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41)
정진기·이응주(87·88, 옥천읍 가화리)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가화리에 사는 정진기(87)·이응주(88)씨 부부입니다. 옥천군 토박이 출신 최초의 목사인 정진기씨는 1958년 전도사로 처음 부임한 영동군 황간에서 만난 한 살 연상의 간호사 이응주씨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12월 24일 4남매와 후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금강혼식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금강혼식은 결혼 60주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참고로 결혼 10주년은 석혼식, 20주년은 도혼식, 25주년은 은혼식, 30주년은 진주혼식, 45주년은 홍옥혼식, 50주년은 금혼식, 60~75주년은 금강혼식이라고 부릅니다). 금강혼식을 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자식들이 모두 살아 있어야 하고, 둘째 결혼해야 하고, 셋째 이혼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금강혼식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커다란 축복의 징표이자 훈장인 셈입니다. 두 사람의 축복 넘치는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옥천 토박이 출신 최초 목사가 되기까지
 나는 1934년 군북면 석호리에서 태어났다. 내 고향 석호리는 대청댐이 들어서면서 대청호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군북초등학교와 옥천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17세가 되던 해인 1950년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이용훈 집사의 전도로 옥천남교회에 나가던 날부터 내 인생의 방향은 바뀌었다. 당시 옥천에는 옥천남교회와 옥천북교회가 있었다. 나중에 옥천남교회는 옥천제일교회(기장 교파)가 되었고, 옥천북교회는 동성교회(통합 교파)가 되었다. 그러다가 1955년 이 두 교회는 옥천교회로 통합됐다.
 옥천실고 입학 이후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나는 평생 신앙인의 삶을 살게 될 운명을 직감했다. 성가대 대원과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고, 학생회 회장도 맡았다. 교회 청소는 물론이고 새벽기도회를 알리기 위해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종을 치는 일도 나의 몫이 되었다. 오전 4시 30분에 초종(初鐘)을, 5시에 재종(再鐘)을 치면서 나의 신앙은 '막연한 열정'에서 '확고한 신념'으로 성장해나갔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먼저 아버님의 반대가 심했다. 정지용 시인을 배출한 연일 정씨는 옥천에서 유교 성향이 강한 명문가였다. 따라서 제사를 지낼 때 모두 엎드려 절하는 동안 나만 혼자 서 있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아버님이 나에게 교회에 나가지 말 것을 집요하게 종용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종교 박해를 받은 셈이었지만 그것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한 나의 신앙적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나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신학대(강남대 신학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1953년 3월 충북노회 전도사로 임명되었다. 교역자로서의 첫 부임지는 영동군 황간면의 황간교회였다. 여기서 내 평생의 반려자 이응주를 만났다. 처제가 이 교회 신자였는데, 젊은 교역자인 나의 신부 감으로 자신의 언니를 소개했다. 25세였던 나는 한 살 연상의 이응주와 1958년 9월 19일 약혼하고, 12월 5일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영장이 나오는 바람에 결혼 7개월 만인 1959년 7월 군에 입대했다. 
 나는 3년 만기 전역을 하고 돌아와 옥천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옥천군 토박이 출신 최초의 목사 2명(서진원, 정진기) 중 한 명이었던 나는 옥천중앙교회에서 11년 동안 시무하고 옥천경찰서 옆에 위치한 옥천제일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2002년 은퇴할 때까지 담임목사로 헌신했다. 이 기간에 영동제일교회, 청산제일교회의 재산관리인 역할도 맡았고, 1970년에는 옥천기독교연합회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응주씨는 대전간호고 2학년 재학 중 6.25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육군298부대(제2보충대) 의무대에 입대했다. 전쟁 1주년인 1951년 6월 25일 찍었던 이 사진 덕분에 국가유공자(6.25 참전용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 아내가 6.25 참전용사로 인정받은 사연
 아내 이응주는 1933년 영동군 황간에서 10남매(4남6녀) 중 넷째(3녀)로 태어났다. 1940년 황간초등학교에 입학해 6학년이 되던 해에 해방을 맞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학교에서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을 쓰면 교사들로부터 경고카드를 받았고, 해방 직후의 혼란으로 2학기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해 이듬해인 1946년 전반기에 초등학교 수업을 한 학기 보충한 다음에야 정식으로 졸업할 수 있었고, 9월이 되어서야 뒤늦게 영동여중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아내는 해방 전후사를 기억했다.   
 아내는 1949년 대전간호고등학교(나중에 충남대 간호대가 되었다고 한다)에 입학했다. 그런데 2학년 재학 중 6.25전쟁이 터졌다. 교사 언니를 따라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마침 대위 계급을 가지고 있던 형부가 육군298부대(제2보충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처제가 간호고 재학생이니 입대해 주사라도 놓아주면 좋겠다"는 형부의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의무대 간호사 의용군으로 입대했다가 16개월 동안 군 복무를 하게 됐다. 아내는 출퇴근이 아니라 정식으로 군복을 입고 여군 막사에서 생활했다. 여군이 8명, 간호사가 4명이었다. 여군들에게는 군번이 있었지만 간호사들에겐 군번이 없었다. 
 육군298부대 의무대는 질병이나 부상에 시달리던 훈련병들을 치료하고 돌봤다. 그런데 이상하게 제대로 먹지 못한 듯 마른 명태처럼 피골이 상접한 훈련병이 많았다. 아내는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훈련소가 제주도에 있었는데, 물이 맞지 않아 훈련병들이 고생한 것이었다. 건강을 회복하면 전방의 고지전에 투입된 훈련병들의 약 3분의 1이 한글을 몰랐다. 이름표를 거꾸로 달고 있던 훈련병들도 많았다고 한다.
 6.25전쟁 1주년이 되던 1951년 6월 25일 아내는 의무대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의 앞줄 맨 오른쪽 앳된 얼굴의 여성이 19세 간호사 시절의 아내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렀다. 국가유공자(6.25 참전용사)로 인정해달라고 신청했지만 '군번 없던 간호사'의 진실을 증언해줄 서류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사진을 함께 찍었던 사람들도 대다수가 고인이 되었거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찍었던 이 사진 오른쪽에 이런 메모가 적혀 있었다. 
 "298부대 의무대 일동 6.25 1주년 기념." 
 아내는 이 한 장의 흑백사진 덕분에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우리가 살아낸 하루가 그 자체로 역사가 될 수 있고, 오늘 우리가 찍은 사진 한 장이 곧 역사의 증거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니 우리의 사소한 일상이 역사 그 자체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런 깨달음을 선물한 아내에게 경의를, 그런 기적을 선물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   

