 의식인 나례에서 복을 구하며 춘 춤이었다. 동해 용왕의 아들로 사람 형상을 한 처용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으로부터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춤이다. 복숭아가 치장된 처용탈을 쓰고 30분 가량 춤을 춰야 하는 고된 노동의 춤이지만, 처용무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다. 처용무 보존회에 들어가서 인남순 전수교육조교에게 사사를 받고 있다. 

“배움을 끝내는 순간 늙어가는 것 같아요. 새로움을 배우고 싶은 열정과 의지가 저를 늘 살아있게 만들어요”

그는 어떻게 옥천과 연을 맺었을까

 춤과 결혼했고 평생 춤을 추면서 독신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마흔 즈음에 공부하는 4살 터울 위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 고향이 마침 이원면 강청리였다. 풀꽃반지 청혼에 감동했고 군북면 환평리 마농하우스 레스토랑을 빌려 정말 간촐하게 스몰웨딩을 했다. 그리고 남편은 고향에 내려가 홀로 둔 시어머니를 모시고 싶다고 했다  거절할 수 없는 말이었고 흔쾌히 응했다. 시골에 살아본 적 없었지만,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남편은 귀농해서 어머니와 함께 복숭아 농사를 짓는다. 그는 평일에는 대전, 세종, 논산을 다니면서 체형교정, 발레도 가르치고, 한국무용, 무용치료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리고 금요일에 서울로 올라가서 3일 동안은 서울에서 공연도 하고 연습도 한다. 그는 고3때 교통사고 충격 이후로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 운전대만 잡으면 부들부들 떨려 사고를 낼 것 만 같아 대중 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그는 이원이 참 좋다. 지척에 이원역이 있어 기차를 타고 여행가는 기분으로 서울을 가고, 고향에 돌아오는 기분으로 서울역에서 무궁화호에 몸을 싣는다. 남편은 역으로 마중나온다. 여행같은 삶이 늘 변주되면서 새로운 활력소가 된다. 서울에는 10여 년 전부터 송춤새씨의 사진을 찍어주며 인연을 맺은 사진작가 안소휘(61)씨 집에 묵는다. 왕언니 같은 그녀는 춤에 대해 잘 안다. 춤 사진은 아무나 못 찍는 것인데 흐름과 맥락을 이해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춤 사진을 찍는데 일가견이 있다. 안소휘 작가 언니의 집은 서울 전진기지이고, 그는 생을 같이 나누는 훌륭한 도반이다. 그는 얽매이기 싫어 어디 무용단에 속해 있거나 따로 학원을 차리거나 하지 않았다. 춤을 추는 새처럼 날아다니고 싶었다. 한번은 독도에 대해 시를 써왔던 박정진 시인이 독도박물관 앞에 시비를 건립할 때 전날 '춤을 추어 줄수 있겠느냐’고 요청을 해와 그는 망설임없이 선뜻 응했던 적이 있어다. 당시 무기력에 바닥을 쳤을 때인데 그의 구원은 역시 춤이었다. 옷을 직접 디자인에 수선집에 맡겨 만들고 불교용품점에가서 오방색깔 어울리는 용품을 산 다음에 음악을 듣고 직접 춤을 안무했다. 그리고서 그 다음날 대구와 포항을 거쳐 울릉도에서 독도로 향했다. 독도가는 파도는 험하지 않았는데 용왕과 미리 통화했다는 농을 칠 정도로 마음이 평안했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독도를 보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어떤 비장미가 느껴졌다. 독도처럼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스며들었다. 

옥천에서 무용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정작 대전, 세종, 논산에서는 인기강사이자, 서울에서 쇄도하는 공연요청이 오는 그는 옥천에서 활동이 없다. 안타깝다. 다행히 지난 중국 항주로 떠난 지용제에서는 난계국악단 김율희씨의 날라리(태평소)의 음률에 맞춰 지용시의 풍랑몽을 창작 초연하기도 했다. 5월10일 오후 4시 지용제 무대에서 정지용 시인의 시로 춤을 선보이기도 한다. 조금씩 지역과 접점을 만들어보고 싶다. 지역 아이들과 지역 어른들과 무용에 대한 신세계를 경험해주고 싶다. 한국무용만 고집하지 않는다. 다양한 춤의 세계로 이끌고 싶다. 

 “춤을 마음 껏 출 수 있는 무대와 연습실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얼마든지 함께 하고 싶은 의지가 있는데 인프라와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워요. 저는 벌써 6년째 이원면 강청리에 살고 있는 옥천 며느리거든요. 얼마든지 활용하여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지용제 무대에 서게 된 것도 항주지용제의 인연으로 이뤄진 즉흥무대였다. “저 이제 뿌리내린 옥천에서 춤으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요. 그 무대 위에서 옥천의 춤을 한번 선보이고 싶어요. 이번 지용제가 그런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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