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그 여름, 그때의 아픔과 고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 귀한 첫딸로 당당하고 아름다웠지
나는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3남매 중 첫딸로 태어났다. 노근리는 새터말 아랫말 건넛말로 모두 100호 정도의 큰 부락이었다. 우리 집은 일꾼을 5명 부린 부농으로 나는 왜정 때 황간초등학교 수료했는데 여아 중 나 혼자만 학교를 다녔다. 당시 큰 애기들이 19명이나 있었는데 주로 우리 집에 모여서 윷놀이, 오재미와 종발 돌리기(그릇에 무엇을 넣어서)도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고운 꿈 꾸던 유년의 내 고향이 6.25전쟁 중 핏발서린 참담한 역사의 현장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 따뜻한 시아버지와 데면데면한 신랑
내가 20살에 25살 동이면 총각과 결혼했다. 신랑은 청주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사공장(베짜는 공장)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어. 이원초등학교를 17회로 졸업했는데 겁나게 잘 생겼었지. 시댁 시집살이는 안했지만 남편이 인물이 너무 좋아 세상유혹이 많았지 뭐야. 가정을 등한시하고 나는 동이면 시댁에서 살림 살면서 남편에게 6년 동안 홀대를 당했지. 많이 울면서 살았어. 맞선볼 때 분명히 좋다고 했는데 남편은 일 년에 한두 번 나타나서 딱 6개월 살고 헤어지자고 하더라. 나는 “등으로 나가도 발로는 안 나간다.”고 버텼지. 내가 종갓집 맏딸이라 흠 잡히면 동생들 혼사 길이 막힐까 두려워서였지. 3년 만에 간신히 큰딸을 보았어. 시아버지와 목화밭을 매러 갔을 때 내 멋대로 하였던 가 보다. “아가, 아가. 하느님이 너만 같으면 다 골고루 산다. 목화씨는 큰 건 놔두고 작은 것을 뽑아내 적당히 한 뼘씩 사이를 띄워야 한다.”하고 말씀하신 게 아직도 귀에 선해. 비누도 없던 시절 추운 겨울 또랑에서 빨래를 해오면 시아버지가 나오셔서 가마솥에 빨래를 재워놓고 당신 방으로 데려가 얼음장 같던 내 손을 아랫목에 끌어다 녹여주셨던 고마우신 분이야. 

■ 6.25 피란길 내려가며
남편이 나더러 먼저 황간 친정으로 피난을 떠나라고 하였다. 밀가루개떡을 쪄서 구장터까지 갔는데 도저히 피난민 차를 탈 수 없었다. 고향사람인 경찰 덕분에 부산행 기차를 탔지만 추풍령역에서 내려서 황간까지 100리 길을 걸어서 올라가야했다. 너무나 뚱뚱한 미군들이 또랑가에 줄지어 앉아있다. 어느 모자와 함께 셋이 둥구나무 정자에서 가마니를 덮고 잘 채비를 하자 동네 노인이 보시더니 “홀몸도 아닌데...”하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쌀밥이 귀한 6월에 쌀밥과 조기를 대접하고 모기장을 쳐주며 잠을 재워주었다. 남편은 따로 피난을 가서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무조건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 미군들의 무차별 폭격을 겪었다
미군들이 아군 100명이 있는데 빨갱이 1명이 있으면 무조건 폭격을 했다. 계속 폭격을 해서 무조건 다 죽였다. 낙동강을 건너가려고 했는데 낙동 철다리를 미군들이 끊어버렸다. 음력 6월20일이 넘었지. 폭격에 사람들이 다 다쳤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자기 자식을 찾았다. 정신나간 엄마가 베개를 아기라고 하면서 건너갔다. 간신히 만난 친정식구들과 김천 대신강을 건너는데 또 폭격이 시작됐다. 비 오는 밤에 폭탄이 펑펑 터지면서 흙이 파여서 하늘높이 치솟으며 퍼졌다. 8월15일 인민부대가 겨가면서 다락에 숨어있던 남동생을 황간에서 이원으로 끌고가다가 폭격을 당하던 와중에 남동생이 도망쳐 닷새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 내 고향 노근리 쌍굴다리 사건
아군이 서울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었다. 황간에는 죽은 사람이 산처럼 쌓여있어서 송장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다시 황간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 나도 폭격을 겪었지만 내가 떠난 직후 친정어머니한테 미군들이 “황간 굴다리 속에 동네사람들이 다 들어가 있었는데 3천 명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가 황간 노근리 쌍굴다리 사건이 발생한 지 70주년이다. 그 한을 다 푸시기 바란다. 
시댁간다고 하니 친정아버지가 배웅하였는데 영동에서 기차가 막 떠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접동다리까지 걸어갔다. 나는 9개월 만삭의 몸으로 지탄리 금강 줄기까지 피난보따리를 지고 걸어왔다. 물이 많아서 감 장수가 같이 건너가자고 했지만 무서워서 주저했다. 대전 분이 부인을 업어서 건너고 나를 업어서 건네주겠다고 했는데 역시 거절했다. 대구에서 올라오는 피난기차가 다리 위 철로를 지나가면 다 죽을 것 같았다. 그분이 혼자 건너서 건너편에 닿자마자 기차가 지나갔다. 이런저런 걱정으로 나루터에 앉아있는데 구룡천이 고향이라는 심천중학교 학생이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학생이 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나는 학생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고 건너가는데 금강 물살이 얼마나 세던지 다리가 휙휙 후들거려서 간신히 건넜다. 매 순간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아비규환이었다. 나의 생명의 은인인 그 학생을 찾고 싶은데 아직도 못 찾았다. 