정진기 이응주 부부는 2018년 11월 24일 후손들의 축복 속에 결혼 60주년 금강혼식 감사예배를 드렸다.
정진기 이응주 부부는 2018년 11월 24일 후손들의 축복 속에 결혼 60주년 금강혼식 감사예배를 드렸다.

 

■ 매일 아침 가족예배 드리며 하루를 열어 
 아내가 무슨 대가를 바라고 의무대에서 복무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아내에게 보상이 주어지곤 했다. 앞에서 말했던 대로, 나는 결혼 7개월 만에 영장이 나오는 바람에 갑자기 군에 입대했다. 가장(家長)이 사라진(?) 최악의 상황에서 아내가 가정의 경제를 꾸려나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아내는 생계를 유지해야 할 방법을 찾아 나섰고, 그런 절실함이 약방을 여는 용기를 내도록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옥천읍에는 약사가 약을 조제하는 약국(藥局)은 아예 없었고, 약사가 없어도 약을 소매할 수 있는 약방(藥房)만 몇 개 있던 시절이었다. 아내는 군대에서 의무대 간호사로 일했던 의료인이라는 경력 덕분에 1961년 문정리에 '동일약방'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2016년 문을 닫을 때까지 동일약방은 무려 55년 동안 아내의 일터가 되어 주었다. 덕분에 내가 보다 충실하게 교역자의 역할에 전념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나와 아내는 슬하에 4남매를 두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잉태한 장녀 은숙을 시작으로 장남 호종, 차녀 혜숙, 차남이자 막내 철종이 2년 터울로 차례로 태어났다. 4남매는 모두 성실하게 학교에 다녔고 건강하게 성장해주었다. 특히 두 딸은 주일학교 교사와 피아노 반주자로 아버지의 목회 일을 도왔다. 
 이렇게 자식들이 건실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날마다 아침에 가족예배를 드리며 신앙심을 길러준 덕분이라고 우리 부부는 믿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4남매가 타인을 배려하는 겸손한 사람, 시간을 황금처럼 사용하는 사람,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으로 자라주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다음은 우리 부부가 즐겨 암송했던 성경 구절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장 13절)
 나와 아내 2명으로 시작된 우리 식구는 현재 19명으로 늘어났다. 성장한 4남매가 배우자를 만났고, 9남매의 손주가 태어나면서 모두 19명이 되었다. 과분한 축복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또 감사드린다.  

 

■ 아무리 상황 나빠도 기도일기 중단 안해
 나는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교회 밖으로 나가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실제로 37세가 되던 해인 1970년부터 예비군과 민방위 정신교육 강사로 활동했다. 옥천경찰서 경목실장으로도 35년 동안 활동했다. 경찰관들은 물론이고 유치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강연도 하고 사비를 털어 빵과 우유도 대접했다. 나중에 정부가 이런 활동을 인정해 대통령 표창과 훈장(138058호)을 수여했다.
 직업인이자 사모로 살아온 아내가 1996년부터 25년째 날마다 해오고 있는 일이 있다. 기도일기를 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내의 기도일기 쓰기는 그날 새벽기도에서 암송한 성경 구절을 적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 다음 나라, 지역, 교회, 자식, 후손을 위해 기도한 내용을 적는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기도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내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고 그것을 일기에 적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젊은 시절 아내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수(繡)로 놓았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7절)

진기 이응주 부부는 슬하에 4남매를 두었다. 이들이 성장해 나중에 배우자를 만났고, 9남매의 손주가 태어나면서 총 19명의 대식구가 되었다.
진기 이응주 부부는 슬하에 4남매를 두었다. 이들이 성장해 나중에 배우자를 만났고, 9남매의 손주가 태어나면서 총 19명의 대식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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