■ 사실은 미군들이 더 포악했다
철도를 따라서 이원역으로 가는 길에 날망이로 오니까 미군들이 바글바글했다. 신작로에 첫 번째 집에서 가을이라 콩을 타작하던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붙잡더니 지금 가면 큰일나니 자고 가라고 집으로 끌고 갔다. 산에서 벌목을 못하게 감시하는 옥천군 상감을 하던 주인아저씨는 먼저 피난을 떠났고 아주머니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미군들이 여자라면 아무나 끌고 가서 성폭행을 많이 저질렀다. 미군들이 사립문을 마구 문을 두드리며 나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다. 저녁을 일찍 먹고 무조건 자야한다. 밥을 먹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피난기차 오는 소리가 들려 밤 10시에 일어났다. 아주머니는 이원초등학교로 시동생이 와있나 보러 간다고 꼼짝말고 있으라고 당부하였다. 구 장터가 이씨 부자 양반들이 많이 살았는데 공산당에 가입을 했다가 다시 국군이 들어오니 강변에다가 밤새 꿇어 앉혔다가 날 새면 집으로 보냈다는 말도 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다행히 미군들이 없는 틈을 타 혼자 구둥티를 넘어서 적하리 용수말을 가니 시어머니가 남편이 죽은 줄 아시고 땅을 치며 우셨다. 만삭의 나는 배가 너무 고파서 부엌에서 밥을 한술 떠먹었다. 매번 경찰을 만나면 피난 보따리를 풀러 검사했기 때문에 더러운 옷가지를 빨러 빨래터로 나갔다. 동네 아낙이 남편이 돌아왔다고 일러주어 서둘러 돌아왔다. 남편이 다리를 절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도 나는 부끄러워서 말도 못했다. 남편은 대구 팔공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징집이 돼서 무릎을 다쳐 집으로 다시 오게 되었다. 저녁때 남편이 왜 다리를 다쳤냐고 물어보지 않았다고 삐쳤다. 남편도 어젯밤에 조금 떨어진 집에서 자고 아침을 얻어먹고 넘어온 것이다. 동네사람들 모두가 이런 인연이 어디 있냐고 죽었는지 알았는데 살았다고 축하해 주었다.  
후손들아. 정신차려야한다. 6.25처럼 한치 앞을 모르는 고난과 분단의 비극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고 내 후손들도 겪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나라 전체가 물질들을 펑펑 쓰고 후대에게 남겨야할 것도 다 써버리는 판국이 못내 못마땅하다. 지금의 삶을 누리는 것이 공짜가 아니라 나를 비롯한 앞세대가 처절한 대가를 치루며 이뤄낸 피와 땀 임을 알아야한다. 어떻게 그 세월을 건너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남자에게 의탁해서 사는 것보다 자립적으로 사는 게 더 내 기질에 맞는다. 지금도 인생이 즐거운 일 가득이라서 너무 바쁘다. 우리 동네 경로당 정기 멤버는 나포함 92살짜리 2명 쌍두마차가 쌩쌩하고, 91세 아우님 2명 등 18명 전후로 아직도 평등하게 밥 당번하며 일주일에 두세 번 반찬을 집에서 해오기도 한다.
내가 92세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꼿꼿한 것은 그 참담한 시절을 치열하게 견뎌낸 훈장이다. 지금은 그저 우리 후손들이 우리 같은 전철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안타까움과 나이든 이들의 노파심이 섞여있다.

이연자 작가
이연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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